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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그리움이 빚어낸 臥遊錄, 詩와 함께 길이 되다
[책들의 풍경] 그리움이 빚어낸 臥遊錄, 詩와 함께 길이 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8.09.22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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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국토 나의 산하 1~3』 글 박태순·사진 황헌만|한길사 | 2008

육당 최남선이 1925년 3월 하순부터 50여일에 걸쳐 지리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 조선의 산하를 순례한 데는 그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 있었다. 조선적인 것의 발견, 이른바 ‘정신’ 세계를 오롯하게 내세움으로써 민족적 자존을 회복한다는 전략이었다. 육당은 자신의 국토 순례를 신문에 게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 白雲社에서 『尋春巡禮』라는 이름으로 내놓게 된다.

육당은 서문에서 “조선의 국토는 山河 그대로 조선의 역사며 철학이며 시며 정신입니다. …… 조선인의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국토의 위에 박혀 있어 어떠한 풍우라도 마멸시키지 못하는 것이 있음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썼다.

왜 이렇게 썼을까. “곰팡내나는 書籍만이 이미 내 知見의 웅덩이가 아니며 한 조각 책상만이 내 마음의 밭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서적과 책상에서 不具가 된 내 所見을 眞女한 상태로 있는 活文字, 大軌案에서 矯正받고 補養을 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통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작가 박태순이 글을 쓰고 사진작가 황헌만이 사진을 보탠 『나의 국토 나의 산하』(전3권)를 육당의 『尋春巡禮』에 비쳐보는 것은 어떨까. 그가 경향신문에 연재를 시작한 것이 2005년이니, 육당의 순례기와는 80년의 시차가 있다. 그럼에도 둘은 닮아 있다. 질주하는 근대문명이 삼켜버린 국토의 속살을 들여다볼 필요를 느꼈다. 이 복잡함, 혹은 절박함이 작가로 하여금, 육당이 길 나선 것처럼, 21세기 그렇게 길 위를 걷게 한 셈이다.

육당은 ‘조선주의’를 위해 이 나라 산하의 산악과 佛寺를 누비고 다녔지만, 박태순은 민족주의 대신 ‘민족’이라는 피와 살을 보듬고 있는 ‘부드러운 국토’ 그 자체를 재발견하기 위해 누볐다. 그렇게 해서 ‘청계천의 고독한 군중’에서 시작해 ‘하회마을 묵은 세배와 새세배’로 마치는 1권, ‘거제도의 동백꽃 소식’으로부터  ‘춘향골에 춘향이 살고, 흥부마을에 흥부가 살고’에 이르는 2권, ‘금강산 풍류, 화랑들의 길노래’를 첫째 풍경으로 해서 ‘바다의 흉년, 풍어제의 깃발’을 마지막 풍경으로 내놓은 3권이 탄생했다.

박태순 역시 육당의 문제의식에 서 있다. 저자가 다음과 같이 적어 놓은 부분, “국토 언어는 기본적으로 희망의 언어이다.  국토를 희망의 언어로 살펴 보게 되는 것은 발길이 스치는 모든 곳들로부터 생활국토의 낙관주의를 구체적으로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땅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룩해내는 삶터의 현장들은 국토를 풍요롭게 하려는 풍경을 핍진하게 보여준다”과 같은 대목에서 육당의 목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박태순과 황헌만이 일군 『나의 국토 나의 산하』는 몇 가지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박태순 스스로 ‘국토인문지리지’를 표방했다는 점이 첫째다. 국토를 넓게 바라보고 깊게 들여다보자는 취지에서 그가 제안한 이 방식은, 단순한 평면적 국토기행이길 거부하고 있다. 박태순은 길마다, 풍경마다, 고개마다 시인과 詩와 동행한다. 청계천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정희성과 고은, 김수영의 시를 불러낸다.

그의 ‘국토인문지리지’는 ‘망원경의 望遠’을 강조하면서 속도가 지배하는 현실 공간의 뒤편에 남아서 바스라지는 국토를, 풍경을, 길을 호명해내고, 깊도록 대화를 나눈다. 한 예를 들어보자. 그는 인공의 낙원이 된 청계천에서 서울의 문화경관을 냉정하게 응시한다. 그의 시선이 광화문에 가닿을 때, 그는 정희성의 시 「숲」을 불러낸다.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 낯선 그대와 만날 때 /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라고. 박태순이 ‘국토인문지리지’라고 이름붙인 것에 공감하는 것은 다음 장면 때문이다.

그는 청계천의 逍遙하는 군중 속에서 권력과 지배, 그리고 시민사회의 새로운 합창을 읽는다. 그래서 이 시를 단숨에 꿰뚫어 자신의 문법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만든다.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 낯선 그대와 만날 때 /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라는 정희성의 시적 진술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라는 조건에 의해 ‘숲’이 아닌 것이 되고 있다. 이 시는 숲이 아니라는 사실보다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억압상황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역문화 특성을 살펴내는데 소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행기의 특성상, 대상과 관찰자의 주관적 심경이 교직하면서 풍경의 무늬를 만들어내게 마련이지만, 박태순은 주관을 절제했다. ‘시인의 마음으로’라는 내밀한 제목을 단 2권조차 독백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和音을 빚어내고 만다. 이런 식이다. “나는 다시 매화 등걸에 바짝 다가붙어 ‘홀로 아득한’ 향기를 내음 맡는다. 不買香…… 향기를 팔지 않는 꽃이 매화라고 옛 시인들은 찬탄하였다.

그리고 暗香이라 표현하여 겸손한 군자의 덕을 간직하고 있다 하였다. 저 은은한 향기는 국토 산하의 냉기를 수줍은 온기로 갈마들게 해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광양시 다압면 섬진강변 매화축제 앞에서 이육사의 「광야」를 더듬는다.

‘인간의 길 시대의 풍경’이란 제목을 붙인 3권의 직접적인 미덕인, 길을 매개로 인간과 시대의 背理를 깊게 응시했다는 점도 이 기행기의 무게를 더해주는 요소다. 국토의 발견이 여차하면 국토예찬으로 흘러가기 십상인데, 이러한 ‘길의 횡포, 풍경의 반란’에 주목해 국토에 새겨진 모진 흔적까지 껴안아냄으로써, ‘예찬’에 머물지 않고 성찰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박태순은 이렇게 썼다. “풍경은 너무도 돌변하였다. 적응되지 않는 풍경, 버림받는 풍경이 있다. 시대의 기준에서 벗어나버린 풍경이 되어버린 탓이다. 구박받는 풍경, 구제불능의 풍경도 있다.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와 상관되지 않는다 하여 유기된, 어쩌면 폐기된 풍경들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상적이지 않은 풍경이 환기시키는 것이 있다.

과연 제대로 된 풍경이란 어떤 것일까 하는.” 나그네 길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제대로 된 풍경’을 염원한다. 산업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모두는 나그네 길에 오른 인생이다. 그러니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져가는 풍경들에는 우리 모두의 모진 운명이 깃들어 있는 지도 모른다. 박태순은 그것을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불러내고 있다.

臥遊錄이란 이름으로. 아쉬운 점. 글과 함께 쪽마다 들어간 사진의 빛깔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출판사에서 더 신경썼어야 했다. 사진 차례를 책 앞머리에 넣어주는 것은 친절함이 아니라 의무일 것이다. 전체적인 색인이 첨가됐다면 인문지리지로서 더욱 값질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글의 문체가 좀더 풀어져야 좋았다. 딱딱하거나 단조로운 곳이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이런 아쉬움을 쓸어버리고도 남을 ‘기다림과 그리움’으로 새긴 희망의 언어라는 점에서
저자의 국토인문지리지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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