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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프래그머티즘에 깃든 상대주의
네오프래그머티즘에 깃든 상대주의
  • 김동식 육군사관학교·철학
  • 승인 2008.09.22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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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리처드 로티를 다시 말한다

로티(Richard Rorty; 1931~2007)교수는 미국의 네오프래그머티즘 사상을 정립하고 작년에 76세로 타계했다. 분석철학자로 출발해 1980년경부터 프래그머티즘의 부활을 외치던 그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은 무엇일까. 거의 30년에 이르는 그의 독특한 글쓰기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투쟁과 노력으로 해석해야 할까. 그러한 노력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필자는 1990년대 초에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로티의 사상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그의 사상은 그릇된 언어관에 근거한 레토릭으로서, 그가 주장하는 진리관이나 철학관도 지나치게 언어 놀이적인 차원에 머물고 말았다는 것이 주된 논지였다. 그러한 논지를 더 상세하게 전개한 것이 졸저 『로티의 신실용주의』(1994)였다. 아마도 그 책이 그의 사상을 이 땅에 우리말로 본격적으로 소개한 계기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로티의 사상에 대한 소개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지속됐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실용주의의 결과』,『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등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됐다. 논문들도 수십 편이 넘게 발표됐다. 그리고 1996년 12월에는 로티 교수가 한국에 와서 10일간 체류하면서 강연과 세미나를 했으며, 2001년에 다시 방한해 세종문화회관에서 대중강연을 했다. 이러한 세월을 거치는 과정에서 필자가 알기로도 국내대학에서만 3편 이상의 박사학위 논문이 로티의 사상을 주제로 쓰여졌다.

하지만 로티나 혹은 그의 사상적 브랜드라고 할 네오프래그머티즘에 대한 관심은 대중의 경우이건 지식인들의 경우이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었다. 인지도나 인기도가 시원치 않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까닭의 핵심은 로티의 글쓰기 스타일과 사상적 내용 양자 모두에 있다고 보인다.

글쓰기 스타일로 볼 때 로티는 창조적인 오독(misreading)을 행하는 대담한 시인이다. 그래서 그의 논문에는 특정한 주제가 직접적으로 해부되고 대안이 제시되는 법이 없다. 그의 글은 항상 누군가의 주장에 대한 오독이다. 자신의 논점을 제시하기 위해 분석철학자나 유럽의 철학자 혹은 미국의 저술가 중 어떤 인물(들)을 비판하고 변용하거나 비트는 등의 글쓰기가 그의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의 독자들은 논의 주제에 대한 견해를 듣기보다는 論敵이 틀렸음을 보이고자 열변을 토하는 로티의 내러티브를 듣게 된다. 자연히 독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과연 맞는 주장일까?’ 로티는 시원스럽게 논적을 거꾸러뜨리고 한 차원 더 높은 무언가를 암시해주면서 발언을 마친다.
그런데 독자들은 그의 현란하고도 현학적인 글 솜씨에 감탄은 할지언정 오히려 허탈한 느낌을 자주 느낀다. ‘도대체 저렇듯 해체적인 담론 그 다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짙은 무력감이 프래그머티스트가 제시한 대안을 압도해, 철학적 담론의 의의 자체에 회의를 갖게 하기도 한다.

내용상으로 볼 때 로티의 주요 주제는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넓은 범주는 ‘문화의 정치’일 것이다. 문화의 향방을 좌우하는 논의를 하는 것이 철학적 담론의 의의라고 보는 것이다. 그가 지향하는 문화의 전략은 자유와 다양성의 가치를 지키고 확대해가는 것이다. 그의 용어로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의 사회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아이러니스트란 자신의 마지막 어휘조차도 포기할 태세가 돼 있을 만큼 우연성을 수용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대화에 제약을 가하는 것들, 특히 진리, 실재, 과학 등의 이름으로 자유와 다양성과 상상력에 재갈을 물리려는 주장들을 로티는 한사코 비판한다. 중세의 담론에서 신이나 신학자들의 자리를 오늘날에는 진리와 실재를 파악한 과학자나 철학자들이 차지했다고 조롱한다.

철학자나 문예비평가인 지식인은 텍스트에 대한 강한 오독을 통해 대담한 시인의 견지에서 참신한 어휘를 창안해 문화의 정치를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철학은 문화 패러다임의 창안이며, 혁명적인 발상 전환의 지속이고, 지극히 해체적이며, 예술적인 창조의 작업이 될 것이다. 문자 그대로 참신한 메타포의 창안이다. 반면에 과학이나 테크놀로지는 문화의 향방을 논의하는 담론이 아니라 문제해결의 훌륭한 수단이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에 로티의 내러티브가 이 정도쯤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훨씬 더 흥미롭고 다이나믹하고 시적이며 혁명적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훨씬 더 해체적이며 인간의 삶과 언어에 대한 비극적 니힐니스트(nihilist)의 서사시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프래그머티즘’이기 어려울 것이다. 실천과 결과를 중시하는 경향이 송두리째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티의 내러티브는 실제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 그의 프래그머티즘은 언어와 진리, 실재 등에 대한 논의에서 보여준 과격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아주 맥풀린 대답을 제시한다. 비록 우연성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현재 우리의 자문화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참신한 메타포를 창안하고 새로운 어휘들을 만들어가자고 제안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뼈대를 자문화중심주의의 기틀로서 당연시한 채로, 이른바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지키면서, 세상사에 잘 대처해나가는 어휘들을 선택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역설적이다.

자신의 마지막 어휘조차도 포기할 태세가 돼야 한다는 아이러니스트인 로티가 정치의 영역, 공적 도덕의 담론에 와서는 오히려 반대로 매우 보수적인 견지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필자의 눈에는 미국의 기득권을 지켜가면서 새로운 어휘를 창안하자고 주장하는 네오프래그머티즘의 진면목으로 보인다. 누구도 특권적 지위를 누릴 담론을 제시할 수 없으므로, 누구든 자문화중심주의를 택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기득권의 강자에게 유리한 ‘불공평한’ 게임의 법칙이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도 분석철학에 대한 로티의 비판과 공격은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미국의 사상이라고 치부됐던 프래그머티즘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게 했고, 퍼트남이나 번슈타인(R. J. Bernstein) 등의 비판적 동조자들을 얻어 네오프래그머티즘이라는 새로운 사조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이 글로벌 이슈가 되거나 글로벌 지식인들의 사상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일까. 각각의 나라와 민족과 언어를 배경으로 하는 지식인들의 소박한 민족주의 때문일까. 그런 배경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욱 더 큰 거부감은 로티의 내러티브에 은연중 묻어나는 ‘디즈니랜드 옹호론의 냄새’일 것이다. 미국판 자유주의, 미국판 자문화중심주의, 미국판 글로벌리즘 등에 대한 비전이 로티의 네오프래그머티즘의 바탕색으로 짙게 깔려 있다는 의혹과 예의 그 기분 나쁜 ‘불공평’ 때문일 것이다.
그 불공평이야말로 소크라테스의 편이 아니라 트라시마코스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은 우연성의 산물이므로 특권적 담론은 없고, 그래서 자문화를 출발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고, 그 경우 대안의 선택은 프래그머틱한 것 이외에는 달리 없지 않는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 로티의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도전이라고 보인다.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하면서 저 담론에 깔린 기득권 옹호의 상대주의를 극복해나갈 것인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제, 그 과제를 로티의 사상은 21세기의 지구인들에게 남겨주었다.
  

김동식 육군사관학교·철학

필자는 에모리대에서 「근거성 없는 수사학의 한계」로 박사학위를 했다. 『로티, 철학과 자연의 거울』등의 저서와 「네오프래그머티즘과 역사주의」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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