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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물질성
책의 물질성
  • 강내희 / 서평위원·중앙대
  • 승인 2002.0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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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수상]
강내희 / 서평위원·중앙대

독서란 책을 읽는 것이고, 책읽기의 목적은 주로 책의 내용 파악에 있다고 보는 통념에서는 책의 크기, 모양, 구성 등이 독서의 주요 문제가 되는 일은 드물다. 속독 정독 가릴 것 없이 흔히 권장되는 독서방법이 텍스트 읽기만 중시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 통념에서 책 모양 따위는 ‘조야한’ 물질성의 문제일 뿐이며, 혹여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호사가의 취미일 뿐이다.

그러나 책읽기를 꼭 내용파악에 국한되는 문제로만 볼 것은 아니다.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텍스트 내용은 책이라는 물질적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본문이나 주, 차례, 서문, 색인, 발문 등을 책 속에 배치하지 않은 채 텍스트 구성이 가능할까. 책읽기는 그래서 문자 그대로 ‘책’ 읽기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읽기에서는 책표지나 날개에 광고 문안이 실려 있고, 책에 관한 최소 정보가 책등에 실리고, 책 앞표지의 제호에 사용되는 글자체가 가장 크며, 또 각주나 색인 등은 책의 표면 가까이 배치된다는 것 등이 결코 하찮은 사안은 아니다. 책의 구성은 독서방식을 결정하기도 한다. 본문이 작성된 뒤 쓰이는 서문처럼 저술 시간이 늦을수록 먼저 읽히는 자리에 배치되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이것은 책의 구성을 물질적으로 파악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점이기도 하다.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사람들이 저작을 발표할 때 집필 목적이나 이유 등을 밝히는 서문을 붙이는 관례를 비판한 적이 있다. 특히 철학 저작의 경우는 그런 일이 불필요하다고 했는데, 이는 책의 내용이란 사유의 전개 자체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본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이 이 말을 한 곳이 바로 자기 책 서문이었다는 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서문과 같은 ‘불필요한’ 부분 없이는 책의 내용이 성립하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아닐까. 그렇다면 책의 물질성을 ‘조야한’ 것이라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독서의 중대한 사안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많은 사람들이 우려할 일로 보는 책읽기 기피 현상도 새롭게 이해할 구석이 있을 듯하다. 책은 그 동안 텍스트를 담는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몫을 해왔고, 적어도 상당 기간은 그런 역할을 지속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책의 ‘물질성’은 독서행위가 꼭 책의 형태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임도 말해주고 있다. 텍스트를 담는 그릇에 책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매체가 출현하면 책의 형태도 바뀌지 않겠는가. 책읽기는 오늘의 ‘책’ 읽기로, 즉 다양한 새로운 매체 읽기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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