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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이 휩쓸고 간 파라다이스
신의 손이 휩쓸고 간 파라다이스
  • 고정희 고정희조경설계연구소
  • 승인 2008.09.16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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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정원에 담겨져 있는 공간의 비밀

바로크 정원은 르네상스 정원의 평면기하학적 원칙을 깨고 과감하게 3차원의 공간으로 도약한 시대였다.  정원문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정원처럼 인류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해 온 것도 드물지 않나 싶다. 적어도 서구에서는 그랬다. 

서구의 정원문화는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이에 결정적인 양분을 제공한 것은 성서에 나오는 실낙원의 에피소드였다. 왜 아담과 이브의 첫 보금자리가 하필이면 ‘정원’이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류문화사적인 측면에서 광범위하게 접근하여야 풀어낼 수 있는 숙제일지도 모른다. 정원문화에서 궁극적으로 묻고자 하는 것은 “왜 정원이었을까”가 아니라 그곳이 “어떤 곳이었을까”라는 지극히 ‘형상학적’인 접근이다. 

그래서 아마도 형상보다는 관념을 중요시여기는 한국의 정신적 토양에서는 정원의 양식이나 다양한 형태 등이 그닥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구의 경우는 달랐다. “에덴동산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라는 문제가 실제로 관건이 됐고, 지금도 되고 있다.

어떤 형태의 정원을 만들어야 신이 노여움을 풀고 다시 하강해 우리와 함께 그 곳에서 거닐수 있을 것인가. 실제로 창세기를 보면 신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와 함께 거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그러니까 파라다이스에 대한 염원은 곧 신과 화해하고 싶다는 욕망일 것이며, 인간의 힘으로 에덴동산을 재현하면 혹시라도 화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단순하지만 사랑스러운 의도가 정원을 만들게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시작은 그러했을지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종교성은 퇴색되는 대신 각 시대를 풍미했던  정신세계가 정원에도 반영됐다.

중세 이후 서구의 정원은 양식의 변천을 확실히 읽을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중세 수도승들이 디자인한 에덴동산, 즉 파라다이스의 모습과, 중세의 지나친 종교성에 반기를 들며 만들어진 르네상스 정원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재미있는 것은 비록 종교성에 대한 반항에서 출발한 것일지라도 르네상스 양식의 정원이나 그 이후에 풍미한 바로크 양식의 정원 역시 ‘파라다이스’를 그 원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평론가에 따라서는 바로크 정원양식에서 파라다이스 정원이 극치를 이룬다고 말하기도 한다. 원본보다 낫다는 말이 아니라, 이 시점에 와서는 파라다이스가 성서적 근본을 벗어나  그 자체로 생명을 갖는 독립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는 뜻이다.

중세의 수도원에서는 정원을 실제로 파라다이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파라다이스는 정사각형이었다.
중정이었으니 건축으로 인해 정의된 형태였고, 건축의 기본이 되는 기하학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가 정사각형이므로 파라다이스의 형태가 정사각형일 수밖에 없었다. 서구에서만 통용되던 원칙이 아니다. 한국의 전통 정원에서도 정사각형 연못을 둬 완벽한 세상을 상징했다. 르네상스가 들어오면서 정원에서 종교성이 뒤로 물러나고 이탈리아 귀족들이 내세운 유유자적한 은둔처의 의미가 급부상 했을지라도 정사각형의 원칙은 남게 됐다. 아니 오히려 이 정사각형이 정원조성의 절대적인 기본원칙으로 굳어진 것이 르네상스 시대였다.

정사각형이 음계처럼 되풀이 되며 정원 공간 전체를 구성했던 것이다. 회양목이나 주목을 반듯하게 깎아서 사각형에 테두리를 만들고 내부를 장식하는 것에서 유래해 자수화단이 생겼고 마침내는 이 자수화단이 마치 서구 정원의 대표적인 요소인 것처럼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자수화단이 아니라 이 정원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왜 정사각형인가 하는 사실과 이들이 반복되는 리듬과 음률인 것이다. 얼핏 보면 이 원칙이 바로크 시대에 고스란히 전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면서 정원원칙에 거대한 혁명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르네상스 정원이 파라다이스를 정사각형, 즉 평면기하학으로 해석하기를 고집했다면 바로크는 과감히 이 원칙을 깨고 평면에서 3차원의 공간으로 도약한 시대였다. 그래서 정사각형의 신드롬도 바로크 시대에 깨지고 만다. 그렇다고 사각형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정사각형 대신 직사각형이 유유히 등장했다. 그게 그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를 보면 절대 사소한 차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르네상스의 뒤를 이은 바로크 시대는 절대군주의 시대였다. 군주들이 이뤄 놓은 절대왕정의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는 장소로 정원이 선택됐다. 게다가 건축이 갖는 한계성을 정원이 뛰어넘어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바로크 정원의 대표작인 그 유명한 베르사이유 정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온 세상 다 나의 것이라는 느낌을 확실히 심어주기에는 사방이 막히고 지붕이 덮여있는 건축물보다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정원이 제격이었을 것이다. 식물은 이제 자연이 아니라 정원이라는 새로운 왕국을 짓는 ‘건축자재’로 이용됐다. 수직으로 깎아 건물의 벽처럼 만들어 공간을 만들거나, 원추형으로 다듬어 세워놓으면 그대로 조형물이 됐다.

그러나 바로크 정원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이 거대한 공간을 어떻게 ‘하나’의 파라다이스로 엮어내는가 하는 거였다.  그것이 왕들의 파라다이스라는 것은 그들의 편리한 해석이었을 수도 있다. 정원을 디자인 했던 작가들은 나름대로의 계산이 따로 있었다. 파라다이스는 하나 일 수밖에 없다. 아기자기한 작은 공간들을 이리저리 꿰어서 어렴풋이 정원이 되게 하는 것은 파라다이스의 유일성과 완벽성에 대한 모독일 수 있었다.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고자 했다. 베르사이유 정원이나 보 르 비콩트 정원 등 수많은 바로크 정원들은 마치 거대한 손 하나가 한 번 휘익 쓸고 지나간 것처럼 디자인돼 있다. 이것이 바로크 정원의 힘이다. 그리고 이것은 평면기하학의 힘이 아니라 공간기하학의 힘인 것이다. 이 공간의 힘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우선 테라스를 높다랗게 만들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넓은 공간도 비교적 쉽게 전망 된다. 그리고 시야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도록 시원하게 세상을 열어놓았다. 그렇더라도 베르사이유처럼 정원의 총 길이가 3킬로미터가 넘으면 멀리 보이는 정경들은 사뭇 왜소해 보인다. 멀리 있는 사물도 웅장한 느낌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바로크 정원의 디자이너들은 여러 가지 복잡한 작법들을 고안해 냈다.

원근현상, 지형의 경사도 등을 정확히 계산해 뒤 공간이 앞으로 당겨져서 가까이 보이게 하는 망원경 현상을 적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때 구차하게 정사각형의 원칙에 매달릴 수 없었다. 정사각형은 인간의 눈높이에서 내려다보면 짧은 사다리꼴로 ‘보인다’. 이처럼 바로크정원에서는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정사각형이 파라다이스의 원형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의 눈에 실지로 보이는 세상과 현상을 분석하고 그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절대군주의 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 의미야 어찌됐든 인간이 인지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파라다이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크 정원 디자이너들의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심지어는 원근현상이라는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과 싸우는 것도 불사했다. 이것이 보는 이들을 무의식중에 매료시키는 바로크 정원의 진정한 힘이라 할 수 있다.  

고정희/ 고정희조경설계연구소 소장

필자는 독일 베를린대에서 조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저서로는 『고정희의 독일정원 이야기 I』,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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