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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터뷰] 『북학파의 인식과 문학』(태학사 刊) 펴낸 이종주 전북대 교수(국문학)
[저자인터뷰] 『북학파의 인식과 문학』(태학사 刊) 펴낸 이종주 전북대 교수(국문학)
  • 강연희 기자
  • 승인 2002.0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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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8 17:28:32
△책을 쓰게 된 배경과 문제의식은.
“‘熱河日記’를 읽으면서 燕巖 朴趾源이 자기 자신을 삼인칭으로 객관화해서 표현하고, 중국사람의 입장을 빌어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겸재 정선의 그림 ‘만폭동도’처럼 자기의 체험을 삼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아의 객관화 등 이러한 의식과 표현방법이 어떤 인식과 시대적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일까, 실학자들이나 북학파들을 근대의식의 출발로 삼고 있는데, 이들의 주장에 어떤 논리적 배경이 있는가에 대한 소박한 의문이 있었다.”

△북학파의 문학적 특징이나 사상은.
“입체적 시점, 관점의 객관화, 상대주의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중국과 조선(혹은 이민족), 조선과 청나라 오랑캐, 남녀, 인간과 동식물 등 모든 존재 사이에 대등주의와 상대주의를 확산시켰고 그것이 문학과 사상으로 구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입체적 인식을 표현하기 위하여 표현주체인 자신조차도 객관화시킨 것이 커다란 문학적 특징이다.”

△북학파의 언어관과 문체의 특색은 무엇인가.
“이들은 언어가 현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은 古文이란 당대의 현실을 담은 언어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이 문체에 나타날 때, 현실적인 소재가 생생하게 의미를 가지고 등장하고, 서술시점이 입체화하고, 따라서 관념적 진술보다는 마치 카메라 출동같은 묘사언어가 강조된다. 이런 양상을 기반으로 하면서 이들의 의식과 문체가 당대의 보편적 가치와 사고에 대한 反語내지 逆說을 담고 있다.”

△북학파의 논리가 근대 지성사와 사상사에 어떤 인물로 계승되는가.
“중심주의의 해체와 다원주의 확보, 개체성의 확립은 근대의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문화적, 사상적 정체성 확인이 이 시기부터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가능해졌다고 본다. 북학이라는 언표는 오늘날의 언어감각으로 보면 학문적 사대주의 냄새를 풍기지만, 정신사적 문맥에서 볼 때 ‘오랑캐 되놈’을 배움의 대상으로 인정한 것은 문화적 다원주의를 인정한 혁명적 인식의 변화이다. 이러한 상대주의, 다원주의에 입각한 개체성의 인정은 매우 다양한 차원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어느 한 인물에게만 계승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러한 인식의 파문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가의 여부가 아마 우리의 근대사를 보는 관점을 달리해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최한기에 관심을 두고 있다.”

△북학파의 논리가 중국을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새롭게 변용한 주체적 수용이라고 했는데 근거는.
“담헌 홍대용이나 연암 박지원 등은 중국중심, 지구중심, 태양계중심 세계관의 모순점을 자연과학적인 인식으로 부정했다. 이들에게 평면적 관점에서의 화이론, 의리론, 명분론이 타기되고 상대주의적, 입체적 사고가 실현됐다. 그래서 자연과학적 지식과 함께 근대적인 인식론과 세계관이 형성됐다고 본다. 이들의 지성사적 의미를 ‘상대주의적 개체성’의 확립으로 볼 수 있다.”

△흔히 장자는 상대주의적 인식론을 전개한다고 주장한다. 책에서 북학파는 주관유심주의를 견지하면서도 궁리와 강학을 중시하여 주관유심주의의 단점을 보완한다고 했는데 상대주의(혹은 주관유심주의)와 궁리(강학)은 모순되는 범주가 아닌가.
“매우 어려운 철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질문이다. 연암은 法古而創新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기존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한 얘기이고,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시킨 그 자신 내면의 인식론적 체계를 볼 때는 創新而法古였던 것이다. 즉 기존의 선험적, 평면적 세계관을 주관 유심주의적 논리로 거부하면서 자기인식과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것을 객관화시키는 방법으로 궁리와 강학을 이용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궁리와 강학 내지 실증주의적이고 박물학적인 지식의 강조는, 외견상 전대 성리학자들의 典故를 중시하는 경향과 다름 없다. 淸朝의 실학자들에게도 보이는 실학자들의 고증주의가 전대학자들과 다른 것은, 주관적인 자기 개체적 인식을 객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강연희 기자 alles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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