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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2001 송년세미나 기조발제] 박이문 교수 ‘생명공학이 제기하는 형이상학적 및 윤리적 문제’
[교수신문 2001 송년세미나 기조발제] 박이문 교수 ‘생명공학이 제기하는 형이상학적 및 윤리적 문제’
  • 교수신문
  • 승인 2002.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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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8 17:11:34
인간은 나름대로 인식과 가치선택을 전제로 산다. 그런데 첨단생명공학은 인간을 형이상학적 및 윤리적 악몽 속에 빠뜨리고 있다. 게놈의 해독에 따라 인간을 무한히 조작할 수 있는 놀라운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신념으로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현실로 드러났다. 인간과 동물, 생명과 물질의 절대적, 즉 형이상학적 경계선의 철거, 따라서 모든 존재의 물질적 환원, 즉 유물론적 혹은 유사유물론적 일원론의 세계관을 함의한다.

이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세계관의 바탕과 윤리적 규범의 포기를 의미하며, 실제로 그것을 받아들이기엔 심리적으로 고통스럽고 논리적으로 난처하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공학에 대해 전통윤리적 전제를 보존하는 틀에서의 제한적 수용, 전적인 거부, 새로운 윤리적 근거의 정립 등 세 가지 입장을 생각할 수 있다.

전통적 윤리관에 전제된 인간관을 고수하면서 첨단생명공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려는 입장은, 전통적 윤리관은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수용해야 하는데 생명공학에 함축된 형이상학은 유물론 혹은 유사유물론적인 일원론이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다. 또 생명과학이 서술하고 생명공학이 보여주는 인간조작을 인정할 때, 인간중심적 전통윤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생명과학과 공학의 객관적 사실을 인정할 때, 인간에게 존엄성이 부여될 수 있다면, 모든 생명에게도 나름대로 존엄성이 부여돼야 한다는 논리적 귀결이 불가피하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존엄성 대신 생명의 신성성이라는 개념이 생기게 되고, 인간중심적 윤리의 자리에 생명중심적 윤리가 자리잡게 된다. 여기서 생명의 신성성이라는 개념과 생명중심주의적 윤리는 생명과학과 공학에 전제된 일원론적 형이상학, 생명관 및 인간관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생명공학을 총체적으로 거부하는 태도 또는 생명중심적 윤리에는 객관적 사실을 냉혹하게 인식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이 필요하다.
윤리적 원칙의 궁극적 준거를 더 이상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신비로운 초월자에서 찾지 않고도, 아니 찾을 수 없고, 인간 자신의 선택에서 찾을 수 있고 또 찾아야 한다. 윤리적 악몽을 몰고 온 생명공학에 바람직하게 대처하자면, 과학적·이성적·인문적·경험적 관점으로 윤리적 패러다임의 혁명을 일으키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의 구체적인 윤리적 선택과 대책은 불안정한 감정이나 충동적 감상, 막연한 신비주의적 신념, 예측할 수 없는 종교적 도그마, 불안정한 감상이 아니라 과학적 지식과 투명한 이성에만 의존해야 한다.

모든 윤리적 결정이 시간적 제한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적 능력에도 한계가 있는만큼 모든 것을 알고 논리적으로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선택을 만족스러운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하고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들이 있다. 가능한 한 거시적, 원시적 그리고 총체적 차원에서 객관적 현실을 냉철히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사유하려는 태도이다. 그것은 또한 개인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한 사람 그리고 한 소수집단의 독단을 넘어 사회적 공론 그리고 더 나아가 지구상 모든 집단들의 생각들을 부단히 검토하고 참고하며 수렴하려는 개방적 마음의 열린 자세이다.

그러나 윤리적 선택 문제의 종착점에는 궁극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인간적 삶에 대한 비전 선택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 비전의 선택에 따라 산업발전이 제기하는 생태계파괴를 비롯 첨단생명공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대답도 사뭇 다를 수 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신이나 하늘을 비롯해서 그 아무도, 그 아무 것도 나 대신 대답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쟈크 모노의 말대로 인간은 각자 얼어붙은 차디찬 우주 속에서 홀로 외롭게 궁극적 결단을 내리고 절대적 선택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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