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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뿌리와 싸워온 인문주의자의 종생기 - 이청준을 추모하며
욕망의 뿌리와 싸워온 인문주의자의 종생기 - 이청준을 추모하며
  • 김치수 / 이화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08.08.25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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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춘이 우리에게 되찾아 준 것은 산업화로 잃어버린 어머니와 고향이었다.

4·19세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이청준이 지난 7월 31일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이 남자의 경우 79세를 넘겼다고 하는데 우리 시대의 최고의 작가가 평균 수명도 못 채우고 우리 곁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한국 소설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1965년 단편 「퇴원」이 월간 <사상계>의 신인문학상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한 이청준은 김승옥과 함께 한글세대 소설의 두 축을 대표하는 작가로 평가된다. 김승옥이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 감성적 작가라면 이청준은 냉정한 문체로 다양한 각도에서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고자 한 지성적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지난 43년 동안 「병신과 머저리」, 「소문의 벽」, 「선학동 나그네」, 「눈길」,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등 주옥같은 중 단편들과 『자서전들 씁시다』, 『당신들의 천국』, 『자유의 문』 등 문제의식으로 가득 찬 장편소설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소설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소설 가운데 상당수의 작품은 작중인물이 소설을 쓰는 문제와 씨름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격자화 돼 있다. 격자소설은 소설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끝없이 대립하면서 그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반성적 사유를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사유하고 그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알맞은 말을 찾으면서 사물의 핵심에 직접 다가가기보다는 우회하는 길을 택한다. 그것은 삶을 단순하게 보지 않는 사람만이 갖는 인문주의적 태도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청준 소설에서 ‘전짓불’사건은 최초의 폭력 체험이다. 『소문의 벽』의 주인공에게 ‘전짓불’ 사건은 6·25 사변 때 그의 정신에 깊은 상처를 남겨 놓는다. ‘전짓불’을 든 사람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어린 ‘박준’에게 어느 편인지 밝히기를 강요한다. 자신이 ‘전짓불’을 비추는 사람과 같은 편으로 대답했느냐 반대편으로 대답했느냐에 따라서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부조리한 상황은 이념이 다른 두 체제로 나뉜 분단의 비극이며 동시에 동족상잔의 전쟁이 가져온 비극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그리고 그 생각과 이데올로기에 관해 토론할 여지도 없이 어느 편이냐에 따라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는 양자택일적인 상황이다. 그의 데뷔작 「퇴원」에서도 ‘전짓불’과 관련된 폭력이 나타난다. 그는 어린 시절 광 속에 가득 찬 볏섬 사이에 어머니와 누이의 속옷을 깔아놓고 잠을 자는 즐거움을 남몰래 즐긴다. 이 비밀이 아버지의 ‘전짓불’에 발견돼 주인공은 이유도 모른 채 이틀 동안 갇히게 된다. 어린 시절의 폭력의 체험은 「개백정」에서도 충격적으로 나타난다. 마을에 ‘말씨가 설고 거센 총잡이들이’ 나타난 이후 공포분위기가 지배하는 가운데 나타난 ‘복술이’의 처참한 모습은 어린 주인공이 체험할 수 있는 폭력 가운데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 앞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말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들이 말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작가는 이들 작중인물을 통해서 폭력 앞에서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존재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잔혹한지 말해주고 있고 동시에 문학의 역할이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 보면 침묵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역설적인 상황에서 문학의 존재 이유를 찾고 있는 이러한 문학관은 그의 소설의 중심된 주제이다. 그의 초기 소설 『조율사』의 화자인 ‘나’, 『소문의 벽』의 주인공 ‘박준’, 「병신과 머저리」의 ‘형’이 모두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작가는 누가 뭐래도 끊임없이 진술을 계속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족속’이라고 주장하고 ‘작가는 언제나 그가 도달한 이념의 문에서 또 다른 다음 번의 이념의 문을 향해 끝없이 고된 진실에의 순례를 떠나야 하는 숙명적인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서 글 쓰는 행위가 외부적 상황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윤리적 결단에 의한 것임을 밝힘으로써 지성적 작가로서 삶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인공들이 소설 속에서 소설 쓰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청준은 낭만적 영웅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체성 속에 살고 있는  실존적 사실주의 소설을 쓰고 있다. 「뺑소니 사고」의 기자 ‘배영달’은 자신이 쓴 허위금식 기사 대신에 뺑소니 사고 기사가 나간 데 대해 절망을 느낀다. 「빈방」의 화자 ‘나’는 신문기자로서 ‘지승호’라는 하숙집 동숙인의 ‘딸꾹질’의 원인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는 자기 회사의 생산부 직원으로서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다. 노임을 올려달라는 여공들에 의해 조합책임자로 받들어진 지승호는 여공들의 알몸 시위가 소방 호스의 찬물 세례를 받고 무산된 다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없는 난처한 입장에 빠진다. 그의 딸꾹질은 그 사건을 취재해간 기자의 기사가 신문에 나기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그는 11월의 추위에 알몸으로 찬물 세례를 받은 여공들의 사건에서 정신적으로 두 가지 폭력을 경험한다. 하나는 찬물 세례라는 눈에 보이는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기사가 활자화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이청준의 주인공은 진실의 언어화가 금지되자 ‘딸꾹질’이라는 소리로 언어를 대신한다. 그 결과 신문기자인 ‘나’마저 딸꾹질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다음 딸꾹질을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이청준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을 하는 소설가이고, 실패한 소설가를 통해서 소설의 역할을 회복시킨 소설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말의 폭력화를 피하기 위해 극도로 절제된 언어를 추구한다.

이청준은 진실이 언어화되지 못한 사연들을 가진 사람들의 한을 판소리라는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서편제』에 수록하고 있다.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得音의 경지에 도달하게 한 이 작품들에서 한의 소리가 폭력화하지 않고 예술로 승화한다는 것은 한의 매듭을 풀어내는 茶道와 같이 삶에 대한 깊은 화해와 용서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운명처럼 주어진 한 맺힌 삶을 사는 소리꾼의 득음은 소리에서 잃어버린 말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눈길」에서 남에게 팔아버린 고향집을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보여주고 아들을 눈길 속에 떠나보내는 어머니가 자신의 내면에 묻혀 있는 한을 풀어가는 방법이다. 『흰옷』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억울한 죽음이나 거기에서 비롯된 가난이나 그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이나 한을 품게 한 모든 것을 용서하지 않고는 우리 사회에 떠돌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제거하는 길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정신은 초기 소설에서 가난의 상징이었던 고향으로부터 쫓겨났다는 탈향의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면 후기 소설에서는 그를 쫓아낸 고향을 용서하고 그것과 화해함으로써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향의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청준은 산업화 이후 우리가 잃어버린 어머니와 고향을 우리에게 되찾게 만든다. 판소리나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고향은 원망과 폭력이 아니라 용서와 포용의 상징인 것이다. 90년대 초 그와 함께 그의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노모에게 인사를 드리겠다는 우리의 제안을 만류한 그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우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누어있는 어머니의 귀에 대고 마치 모든 것을 알아듣기나 하는 것처럼 친구들을 데리고 온 사실과 그 동안의 안부와 자신의 근황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그것은 ‘노인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한 소설 속의 이야기와는 달리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에게 말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아들의 지극한 정성 그 자체였다. 그것은 말로써 폭력을 제압하고자 한 작가가 자신에게는 극도로 엄격한 반면에 어머니에게 한없는 관용과 연민을 갖고 있었음을 말한다.

잃어버린 말을 회복하는 것은 각자에게 폭력이 아닌 자신의 말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천형의 수인으로 취급당하는 나환자들의 섬을 낙토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새로 부임한 원장의 목소리만으로도, 원생들의 목소리만으로도, 비판적 지식인의 목소리만으로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입장이 다른 각자가 폭력이 배제된 자신의 말을 회복하고 그 회복된 말들이 조화를 이룰 때 그 섬은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라 ‘우리들의 천국’이 된다. 그것은 누구나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모든 욕망을 철저하게 의식하고 자기 안에서 그 욕망의 뿌리를 뽑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언제나 자신의 욕망의 뿌리와 싸우며 혼자서 사유하는 외로운 삶을 살아온 셈이다.

이청준은 한국 소설사에서 보기 드문 인문주의자다. 모든 것이 개그화 되고 배금주의와 속도 제일주의가 지배하는 정보화 시대에서 그의 인문정신은 한국 소설이 계승하고 발전 시켜야 할 중요한 자산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이청준은 누구?
한국 문학계의 거목으로 1939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했다. 1965년 단편 「退院」이 <사상계> 신인상에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다.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인문주의자 무소작씨의 종생기』, 『이제 우리들의 잔을』, 『축제』, 『흰 옷』등 11편의 장편소설과 『서편제』, 『이어도』, 『소문의 벽』, 『별을 보여드립니다』, 『살아 있는 늪』 등 130여편에 달하는 중·단편을 발표했다. 지난 7월 31일 새벽, 6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김치수 / 이화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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