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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성’에 가려진 재현의 한계
‘환상성’에 가려진 재현의 한계
  • 최혜실 경희대·국문학
  • 승인 2008.09.16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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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김탁환 소설, 흡인력의 이중성

그의 ‘백탑파’ 소설들은 재미와 교훈의 두 토끼를 다 잡은 작품으로서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국 문단에서 이러한 안정적인 조화를 이룬 문학에 대한 평가는 극히 야박하다

김탁환은 才와 學을 겸비한 작가다.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후 그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역사에 나타난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작업들을 십 여 년 넘게 계속해 오고 있다. 字句 하나 지나침 없이 인용한 출처를 달았고 참고한 서적만도 백여 권이 넘는다. 게다가 그의 소설은 참으로 재미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손에 책을 놓을 수 없다는 미사여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기에 작품이 주는 메시지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문단에서 김탁환을 눈여겨보는 이는 없다. 그는 주류문학계에서 외면받고 있으며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단 문화컨텐츠 제작자들은 그를 반긴다.

그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은 드라마로 만들어져 시청률 1위를 기록했으며 『방각본 살인사건』도 영화화됐다. 문화컨텐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미다. 결과로서의 재미는 당연히 제작자들의 관심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미학 구조가 한국 문단의 규칙에서 조금 비껴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20세기 강단에서 논의되던 좋은 역사소설은 ‘과거에 현실적인 의의를 줌으로써 역사적인 진실성을 구할 수 있는 소설’을 의미했다. 작가가 자신의 전망을 갖고 현실을 재현하는 리얼리즘의 방식은 사실과 상상력 간의 긴장관계에서 항상 전자에 비중을 두고 진행돼왔음은 물론이다.

현실재현에 대한 강박은 최인훈의 『태풍』이나 복거일의 『묘비명을 찾아서』같은 대체 역사소설이 등장했을 때도 그것이 현실에 대한 비판을 단단히 거머쥐고 있었기에 그나마 문학적 의미가 부여됐던 것이다.

재현에 대한 자의식과 환상 중독증 김탁환 소설도 이런 점에서는 재현의 자의식을 벗어나고 있지 못한 듯 보인다. 정확하고 풍부한 역사적 자료에 상상력을 결합한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는 그의 白塔派 삼부작을 보자. 백탑파는 영정조 시대 탑골 백탑 아래 모여 시문을 연구하고 經世를 논하던 지식인 그룹으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등을 핵심으로 한 정치개혁 세력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중심에 놓고 이명방, 김진이란 가상의 인물을 슬쩍 끼워 넣었다. 기본 주제도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소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조선 후기 보수와 진보가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정치적 상황이란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놓고 본다면 김탁환의 ‘역사소설’은 현실에 대한 자각의 전망을 과거에 투사하는 근대 리얼리즘 역사 소설의 공식을 잘 지키고 있는 듯하다. 페이지 갈피마다 보이는 주석처리와 단어 해석, 그리고 백여 편이 넘는 참고문헌들은 작가가 얼마나 현실 재현에 공을 들였는가를 말해준다.
야소, 라마승 같은, 현재 통용되고 있으면서도 예스러운 단어들을 굽이굽이 밝혀내 배치함으로서 당대가 현대까지 이어지는 근대의 시발점임을 드러내는 한편 ‘셈들지’, ‘두대박이’, ‘해반주그레’, ‘석새짚신’ 같은 사라진 우리말을 통용해 당대를 재현하고 있는 듯 보이게 한다.

그러나 과연 ‘재현’이란 무엇일까. 옛말을 찾아내어 쓴들 ㅸㅿㆍ 같은 음성을 어찌 재현할 수 있을 것이며 당대 인물들의 습관이나 감정적 관습을 어찌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 작품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의 낭만적 사랑이야말로 현대 그 자체의 감수성일 뿐이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소설의 시공소가 조선 후기라는 환상에 사로잡힐 만큼만 옛 문헌의 자취를 끌어다 쓰고 있을 뿐이다. 즉 여기서 당대 현실의 재현은 환상을 위한 효율적인 소도구인 것이다. 김탁환의 다른 소설, 『나 황진이』의 기록은 이덕형의 『송도가이』나 허균의『성웅신도록』 정도에 남아있을 뿐이고, 『리심』에 대한 기록은 단지 몇 줄에 불과하다.

 
조선의 궁중 무희에 대한 이 짧은 기록을 세 권의 방대한 책으로 만드는 방법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에 있을 뿐이다. 그의 소설이 취하고 있는 이 방식이 아직 ‘환상성’에 대해 조심스러운 한국 문단에서 그를 가볍게 받아들이는 원인이 되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재미, 그 정체 김탁환의 소설은 재미있다.

『불멸의 이순신』은 시청률 1위의 드라마였고 『방각본 살인사건』은 영화화됐다. 앞으로도 영화로 만들면 재밌을 것 같은 작품들이 줄 서 있다. 마치 박사논문처럼 주석이 잔뜩 붙어있는 이 ‘현학적’인 책이 왜 이렇게 재미있는 것일까.

그 비밀은 당대 현실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지니는 지역적 특수성이 기실 현대 대중이 재미를 느끼는 요소들에 시너지 효과를 주는 방향으로 철저하게 계산돼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성룡의 ‘취권’을 위시한 무협 영화, 성냥을 씹으며 긴 바바리 자락을 휘날리는 주윤발을 연상하게 하고 마는 홍콩 느와르, 마카로니 웨스턴 뿐 아니라 최근 한국에도 등장한 만주 웨스턴물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해답은 금방 나온다.

서사 장치는 철저히 할리우드 문법을 따른다. 90년대 이후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된 80%와 에이미상에 노미네이트된 90% 이상의 작품에서 사용된 극작 지원 프로그램 드라마티카 프로(Dramatico Pro)의 구조를 보면 우리가 그동안 산발적으로 느껴왔던 재미있는 이야기 유형들이 체계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주인공과 상대 인물과의 설정 방식이나 스토리 형식 짜기 등에는 관객을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인력의 공식이 존재한다. 이 흡인력에 중국이나 이탈리아 등의 지역적 특성을 결합시키는 방식은 지금까지 미국이 아닌 제3국이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나름의 인기를 획득하는 좋은 전략이었다.

백탑파 삼부작은 바로 이 공식에 부합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선 당장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윌리엄 수도사와 그의 수련제자 아조의 모습, 장서관 서책을 둘러싼 연쇄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교황, 황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암투와 음모를 드러내면서 서구 중세의 모순을 형상화한 줄거리의 유사성이 눈에 띈다.
그러나 표절이라구? 천만의 말씀.

두 캐릭터는 일찍이 셜록 홈즈와 그의 수행원 역할을 했던 왓슨 박사의 관계와 완전 일치한다. 누가 누구를 베꼈다고 할 사이도 없이 이 구조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비롯한 우리의 이도령과 방자 등의 이야기 원형에 입각한 것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문법의 그 가공할 만한 흡인력은 거대자본의 승리라거나 문화의 식민화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 원형에 입각한 보편적 공감대 형성이라는 또 한 면을 아울러 보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그의 이야기 곳곳에서 이야기 진행의 빠른 속도감, 예상할 수 없는 결말, 모험에 참여하는 청춘 남녀의 사랑이 버무려지면서 그 ‘재미’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가끔 주인공이 알몸으로 표창을 쥐고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면 등을 넣어 ‘취권’ 등에서 보아온 코믹한 액션을 연상케 하는 기지도 발휘하면서.

대중과 순수의 이분법 사이에서‘낯설게 하기’의 장치로서의 조선 중세 풍물의 세세함과 익숙함을 주는 대중적 서사 장치의 절묘한 조화, 여기에 백탑파 실학자들과 정조의 이상과 실패를 통해서 드러내는 역사의 방향성은 가히 재미와 교훈의 두 토끼를 다 잡은 작품으로서 무리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한국 문단에서 이런 안정적인 조화를 이룬 문학에 대한 평가는 극히 야박하다. 앞에서 예로 든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탐정소설이나 SF물 같은 하위 장르들을 자유롭게 포섭해가면서 친절하게 독자에 다가서는 문학을 문단은 통칭해서 ‘대중문학’이라 분류한다.

이렇게 매끄럽게 영상물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이 그의 통속성을 증명하는 좋은 증거라도 되듯이 저만치 멀리서 그들을 바라볼 따름이다. 한국문학에서 유난히 낯선 환상성과 재미를 기반으로 하는 그의 문학은 그래서 많이 손해를 보고 있다. 그가 보는 손해가 한국에서 『반지의 제왕』같은, 격조 높은 문화컨텐츠물이 나올 수 없다는 우려와 관계가 있기에 더욱 문제가 있다.

최혜실 경희대·국문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문콘텐츠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모든 견고한 것들은 하이퍼텍스트 속으로 사라진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을 만나다』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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