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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인권이 시사적인 이유
보편적 인권이 시사적인 이유
  • 박홍규 영남대·법학
  • 승인 2008.09.0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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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좌파다』 앙리 레비 지음|변광배 옮김|프로네시스|2008|459쪽

앙리-레비의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는 2007년 5월, 실용과 경제를 내세운 우파 후보 사르코지가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나왔다. 이어 벌어진 한국의 대선도 같았다는 점에서 그 책이 한국에 소개되는 의의가 있다고 역자는 말한다. 그러나 한국과 프랑스의 2007년은 당연히 같지 않았다. 특히 앙리-레비가 자신을 우파인 사르코지와 달리 좌파라고 할 때의 좌우파란 한국의 그것과 반드시 같지 않다. 게다가 프랑스 좌파의 다수가 지지한 사르코지를 우파라고 보는 프랑스와, 좌파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타적인 이명박을 우파라고 하는 한국은 당연히 다르다. 이 책은 기교와 수사와 재기로 흘러넘치지만 보기 드물게 유려한 번역과 상세한 역주는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하게 한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앙리-레비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한 나의 동감과 반감을 솔직하게 보여주려는 독후감에 불과하다.

저자에 대한 최소한의 소개도 불필요할지 모르지만 앙리-레비는 우리에게 그다지 친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한두 가지만 언급해보자. 1948년생이니 올해 60세. 그가 존경하는 카뮈나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에서는 다양한 글쓰기와 실천하는 지식인이라는 존재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어쩌면 앙리-레비는 그 마지막 지식인일지 모른다. 그런 그를 이른바 신철학의 주창자라고 하지만 신철학은 지난 30년 프랑스에 나타난 여러 사상들이 프랑스는 물론 우리나라에까지 회자된 것에 비하면 그리 중시되지 못했다. 일찍부터 철학교수를 지내며 30세에 쓴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으로 국내외에서 유명해졌고 그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즉시 소개됐음에도 말이다.

그 뒤 많은 책을 썼지만 우리말로는 『자유의 모험』과 『아메리칸 버티고』에 이어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가 네 번째로 번역됐다. 30세에 쓴 처녀작부터 59세에 쓴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까지 그의 주장은 변함없이 공산주의를 포함한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신철학이다. 그것은 절대자나 이데아, 역사주의, 변증법, 선악 이원론의 플라톤-헤겔-슈펭글러-헌팅턴 등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 반전체주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페인이나 토크빌, 러셀이나 포퍼, 사르트르나 카뮈, 아렌트나 레비나스, 오웰이나 솔제니친 등이 주장한 반전체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아 크게 유행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프랑스의 어떤 신기하고도 난해한 철학보다 그의 신철학, 내 나름으로는 민주와 인권의 보편철학이라고 부르는 그의 상식철학을 좋아한다. 철학이라는 게 왜 반드시 어려워야 하는가. 그는 도리어 그런 상식의 입장에서 난해하고 신기한 현대사상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현대사상에 대한 비판서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나라에 곧잘 토막유행으로만 소개되는 현대사상에 대한 나름의 정리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더욱 더 흥미로운 점은 그의 화두가 우리 시대의 과제인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인권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유 없는 평등을 주장하는 좌파나 평등 없는 자유를 주장하는 우파 모두에 반대하고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한다. 그래서 소위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한다는 식으로 그의 입장은 좌우 양쪽에서 쉽게 비판될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그의 논단에는 쉽게 찬성하기 어려운 점도 적지 않다. 가령 우리나라에도 저명한 좌파인 벨로나 로이 등의 반세계화론자도 그가 보기에는 자유 없는 평등을 주장하는 시체 좌파와 같다. 앙리-레비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해 생긴 자유주의와 계몽주의를 무시하는 반자유주의 좌파, 특히 전체주의자들인 독일의 하이데거와 슈미트를 비판하고, 그들을 추종하는 알튀세, 데리다, 발리바르, 부르디외, 아감펜, 지젝, 슬로트다이크, 무페, 버틀러 등의 좌파도 비판한다는 점에서 과도한 단순화에 빠져 있다는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물론 그는 헌팅턴이나 슈트라우스 등의 우파도 비판한다. 최근 하이데거나 슈미트를 비롯한 그 여러 학자들을 추종하는 우리나라 좌우파는 이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스승인 데리다를 포함한 반자유주의에 대한 앙리-레비의 단죄는 단순할 정도로 명확하다.

 

그가 반자유주의자 중에서도 특히 반보편주의자-반유럽주의자로 단죄하는 이들 중에는 『정체성』을 쓴 쿤델라나 반세계화주의에서 2003년 대안적 세계화주의자(실상은 민족주의자)로 변신한 보베까지 포함돼 있다. 앙리-레비는 그들을 좌파가 아니라 우파라고 본다. 이러한 앙리-레비의 좌파 비판은 반미주의에 대한 비판의 경우 더욱 더 논쟁적일 수 있다. 『아메리칸 버티고』 등에서 그 역시 미국의 많은 문제점을 비판했지만, 그가 반대하는 반미주의(그는 자신을 반-반미주의자라고 한다)란 그런 문제점 이전의 미국 자체에 대한 좌파의 뿌리 깊은 증오를 말한다. 그는 유럽의 반미주의를 계몽과 루소에 대한 비판에서 찾는다. 사회계약에 의한 국가의 구성이란 거짓이라고 본 유럽인이 그런 국가를 만든 미국인을 잘못 비판한 것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앙리-레비는 네그리의 『제국』도 그것이 제국을 반중심적으로 본 점에 찬성하면서도 네그니 등이 반자유주의라는 점 등에서는 비판한다. 이보다 더욱 논쟁적인 점은 촘스키에 대한 앙리-레비의 비판이다. 그는 촘스키를 나치의 독가스실 존재를 부인하며 코소보 사태에 대해 사실을 왜곡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읽은 한 촘스키가 나치의 독가스실 존재를 부인한 적은 없다. 앙리-레비에 의하면 반유대주의는 나치 이후에도 여전히 뿌리 깊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홀로코스트 산업』을 비롯해 독일의 발저와 같은 문학자를 비롯해 최근 유럽의 심상찮은 반유대주의 분위기는 분명 그렇다. 앙리-레비는 단지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지만 그 점이 과도한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교조적인 배타적인 이스라엘 호전주의자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 모든 주장의 핵심은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인권에 대한 그의 굳은 믿음이다. 그 기본은 역시 계몽주의다. 계몽의 결산인 칸트와 그에 대한 헤겔의 공격, 그 둘에 대한 니체와 마르크스의 공격과 푸코나 들뢰즈 등에
의한 니체의 부활 등등에 대한 그의 논의는 소략하지만, 최근 우리나라에서 그런 사상가들이 무질서하게 회자되는 판에 하나의 지도를 그려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도 한다. 그 나침반인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인권에 대한 반대론, 가령 그것이 서양 것이라든가, 제국의 식민지 수탈을 합리화한 것이라든가 하는 주장에 대해 그는 집요하게 반론하며 사상에 국경은 없고 보편주의는 반식민지주의이자 반제국주의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원제인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는 그런 보편주의를 무시하는 정통 교조주의의 좌파를 말하는 것인데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한국에 그런 좌파가 외국사상에 대한 토막상식이 아니라 실제로 어느 정도의 시체로 한국에 존재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우리의 좌파론에도 전혀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앙리-레비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좌파가 공산주의를 포함한 전체주의와 결부돼 시체가 됐다고 비판하고 참된 좌파는 그 둘과 결별하고 무엇보다도 민주와 인권을 존중하는 보편주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적어도 전체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자 내지 공산주의자를 좌파라고 말하는 경우 앙리-레비는 좌파가 아니다. 나아가 그는 반미주의, 반유대주의, 반자유주의, 파쇼이슬람주의와 결부된 21세기 좌파도 시체 좌파라고 비판하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반세계화론 좌파에도 반대한다. 이런 좌파론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좌파는 물론 유파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대단히 흥미롭다. 아마도 그는 북한과 중국, 통일과 민족, 민중과 마르크스 등에 관심이 큰 한국의 좌파와는 분명히 다를지 모른다. 심지어 민족주의라고 하기보다 국수주의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하는 최근 한국의 진보적 관점과도 다를지 모른다.

플라톤으로부터 니체에 이르기까지, 호메로스로부터 릴케에 이르기까지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인권에 대한 반대를 부추긴 서양지성사 전체에 대한 논의가 아무런 비판 없이 무질서하게 숭배되고 있는 한국의 지성풍토와는 분명 다르다. 이런 논의를 인문학의 위기를 부추기는 것이라고 욕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무사상을 방불케 하는 서양사상의 과도한 숭상분위기는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인권이라는 상식의 차원에서 재조명될 필요는 있다.

 

박홍규 영남대·법학

필자는 오사카시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술, 정치를 만나다』, 『베토벤 평전』, 『대한민국을 눈물로 씁니다』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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