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6:30 (금)
“모든 심리과정, 신경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어”
“모든 심리과정, 신경과정으로 환원될 수 있어”
  • 곽호완 / 경북대 심리학
  • 승인 2008.09.01 18: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경과학과 인지심리학의 접근법

 

존경하는 한우진 교수님께,
교수신문으로부터 ‘뇌와 의식’이란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나서 한동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의식’의 문제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라서 좋다고 품에 안고 싶지만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여 두려웠던 겁니다. 즉 의식의 문제에 대해 평소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주제가 포괄적으로 뇌과학적인 주제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에는 개인적으로 시기상조란 생각을 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의식은 철학적 탐구문제이기도 하고 심리학과 신경과학의 연구문제이기도 하므로 선생님과 제가 나누게 되는 담론은 매우 긴장되는 흥분의 의식을 낳게 합니다만 지나치게 난해한 개념을 사용한 철학적 논쟁도, 지나치게 전문화된 뇌신경과학의 소개도 여기에 도입된 대화적 담론에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져서 - 특히 이 글을 읽게 될 일반 교수님들도 의식해야 하는 저의 의식이 겹쳐져서 - 좀 더 평이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봅니다.

내관법(introspection)으로 자신의 의식상태를 관찰하는 것은 분트(주: 현대 심리학의 창시자) 이래로 구성주의 심리학자들이 추구한 것이지만, 의식이 관찰하는 주체와 관찰되는 객체로 나누어지는 순간 의식주체는 관찰객체가 될 수 없으므로 의식전체에 대한 관찰은 행위의도에 모순되게 붕괴하며, 의식은 주관적 경험이므로 외적으로 관찰되지도 못합니다. 즉 반성적(reflective) 의식은 포괄적으로 관찰될 수 없다는 본질적 한계에 부딪힙니다. 실제로 18세기 말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이 태동된 후 의식을 여러 감각요소로 나누려는 시도는 - 개별 감각의 정신물리학적 함수와 역치(threshold)문제를 과학적으로 밝힌 것을 제외하고는 - 그 요소들을 결합하는 법칙을 정립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났다고 볼 수 있고, 이것이 후에 게쉬탈트 심리학파와 기능주의 심리학이 태동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게쉬탈트 심리학은 구성주의 심리학의 요소주의에 반발하여 ‘대상의 전체적 지각표상은 그 대상의 요소지각의 합’ 이상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는 예시로 보이는 그림에서 정육면체의 지각표상은 개별 원반들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 원반들의 윤곽배열에서 주어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기능주의 심리학자였던 윌리엄 제임스는 의식의 본질은 내관으로 알 수 없으므로 대안으로 의식의 기능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의식은 하나의 흐름으로서 (stream of consciousness) 유기체에게 가용한 여러 지각표상들이나 행위들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여 유연한 환경적 적응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비유하자면, 비둘기가 마당에 떨어진 쌀알을 보고 날아 내려와서 쪼아 먹은 뒤 바로 일 미터 앞에 있는 쌀알을 보고 깡충 뛰어가서 먹은 뒤, 10미터 앞의 쌀알을 보고 푸드덕 날아가서 먹고 나면 4-5미터 앞의 쌀알을 보면 뛰어가서 먹을 건지 날아가서 먹을 건지 어떻게 결정하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독자들은 그 답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후, 의식이 심리학의 연구문제에서 잠시 비켜나게 된 배경에는 행동주의 심리학이 태동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인 왓슨은 ‘마음’, ‘의식’ 등은 객관적으로 관찰될 수 없으므로 심리학은 자극이나 행동과 같은 관찰 가능한 것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자극과 행동 간의 관계성을 연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으로 인하여 심리학은 연구방법의 과학적 정립과 함께 방대한 학술적 자료를 획득하였지만, 언어나 고차적 추리와 같은 인간의 복잡한 행동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마음’ 또는 ‘내적 기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세월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행동주의 심리학의 여러 실험적 연구방법과, 컴퓨터 유추에 의한 인간정보처리 모형의 정립에 의해 인지심리학이 태동하였는데 이는 초기 심리학 연구주제인 ‘의식’이라는 위대한 ‘왕의 귀환’을 의미하며 이때부터 의식에 대한 연구는 새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주관적 경험의 측면이 강한 ‘의식’이라는 주제는 한동안 연구주제의 변방에 있었고, 의식의 외연(外延)으로서 지각, 주의, 기억, 언어과정 등이 핵심적으로 연구되었고 현재까지 괄목할만한 과학적 성취를 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신경학적 연구법의 획기적 발전으로 - 예를 들어, 단일신경세포 기록법, 뇌파(EEG) 측정법, 기능적 자기공명 영상(fMRI) 등 - 뇌 신경과정을 통해 감각, 지각, 주의과정 등을 기술하고자 하는 신경과학이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브로카 및 베르니케에 의해 발견된 실어증(말을 하지 못하거나, 뜻 모를 말을 하거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증상)의 영역들, 펜필드의 뇌 전기자극하기에 따른 의식경험의 변화관찰, 스페리에 의한 대뇌 양반구 절단환자의 실험들(좌우 반구의 기능적 비대칭성), 노벨상을 받은 휴벨과 비젤에 의한 세부특징 탐지기 세포의 발견 등이 신경과학에서 이룩한 업적 중 몇가지 입니다. 결국 모든 심리과정은 궁극적으로 신경과정으로 환원가능하다는 것이 신경과학자들의 가정입니다.

문제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이 신경계의 구조라는 것입니다. 약 100억개(혹자는 40억 또는 수백억)로 추산되는 인간 뇌신경세포의 수는 차지하고라도, 그들 간의 신경연결망이 신경과정의 핵을 이루는데 그 연결의 수는 바로 조합적 폭발(combinational explosion)을 의미합니다. 즉 100억의 수백억배의 신경세포의 상호작용이 우리가 추적해야 할 가공할 대상입니다. 인간의 시지각과정을 알기 위해 신경세포 활동을 단일세포 기록장치를 이용해서 추적하는 상황을 상상해봅시다. 빛이 수정체를 통해 망막에 맺히고 광수용기는 이를 신경흥분으로 전환합니다. 대략적으로 말한다면 광수용기 - 수평세포 아마크린세포 양극세포 - 신경절세포로 이어지며 이제 눈알을 나가서 외측슬상체(LGN)와 상구(superior colliculus)를 통해 후두엽 시각피질로 갑니다. 선조피질(V1)에서 처리하는 것도 수평선 수직선 등이며 이것이 V4(색), MT(움직임) 영역 등을 거쳐 하측두엽(IT, 얼굴 등 친숙한 대상)과 두정엽(어디, 주의집중)으로 각각 연결되며 이것이 다양한 경로로 전두엽(frontal) 및 전-전두엽(prefrontal) 영역으로 연결되어 우리가 경험하는 시각적 표상을 의식하게 됩니다(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여도 다음 글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여기서 비유하자면, 한방 가득히 스파게티를 넣고 문틈으로 삐져나온 스파게티 조각을 잡아서 그 조각이 어디로 연결되는지 보려고 문을 연 순간 엄청나게 꼬인 스파게티의 파노라마를 보게되며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도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한 뉴런에서 시작한 연결은 나중에는 가지를 치면서 수천 수백만으로 늘어나게 되니까요. 이 스파게티 밭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의식’의 상관물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또 시간의 축을 포함시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이전과 동일한 의식의 상태나 뇌활성화 패턴의 상태가 있을 수 없으며, 더우기 특정 의식의 상태는 그에 상응하는 매우 많은 뇌 상태를 가정할 수 있기 때문에 뇌와 의식의 일대일 대응관계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다만 추상적 수준에서 특정 뇌의 활성화 패턴과 특정 의식상태는 대응되어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입니다. 즉 탁구 라켓으로 동일한 스트로크를 때리더라도 동일한 근육섬유들이 활성화되기 보다는 전반적 흥분프로파일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완벽한 대응구조를 요구하는 것은 심리-물리계의 성질 상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신경과학은 다양한 측정장치를 지녀서 스파게티 문제 따위에 동요하지 않습니다. 뇌 활동을 구조적으로 측정하는 장치(PET, fMRI, MEG)가 있어서 특정 정신활동을 하는 동안 뇌의 특정 영역이 활성화 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개략적인 신경학적 국재화(localization)가 가능했고 하드웨어적 기술방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좌반구에 뇌일혈이나 교통사고로 인한 손상이 있다면 우반신이 장애가 오고 말을 잘하지 못하게 된다고 예후를 예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치매, 교통사고, 혈관장애 환자들이 이전보다 빨리 회복하게 되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문제는 거시적인 점에서 뇌 구조는 사람마다 비슷하고, 인지과정에서도 유사하지만, 미시적 구조는 사람마다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좌반구가 상당히 손상되어도 언어적 기능이 우반구에 제법 남아있는 사람은 언어장애가 심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신경회로가 만들어져서 파괴된 언어기능이나 운동기능이 급격히 회복될 수 있고 이것을 신경가소성(neural plasticity)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결국 뇌 국재화를 통해 인간의 의식과 표상수준으로 미시적인 신경구조를 확인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같이 신경구조의 미시적 다양성과 신경가소성 때문에, 인지심리학적 실험측정으로 특정 인지기능이 손상되었다는 수렴적 결과를 얻어야만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인대회에 입상한 사람들의 얼굴구조의 평균이 최고미인이 될 수 없듯이 수많은 사람들의 뇌구조의 평균이 정상인의 뇌구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게놈 지도가 만들어졌다고 개개인의 성격과 특성을 예언할 수 없듯이, 뇌 구조의 일반적 틀이 만들어졌다고 특정 상황에서 개개인의 의식과 행동을 예언할 수는 없습니다.

의식의 문제가 과학적으로 연구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의식이 학문적으로 정의되기 어려운 모호성을 지닌다는 데 있습니다. 의식은 소위 자기참조적 의식이라는 반성적 의식도 있고, 대상지각의 의식이 있으며, 주의, 각성, 자각, 경계, 꿈과 최면, 백일몽, 심상, 작업기억, 전의식과 무의식 등 다양한 심리현상과 중첩되어 있어서 단일현상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통일장 이론과 같은 의식이론이 가까운 미래에 확립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DNA의 이중나선구조로 노벨상을 받았던 크릭과 그의 동료 코흐가 1990년부터 수행한 일련의 연구들은 이제까지 주로 철학적 담론의 대상이었던 의식이 신경과학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의식의 신경상관자(neural correlate of consciousness, NCC)를 뇌 구조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입니다. 아직은 주로 가설적 수준에 그치기는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의식의 신경상관자를 찾아내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의 가설은 피질(V1, V4, MT, IT영역)과 전두엽 영역간의 역전파에 의한 주기적 공동활성화가 시각표상의 자각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며 이것을 시각적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생생한 시각적 자각은 고차적 지각수준에서 저차적 시각피질로의 피드백 루프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위의 그림에서 정육면체를 지각하게 되는 것을 착각적 윤곽(illusory contour)이라고 하는데 이 윤곽이 지각되고 나면 배경화면인 흰색에 정육면체의 모서리가 더 밝은 흰색으로 생생히(vivid) 지각되는데 이는 시각피질에서 외측슬상핵으로의 피드백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연구가 있습니다.

크릭이 제안한 의식에 관한 연구방향의 하나로, 양안정적 지각(bistable percept)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역전성 전경-배경이나 양안경쟁 현상과 같이 대상이 변하지 않는데 의식된 지각표상은 두가지 사이에서 주기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예시 그림에서 정육면체를 지각하고 난 후 중앙의 두 모서리 중 하나가 앞에 있고 하나는 뒤에 있는 것으로 입체를 지각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뒤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모서리가 앞에 나오고 다른 모서리는 뒤에 있는 것으로 지각되게 됩니다. 즉 대상의 수평선이나 수직선의 지각은 변하지 않지만, 그 대상표상에 대한 의식은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자신의 의식이 변하는 과정을 현상학적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변화되는 순간의 뇌과정은 어떻게 되는지를 찾아낸다면 의식의 신경상관자를 찾을 수 있다는 논리가 됩니다. 부가하여 의식에 관한 흥미있는 현상 중 맹시(blindsight, 시각피질의 손상으로 자극의 출현여부를 의식하지 못하지만 자극의 위치는 찾아내는 환자)의 연구는 시각피질이 의식의 신경상관자 자체는 아니지만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의식에 관한 가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의식은 주의를 동반한 신경흥분 패턴의 잔여물(residual)로서 신경물리학적인 자기장의 창발적 패턴일지도 모릅니다. 꿈이 현실경험의 잔여물이라는 설이 있듯이, 사람을 그리워하면 그 사람의 의식이 생생히 의식되듯이, 사물의 지각에서 대부분은 무의식적 전의식적으로 처리되지만, 주의와 정신적 노력를 투여한 지각경험의 산물은 생생한 지각표상을 의식하게 합니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내가 대상을 의식합니다. 대상을 보고 있는 나 자신을 의식합니다. 그런 나 자신을 의식하는 옆의 너를 의식합니다. 너의 의식 속에 있는 나를 의식합니다. 이 모든 대상과 나 그리고 너를 전체적으로 의식합니다. 다시 대상을 의식하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이 과정을 반복해보십시오. 저는 대부분의 경우 현기증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 현기증은 원래 대상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우리는 노력만으로 새로운 의식을 만든 것입니다.

의식을 접근하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물리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균형을 잃은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생각은 스티븐 호킹이 우주의 법칙에 관한 담론에서 '인간원리'를 제안한데서 유도된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서 인간원리란 대체로 두가지를 뜻합니다. 우주의 법칙을 정하기 위해 몇가지 우주상수가 가정되는데 이때 우주의 특정 시점과 위치에 인류의 출현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우주상수의 폭이 매우 제한된다는 논리가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주란 고전물리학과는 다르게 우주를 관찰하는 관찰자, 즉 인간이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주법칙마저도 인간 관찰자를 고려하여야 하므로 인간과 독립적인 우주법칙이 도출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를 의식의 문제로 확장시키면, 뇌의 구조와 활성법칙은 인간의 의식 즉 심적 세계의 관찰자를 가정해야하며 이는 뇌의 구조법칙이 의식과 동시적 상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의식의 본유적 특성에 관한 담론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확장이 가능합니다. 바로 이 점이 심리철학자들이 노력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까지의 담론을 바탕으로 ‘의식’의 문제를 검토해보면, 초월명상에서 구현되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 의식자체’가 아닌 이상 의식은 그 ‘무엇’에 대한 의식입니다. 즉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어떤 대상을 의식하게 되는 자신의 의식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의식의 신경 상관자를 밝히고자 한다면 대상 표상에 관한 신경상관자와 대상의 의식에 관한 상관자를 분리해야 하는데 이게 간단치 않습니다. 대상지각에서 주의집중 문제를 연구하는 경우와 거의 같습니다. 대상에 대한 주의는 대상의 지각표상과는 별도의 주의기제를 연구해야 하는데 가끔 표상과 주의를 혼동한 연구가 있습니다.

한교수님이 지적하였듯이 감각질(푸른색을 지각할 때 푸르스러함의 의식적 성질로서 이는 주관적이며 남에게 전달할 수 없고, 남과 동일한 푸르스러함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은 아직 과학적 연구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더우기 여러 개념이 복합된 하나의 문장을 이해할 때 일어나는 의식의 표상질 (단순히 표상이 아닌) 또한 감각질과 유사한 주관성을 지니며 이 의식은 신경구조로 환원되기 어렵습니다. 더 본질적인 의식의 문제는, 비록 뇌과정이 의식을 낳게 하기는 하지만, 특정 상태의 복합의식이 창발(emerge)하게 되는 정신-화학적 법칙은 신경과정으로 환원되기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수소나 산소 개개 원자의 물리적 성질을 알고 있더라도 물 분자의 성질이 어떠할 것이라고 정확히 예언되기 곤란하고, 더우기 고분자 화합물의 경우에 더 그렇습니다. 물론 이런 흥미로운 가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뇌를 전극으로 연결한다면 한사람의 주관적 경험을 다른 사람이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남습니다. 두 뇌를 연결하는 순간 뇌 구조 전체는 창발적으로 이전의 뇌와는 다른 구조와 처리과정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정리하자면, 감각질(qualia)의 문제는 의식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기법이 발견되지 않는 한 철학적 담론으로 남을 것이며 이것이 철학으로 하여금 올림프스 산으로부터 하늘 끝으로 도망가지 않게 만드는 최후의 마지노선일지 모릅니다. 그 외 의식에 관한 대부분의 과학적 담론은 ‘쪼개서 정복하기 (divide and conquer)' 로서 장기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축적될 가공할 양의 인지심리학적 발견들과 신경과학적 발견들이 집대성된 후 효과적인 가설이 도출된다면 의식에 관한 통일이론이 만들어질 것을 기대해 봅니다.

철학자들은 ‘why' 즉 개념적 틀 또는 연구의 종합적 개념적 평가와 방향설정을, 신경학자들은 ’where' 즉 물리적 구조 또는 상관물을 찾아내는 미시적 접근을, 인지심리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what and how' 즉 그게 무엇이며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거시적으로 다루는 것이며 이들이 오케스트라를 이룰때 진정으로 본질적인 과학으로서의 의식에 대한 통합적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교수님 같은 심리철학자들이 의식에 관한 과학적 담론과 연구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과학적 발전은 질적으로 더욱 풍부하게 열매 맺게 된다고 생각하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곽호완 / 경북대 심리학


필자는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석사 및 미국 죤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위치와 세부특징에 대한 주의정향의 결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경북대학교 심리학과에 재직 중이다. 주요논문으로는 "정적 및 부적반복효과의 시간과정", "시간-독립적인 초점주의 이동", "성인 ADHD 경향성에 대한 웹기반 실험신경심리 연구: 회귀억제, 스트룹 및 내생-외생 주의과제"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