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6:05 (금)
[신간안내] 책이 말하는 세상의 모습들
[신간안내] 책이 말하는 세상의 모습들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8.09.16 14: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책은 세상의 창이 아닐까. 한정된 시공간과 협소한 관념들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들에게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눈을 제공해준다. 이번 주 신간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자 창으로서 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다.

우선 가장 묵직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 분야에서는 『생성의 철학 : 하이데거의 존재론과 롬바흐의 생성론』(전동진 지음, 서광사)이라는 책이 눈에 띈다. 책의 핵심은 그림철학에 대한 제안에 있다. 그림철학은 개념이나 문자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철학을 하자는 것인데, 이때 그림은 어떤 기성 개념의 재현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사유”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간혹 그림을 볼 때 떠올리는 독특한 단상이 철학적 사유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제안인데, 그 어려운 철학을 접근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다만, 저자 자신도 그림철학과 관련해서 “역부족”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어떻게 그림이 고도의 철학적 개념들을 대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사회학 분야에서는 『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새물결)이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의 핵심 논제는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인간들이 도리어 쓰레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늘어나는 비정규직과 거리로 내몰리는 위태로운 삶의 모습들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인간을 쓰레기와 등치시키는 저자의 시도는 사실 새로울 것도 없다. 다만 인간이 쓰레기가 되고 있는 문명의 현실이 기술진보와 경제성장이라는 현대 사회의 모토와 관련이 있다는 지적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인간은 더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다가 스스로 쓰레기장에 버려지기를 자초했다는 이야기인데, 저자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이대로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미 우울한 우리 삶과 사회의 모습을 쓰레기 더미의 잿빛으로 한 번 더 조망(?)해보고픈 독자에게 적당한 책이다.

열길 물속보다도 알기 어렵다는 인간의 마음을 파헤치는 심리학에서는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스키너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가 있는데, 스키너가 “자유를 위한 투쟁은 자유로워지려는 의지 때문이 아니고 인간 유기체의 특징을 이루는 어떤 행동의 과정들 때문에 일어난다”며 특유의 행동주의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스키너 당대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인간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라 환경 속에서 결정된다’는 주장은 논쟁적이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조작, 통제 등의 개념은 그 단어의 어감에서부터 심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하지만, 자유와 존엄을 백날 외치기만 하는 실속없는 이데올로그들보다, 과학을 통해 냉철하게 ‘인간’이라는 존재를 직시하고자 노력하는 과학자에게 한 번쯤 신뢰의 눈길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사회비평서라고 할 수 있을까. 『환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파트릭 펠루 지음, 양영란 옮김)는 잘 갖춰진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의료제도에조차 거칠게 몰아치고 있는 시장주의 개혁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사람들의 건강이 돈으로 대체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회계 전문가들이나 내세울 만한 논리”라는 말로 압축된다. 그런데 이 책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다소 이중적이다. 하나는 병원에 대한 사르코지 정부의 시장주의 개혁이 야기하는 폐단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 비하면 천국인 프랑스 의료계의 현실은 무엇인가를 엿보고자하는 시선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공공연하게 의료계의 현실을 풀어내고 고발하는 필력 좋은 의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운 일이다. 병원을 중심으로 프랑스라는 사회를 엿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우리가 늘 눈으로 접하고 사는 건축물들. 바로 그 건축물에 대한 비평서 한 권이 『교양으로 읽는 건축』(임석재 지음, 인물과사상사)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그런데 건축물이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는, 이제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애써 보여주려는 저자의 시도가 그다지 참신해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우리는 ‘성장율 0퍼센트의 사회와 자연’이라는 책의 결론적 부분을 의구심 어린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성장율이 0퍼센트가 되면 집을 지을 최소한의 자재와 노동력도 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경제학적 직관이 저자에게 부재한 것일까. ‘건축’이라는 외양만이 아니라, ‘경제’라는 더 중요한 이면의 메커니즘을 헤아리지 못함이 아쉽다. 하지만 건축에서 인문적 가치를 찾고 구현해보고자 하는 저자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시선을 과거로 돌려보면 역사학 분야에서『한일교섭 : 청구권문제 연구』(오오타 오사무 지음, 송병권 외 옮김, 선인)와 만나게 된다. 한일 교섭과 일본 및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연관시키는 이 책에서 우리는 향후 북일조약 체결 시 교훈으로 삼아야 될 부분을 따로 조언하고 있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우리가 제대로 거론조차 못하고 있는 북일조약에 대해 “식민지 지배·전쟁 피해에 대한 사죄가 전문에 명기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일조약에는 없는 개인보상 조항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이 일본인 저자의 당당함은 곱씹어볼 만하다.

유한한 생을 넘어선 곳을 보고자 한다면 종교학 분야의 『엘리아데의 신화와 종교』(더글라스 알렌 지음, 유요한 옮김, 이학사)를 뒤적여 봐야 한다. 그런데 생을 넘어선 저편에는 죽음만이 있어서일까. 저자가 특히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갱신’에서 엘리아데의 입을 빌려 강조하는 정치적인 것, 실증적인 것, 경제적인 것에 대한 영적인 것의 우월성을 읽는 마음이 편치 않다. 종교의 깃발 아래에서 어두웠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서양인이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게 종교적인 것, 영적인 것의 우월함을 말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저자의 내적 논지만 따라갈 것이 아니라, 외적, 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지점에 위치할 수 있는 책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책이다.

또 하나의 세상, 사이버 세계를 다루는 책으로는 『정보화시대의 사이버윤리』(리차드 스피넬로 외 지음, 이태권 옮김, 인간사랑)가 있다. 불법다운로드와 관련된 저작권 문제와 인터넷 상 언론 자유의 한계는 어디인가 등의 문제로 말이 많은 최근 상황에 시의적절하다. 시중의 다른 책들과 구분되는 이 책의 장점은 사이버 윤리에 대한 단순한 비평적 글이 아니라, 전문 학자들의 소논문을 집대성했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읽고 마는 책이 아니라, 현실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사이버 윤리와 관련해 언제든지 참고할 수 있는 책인 동시에, 관련 학자들의 연구에 보탬이 될 수도 있는 책이다. 결정적인 아쉬움은 바로 외국 학자들의 논문만 있다는 점이다. 사이버 윤리에 대해서라면 국내의 특수한 상황에 비춰 고찰해야 할 점들이 많을 텐데, 주로 외국 사례를 중심으로 한 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