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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 인공심장의 경고
[문화비평] : 인공심장의 경고
  • 배병삼 성심외국어대
  • 승인 2002.0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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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8 10:02:45

배병삼/성심외국어대·정치학

지난 연말, 외국의 한 과학잡지는 지난해 최우수 제품으로 인공심장을 꼽았다. 사진으로 보는 인공심장은 예뻤다. 티타늄과 플라스틱으로 만든 소프트볼 크기의 ‘예쁜’ 심장. 수만 번을 쉼 없이 작동하여도 고장이 없었다는, 반짝이며(티타늄) 투명한(플라스틱) 심장. 그것은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이제 심장도 패션이다’라고.

물론 가끔 보고 듣기는 했었다. 기계학과 전자공학이 만나 이뤄내는 로보틱스(robotics)분야의 진전이라든지, 생명공학분야의 ‘게놈’인가 ‘지놈’인가 하는 유전자 지도의 완성소식 등등을. 어디 그 뿐인가. ‘비만이 암보다 무섭다’는 말이 의학적 사실이 아니라 ‘마름질된 몸’에 대한 욕망의 표지가 된지도 이미 오래다. 살빼기와 성형수술 같은 ‘몸의 마름질’은 금방 몸에 대한 사랑이나 성취(만족감)의 선을 넘어 몸을 수단화, 상품화하기에 이른다. 최근 연이은 ‘정상급’ 연예인들의 마약복용도 ‘마름질된 몸’에의 추구와 그 끝의 허무함이 빚어낸 스캔들일 것이다. 내 몸이 가면(persona)이 되어버리면, ‘참된 나’를 찾기란 더욱 힘들어지는 법이다. 그 불안과 고독, 허무의 틈새에 마약의 움막이 피난처로 여겨졌으리라. (더욱이 높은 산일수록 정상은 춥기 마련인 터.)몸이란 우둘투둘한 피부와 비뚤비뚤한 몸매, 쭈글쭈글한 장기, 그리고 삐쭉삐쭉한 터럭들로 이뤄진 것이니, 원래 마름질되지 않은 것이다. 아니 마름질(인공)되지 않았기에 몸(자연)일 수 있었다. 그러니 반듯하게 마름질된 인공심장 앞에서, “심장! 이제 너 마저도”라는 체념 섞인 푸념이 나올 만 한 일이다. 심장이란 서양에서 보자면 큐피드의 화살에 꽂힌 하트, 즉 사랑하는 마음의 처소요, 또 동양에서 보자면 ‘心統性情’이라, 본성과 그 표현을 주재하는 마음의 거처가 아니던가. 그러니 인공심장의 그 투명한 반짝임에서, 마음(心)으로부터 발화한 신화와 문학, 철학 나아가 인문학의 전 체계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은 꼭 과장만은 아니리라.

허나 실은 인공심장은 인간의 ‘모난 욕망’의 한 투사물일 따름이다. 워낙에 욕망이란 그 대상을 네모로 반듯하게 만들거나, 동그랗게 마름질하려들기 때문이다. 새해부터 통용된다는 유럽의 새 화폐, ‘유로화’를 보면 돈모양이 네모나거나 동그랗다는 느낌이 더욱 절실하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화폐가 동그랗거나 네모꼴인 까닭은, 그리고 그 화폐를 획득하기 위한 자격증이나 졸업장들이 모두 네모꼴인 까닭은 인간의 욕망이 동그랗거나 네모나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이 욕망이 어느 순간 창을 거꾸로 돌려, 도리어 인간에게 네모나 세모, 또는 원형으로 마름질되기를 요구한다는 점에 있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그 자체 목적적 존재가 아니라 어떤 것을 위한 수단으로 추락한다. 내내 인문학이, 그리고 동서양의 종교들이 염려해왔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노자와 공자가, 예수와 석가가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것도 ‘너를 마름질하지 말아라. 그 순간, 네모의 곽 속으로 들어가리라!’는 경고였던 바다.

안타까운 사실은 ‘너를 네모로 만들지 말아라! 너를 마름질하지 말아라! 네모와 동그라미를 품을지언정, 너를 저 네모의 곽과 원형의 질곡 속에 끼워 넣지 말아라’ 라고 학생을 가르쳐야할 우리 대학들이 도리어 네모의 질곡 속에 끼여들기 위해 허덕인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입시철만 되면, 신문과 방송에는 ‘이 대학에 오기만 하면 네모꼴이 될 수 있노라’고, 또는 ‘저 대학에 가면 동그랗게 될 것이노라’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모난 굉음을 토해내곤 하는 것이다. 물론 대학에서 만들어내는 생각과 글 속에는 마땅히 둥근 모양과 네모꼴도 있어야겠지만, 그렇다고 네모와 동그라미에 꼭 끼일 수 있는 생각과 글을 먼저 요구해서야 대학이 대학일 수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런 환경 속에서라면 ‘네모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네모꼴 모양의 사람’이 배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올해의 복식문화 동향을 ‘히피 패션’으로 전망한 외신(Financial Times)은 도리어 반갑다. 히피 즉 ‘반-문명’, ‘반-일률’의 저항은 모난 욕망, 그 반듯한 마름질에 대한 파토스적 반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가령 흰색(살색?)/금발/팔등신의 ‘바비인형식 몸’을 유일한 기준으로 요구해온 신체미학에 대한, 또는 생산-소비-발전이라는 시장경제 논리의 전일적 지배에 대한 비판과 성찰로서의 히피적 사조라면 넉넉히 용인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기껏 문신(tattoo), 찢어진 청바지, 물들인 머리(뉴욕으로부터, 동경을 거쳐, 서울에까지 똑같은 모양)를 하고서 ‘나는 나’라고 외치는 식의 히피 ‘패션’에 머물고 만다면, 그건 거듭 네모꼴과 동그라미를 덮어쓰는 꼴밖에 되지 않으리라. 제 쓸개는 빼놓고, 반짝이며 마름질된 ‘인공쓸개’를 택하는 격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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