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7:05 (금)
향연이 끝난 자리, ‘우리의 철학’을 되돌아보다
향연이 끝난 자리, ‘우리의 철학’을 되돌아보다
  • 교수신문
  • 승인 2008.08.25 17: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22차 세계철학대회 참관기

한국철학계는 유영모와 함석헌사상을 발표하는 자리가 국내외 학자들의 관심을 끈 이면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시아권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최된 제22차 세계철학대회(World Congress of Philosophy)가 지난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대에서 열렸다. 주관은 각국 대표철학회의 연합체인 세계철학연맹(FISP, International Federation of Philosophical Societies). 1900년 파리에서 제1회 대회(대회장 앙리 베르그송)가 열린 후, 5년 마다 개최돼 이번으로 22회째를 맞는다. 서양철학의 출발이 희랍이고 근현대 학문의 주 무대가 유럽이어서 일까. 그 동안의 대회는 주로 유럽에서 개최됐고 그 내용도 대륙 철학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여러 점에서 달랐다.

첫째로, 동양 최초 개최인 이번 대회를 계기로 동양 전통 철학(유가철학 분과, 불교철학 분과, 도가철학 분과)이 공식 분과로 채택돼 다양한 발표회가 열렸다. 응당, 동서 사상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열띤 논의가 있었다. 동양 철학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동양의 지혜를 서양의 방법과 언어로 재구성하자, 서구 사상과 제도는 한계에 봉착했으므로 동양적 지혜와 가치에서 대안을 찾자는 주장 등. 늘 하던 이야기지만 우리끼리가 아닌 세계인과 함께 하는 논쟁이어서 그런지 그 열기는 뜨거웠다.

 

‘우리의 철학’의 위치
대회 주최국인 한국 조직위의 재량으로 다양한 특별 발표회(‘한국의 철학’ 발표회, 재외 한인 주요철학자들 초청 발표, 한중일 철학회 연합발표회, 어린이 철학 행사, 한국 대학생 발표회)가 추가로 마련됐다. 국내 청소년들이 국내외 저명 철학자들과 어울려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 그리고 김재권, 조가경으로 대표되는 재미 한인 철학자의 특강 등이 많은 관심을 샀다.

한국조직위 초청으로 영미권의 대표급 철학자가 다수 참석한 것도 대회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캐나다의 M. 맥페런(McPherran, 고대철학), 영국의 S. 블랙번(메타윤리학), 미국 윤리학자 A. 기바드(미시간대)와 T. 스캔론(하버드대, 정치철학), T. 겐들러(예일대, 인식론), 심리철학의 D. 차머스(호주국립대), 인식론 분야의 A. 골드만(럿거스대) 등이 그들이다. 이밖에, 독일계로서 현재 미 노틀담대에 재직 중인 V. 회슬레와 F. 달마이어, 그리고 한국에 잘 알려진 투웨이밍(하바드대), 제3세계권 학자들, 특히 남미의 대표적인 해방철학자인 멕시코 메트로폴리탄대의 엔리케 뒤셀 등도 초청돼 특강을 하고 이런저런 자리의 토론과 언론 대담 등을 통해 오늘의 세계적 어젠다와 철학의 과제에 대해 논했다.

분명 이 대회는 한국의 철학을 세계인들에게 있는 선보인 기회로서, 또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전쟁과 갈등, 관용과 공존, 인권과 공동선, 환경과 지속가능성 등 수많은 세계적 과제들 두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어우린 소통과 대화의 기회로서 의미 있는 대회였다.

하지만 이제 대회를 마치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인지 생각해 볼 차례다. 한국 참석자건 외국 참석자건 주된 관심사 중의 하나는 ‘한국의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한국의 철학’은 있는가. 특히 제3세계권과 개발도상국, 남미와 동구권의 학자들은 단기간 내에 이룬 우리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철학은 무엇을 했는지, 또 오늘의 사회적 쟁점들 앞에서 ‘한국의 철학’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지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한국의 철학은 아직도 ‘지금 여기서 하는 우리의 철학’이 되지 못한 상태임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전통사상은 한편으로 우리의 일상과 무의식에 여전히 일정한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전통과 근현대/탈현대가 뒤섞인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기엔 무언가 지체되고 있다. 서양철학계 역시 근자에 들어 반성의 목소리가 시작됐을 뿐 지난 세월 내내 서양 사상의 수입과 각주달기 행태를 벗어나지 못해 왔다. 아니 여전히 제도권 철학계에서 동양철학, 서양철학을 구분하는 자체부터가 철학적 미성숙의 증거다.

이번 대회 기간 중에, 한국 고유의 사상가 유영모와 함석헌을 다각도로 조명한 특별발표회가 있었다. 동양 사상과 서양 과학, 그리고 기독교를 비롯한 동서양 종교를 종합해 독특한 세계관을 전개했던 재야철학자 다석 유영모, 또 그 문하에서 사사한 후 나름의 비폭력 평화사상을 전개했고 60, 70년대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함석헌의 사상이 공식 철학계에서는 처음으로 그것도 세계철학대회 자리에서 선보인 셈이었는데, 개막식 특강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참석했다. 주류 철학계 일부에서는 ‘이런 게 어떻게 철학이냐’는 보수적 반응도 보였다. “‘우리의 철학’이 빈곤하다보니 ‘재야 철학’이 상대적으로 부각됐다”는 비아냥, “학적 체계화는 덜 됐지만, 이 두 분의 사상이야말로 전통과 당대 현실에 뿌리 밖은 철학의 참 모습”이라는 평가 등 실로 다양한 반응 속에 대회 내내 화제였다. 한국 철학계는 좋든 싫든 이 발표회가 큰 화제가 된 이면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철학, 무엇을 고민할까
‘서양철학 수용사 100년’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철학이 우리 사회에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그 시작부터, 역사와 시대적 과제에 대한 고민이었어야 할 철학의 본령이 왜곡됐다.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는 이승만 정권초기부터 모든 학문에서 금기시됐다. 좌파철학자들은 월북했고 남은 철학자들은 입을 다물거나 관념의 세계로 도피했다. 그로부터 60년, 제도권 철학은 독일 관념론 일색으로 물들었고, 70년대 이후로는 영미 분석철학이 대거 그 자리를 대체했다.

물론 현실을 떠나 관념의 구름을 맴도는 철학,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킨 채 좁은 분석 공간을 파고드는 철학 일변도였다고 해서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수도원 담 속에 스스로를 가둔 스콜라 철학이 논리학을 발전시켰듯이, 철학을 엄밀한 학으로 또 논리와 정당화의 학으로 승격시킨 공로는 있었다. 또 고전철학, 동양철학, 윤리학 등 철학 내 분과들의 학적 성과나 연구 축적도 이뤄졌다. 하지만 기나긴 권위주의 군사독재의 기간, 그리고 87년 이후 격렬한 사회변화 속에서 철학은 아무런 대응도, 그 어떤 학적 고민도 표출하지 못했다. 독일의 사회과학방법론 논쟁, 비판이론과 하버마스(의사소통행위이론), 그리고 롤스의 정의론을 비롯한 다양한 정치철학이 우리 학계에 소개돼 논문이나 학회 자리에서 다뤄졌지만, 이것들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 사상도 따지면 당대 자기 사회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민들이었는데 말이다.

이번 세계철학대회 기간 중,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주관한 ‘87시대 그리고 포스트 87시대의 한국 민주주의와 철학’ 심포지엄은 이런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대회 중심을 차지한 행사는 아니었고, 학적 세련미나 체계화의 정도에서 부족했다는 평도 있다. 하지만,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참석해 큰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자리에서 논의된 주제들 모두 오늘의 우리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리라. “한국의 민주주의는 왜 역행하고 있는가”, “촛불의 의미는 무엇이고,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긴 여정이 남아있는데 어째서 박정희 신드롬과 같은 비이성적 심리가 확산되고 있는가”, “황우석 사태는 우리 학계에 어떤 윤리적 경종을 울리는가,” “동아시아 인권 논의의 함축은 무엇이고, 민주화 운동 내의 문제는 어떤 것들인가”, “시장기능의 강화와 신자유주의의 끝은 무엇인가”, “지난 민주화 과정에서 ‘소위’ 철학자가 아닌 김지하와 이영희 등의 사상은 어떤 힘을 발휘했는가” 등.

대회의 주제(Rethinking Philosophy Today)처럼, 이번 서울 세계철학대회가 한국의 철학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 현실에 뿌리박고 시대와 호흡하는 살아있는 철학으로 거듭나는 계기, 그리고 세계와 소통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서유석 호원대·철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Jon Elster의 분석마르크스주의 비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관심 분야는 사회정치철학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개체론적 마르크스주의 비판」이 있으며, 역서로는 ??변증법적유물론?? , ??청년 헤겔?? 외 다수가 있다. 이번 세계철학대회에 한국조직위원으로 참여했고,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대한철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Jon Elster의 분석마르크스주의 비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관심 분야는 사회정치철학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개체론적 마르크스주의 비판」이 있으며, 역서로는 ??변증법적유물론?? , ??청년 헤겔?? 외 다수가 있다. 이번 세계철학대회에 한국조직위원으로 참여했고,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대한철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