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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특집] 촌평기에 담은 신사년 29인의 얼굴들
[송년 특집] 촌평기에 담은 신사년 29인의 얼굴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1.12.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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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과 함께 한 아카데미안…평가는 역사의 몫
오리무중이라고 했던가 올 한해를. 교수·대학 사회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교수들을 닦달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방향감을 상실했다기보다 너무 많은 방향표시등 때문에 혼란을 겪은 신사년이었다. 우리 신문은 2001년을 저 낡은 시간의 무대 뒤편으로 흘려보내면서, 올해의 표정을 담은 아카데미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이 지형도는 물론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민주화 △학술정보 제공과 대학문화 창달 △교권 옹호와 전문적 권위 향상이라는 우리 신문의 창간 슬로건을 척도로 삼아 작성했다.

교수신분은 값싼 흥정 대상인가

신사년 올해 교수·대학사회의 가장 선굵은 얼굴은 교수노조준비위를 가동한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다. 계약제·연봉제 도입에 따라 교수 신분이 ‘흥정거리’로 전락한 현실에 맞서 ‘교수도 노동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교권 옹호에 나섰기 때문. 최교수가 교수노조 산파역이라면, 황상익 서울대 교수(의학과)쨒는 이제부터 험로를 항해해야 하는 새로운 조타수. 세밑에 강경자세로 돌아선 교육부와 어떤 협상력을 벌일지 기대된다.

학자들에게 신분 안정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학문 활동의 자유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과)쨓에게 씌워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학문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가장 큰 편견으로 보인다. 만경대 방명록 서명으로 이래저래 곤욕을 치르고 있는 강정구 교수는 투명한 학자적 소신과 양식으로 정평있는 연구자. 아무쪼록 그에게 씌워진 ‘편견 딱지’가 하루 빨리 제거되길.

학자를 옥죄는 편견은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만 있는 게 아님을 2001년 교수사회가 증명했다. 학문적 능력이 뛰어남에도 동료 교수들과의 인간 관계에서 ‘낙제점’(?)을 받아 재임용에서 탈락했다가 다른 대학으로 ‘복귀’하게 된 심희기 전 동국대 교수(연세대 법학과)쨕의 사연도 설왕설래. 주변에서는 전화위복이라고 말하지만 글쎄, 부당한 조치에 대해 끝까지 소신있게 맞서는 모습도 아름다웠을 것이란 후문도 있다. 학교측으로부터 부당하게 파면처분을 받아 이에 불복, 행정법원에서 ‘해임처분취소‘ 판결을 받아낸 김영규 인하대 교협회장(경제학과)도 같은 맥락에서 올해의 조명받은 얼굴.

그렇다면, 이런 교수들이 모여 모여서 구성한 교수협의회의 올해 활동은 어땠을까. 그 어느 때보다 교협 활동의 위상 제고가 필요한 해였던 올해, 특히 눈에 띄는 얼굴은 학칙기구화를 일궈낸 권오중 영남대 교협회장(사학과)쨖이다. 대학내 민주적 의사소통 체계를 만들었다는 평이 자자하다.

교수들의 신분 불안은 결국 사립학교법개정 문제와도 잇닿게 된다. 국회로 건너간 사립학교법개정안을 놓고 이재정 민주당 의원쨗과 황우여 한나라당 의원쨙이 팽팽한 신경전을 벌여 교수들의 시선을 끈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교수사회의 여론은 악법적 요소를 제거한 ‘개정’이었지만, 지루한 정치적 노림수 때문에 사립학교법개정안은 물건너 가고야 말았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플 수밖에.

사립학교법개정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 학교법인쪽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교수를 내몰고, 족벌 운영에다 학교 행정마저 독단적으로 좌지우지해왔던 박원국 전 덕성여대 이사장쨚은 한국 사학의 부패와 무능을 보여주는 대표적 얼굴. 분규 뒤에는 언제나 대학 구성원과 열린 대화를 거부하는 무능하고 뻔뻔한 소음의 진원지가 있게 마련. 그런데 이런 대학을 두고 교육부는 그동안 뭘했지? 길고 지루한 학내 분규 사태를 제공한 어윤배 숭실대 총장쨛도 구성원의 의사를 무시하고 ‘내 맘대로’ 대학 행정을 쥐락펴락하려 했던 점에서 불명예의 얼굴로 기억된다.

반면, 독단과 무능으로 내쫓긴 구재단의 호시탐탐 기회를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대학 운영을 한층 투명하게 보장하기 위해 ‘시민대학’으로 전환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쨜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흐르고 있다. 시민, 학생, 교직원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실험에 나선 강총장의 이후 행보가 궁금하다.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뜻이 같이하는 일부 교수들과 함께 ‘서울대 개혁론’ 목소리를 높인 장회익 서울대 교수(물리학과)쨝는 서열화된 한국의 학벌사회체제에 균열을 낸 값진 모험을 시도했다는 평. 비록 동조하는 목소리는 미약했지만, 이십여명의 교수들과 함께 서울대 개방론을 제기, 학벌로 꽁꽁 다져진 한국사회의 비이성적 질서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는 너, 서울대여!

학벌사회는 가고, 투명사회는 오라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의 김상봉 사무처장(철학자)쨞과 ‘학벌없는 사회 만들기’의 김동훈 사무처장(국민대 교수, 법학과)쨟의 학벌깨기 운동은 장회익 교수의 서울대 개방론과 일부 맥을 같이 하는 작업으로 평가될 듯하다. 이들을 가리켜 학벌사회를 염려하는 양식있는 논자들은 골리앗에 맨몸으로 맞서는 뚝심있는 다윗이라고 치켜세우기도. 저 무시무시한 學‘罰’은 언제 끝나려나.

남성중심으로 서열화된 한국사회. 거기에 일조하는 학벌. 그 틈새에서 이중삼중으로 수난을 겪고 있는 존재는 바로 여성. 고급여성인력 취업난이 해마다 가중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과)쨠가 여성 교수 채용 확대를 주장해 박수를 받았다. 여성 교수 10%라는 현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정교수의 목소리가 단지 ‘여성의 목소리’로만 받아들여진다면, 비극의 그림자는 깊어질 것.

자, 이쯤에서 2001년 교수·대학사회의 대미를 그려보자. 두 사람의 처절한 몸짓이 겹쳐진다. 개그라고 생각하면 오산. 과거 김영삼정권때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보수세력의 돌에 맞아 물러났던 한완상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쨡. “교육을 정치논리로 훼손하지 말아라. 교육은 정쟁의 대상일 수 없다”는 명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숙한 한국 정치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또 한 사람. 안방 극장에서 서민들과 좀 배운 식자층을 울리고 웃겼던 날나리 장진구 교수쨢. 한번 교수면 영원한 교수라고? 전 경영학과 교수인 그는 요즘 ‘교수공부방 대표’ 직함을 가지고 권토중래를 기다리고 있다. 교수사회의 위선과 기만을 알몸으로 연출한 그 역시 우리 시대의 희생자 아닐까.

한국지성사의 값진 성과들

2001년, 인문학의 위기론이 되풀이되고 있는 가운데 단비가 내렸다. 점점 고사상태에 빠져드는 기초학문을 육성, 지원하겠다는 ‘만시지탄’의 정책들이 입안된 한 해였다. 정대현 기초학문육성위원회 위원장(이화여대 철학과)쨣의 느리지만, 신중한 행보가 관심을 끌었다. 3년간 연간 1000억의 예산을 집행해 기초학문을 살리겠다는 계획인데, 비록 이견이야 없을 수 없지만, 큰 그림을 잘 그려서 ‘기초학문의 부흥’을 앞당겼으면.

기초학문 육성이라는 말에 눈쌀을 찌푸리는 논자들도 없지 않겠지만, 한국 박사 실업 문제와 여성 고급 인력 문제의 심각한 상황을 실증적으로 분석해낸 진미석 박사(한국직업능력개발원 직업진로정보센터 소장)쨤와 맞닥뜨리면, 기초학문 육성이 왜 중요한가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공계 박사들도 향후 5년 뒤 절반 이상이 실업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그의 분석은 결국, 국가차원의 고급 두뇌 활용 정책이 부재한다는 충격적 비판. 지금이라도 국가차원의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고급 두뇌라는 게 그렇다면 어떤 모습일까. 이 얼굴에서 바로 그 면모를 발견할 수 없을까. 한국판 옥중수고로 평가받는 ‘고대문명교류사’·‘실크로드학’을 상재한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문명사)쨥 그 사람. 한국지성사의 값진 광경을 연출해낸 정 교수는 아직도 부자유한 상태. 이념 대신에 ‘학문 활동’을 선택한 정 교수는 급격한 현실 변화에도 아랑곳 않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학자의 모습으로 남는다. 정 교수의 지적 고투는 분단 조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올해는 무엇보다 전통 사상의 자리점검이 활발한 해였다.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500년전 이 땅에 탄생한 동갑내기 거유들, 철학자이자 올곧은 선비였던 이들의 사상과 학문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곳곳에서 열렸다. 한번도 상면한 적이 없었던 이들이 2001년 그 문하들을 중심으로 마주쳤다. 이들의 지적 유산을 어떤 형태로 계승 극복할 것인가가 지금 이 땅에서 학문하는 학인들에게 주어진 과제. 그런데 일부에서는 아직도 ‘문중’ 따지면서 고루한 구태를 보이더구만.

이점에서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대표 이기상 한국외국어대 교수, 철학과)?발족은 확실히 올해의 수확으로 꼽을 만하다. 지적 성찰과 치열한 고뇌 부족으로 삶과 학문이 분리됐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자생 학문’을 모색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민족주의적 색채’를 안고 있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이 보편성과 특수성을 절묘히 결합하면서 성과를 가시화할 때, 전통과 근대의 지평이 확장될 것이다. 지적 성숙이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게 아닐까.

지적 성숙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편견’ 혹은 과잉편향으로부터 중심을 잡는 지혜쯤으로 옮겨도 되지 않을까. 서구세계에 대한 과편향은 비서구세계에 대한 몰이해 혹은 왜곡으로 나타나게 마련. 올해 9월에 터진 ‘9·11 테러사건’은 아랍 이슬람 문화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지적 인식 수준을 여지없이 까발겼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과)가 왜 저 거대한 이슬람 사회에 대한 우리 인식이 이 정도냐고 이유있는 항변을 했을 때, 식자들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교감없는 미성숙한 논쟁들

이제 뜨거운 이슈로 옮겨갈 때가 됐다. 논쟁의 전선이 여러 곳에서 형성됐지만 대개 중복되거나, 생산적인 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애시당초 상종하지 말자라는 철저한 ‘伏地不腦’ 모습을 보여줘 실망을 자아냈다. 지식인 논쟁이 성숙한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정말 유감스럽다. 여기서 기억할 만한 얼굴이 있다. 유석춘 연세대 교수(사회학과)?다. “처음부터 내가 친조선일보였던 것은 아니다. 칼럼을 썼더니 그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서 계속 쓴 거다. 강준만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조선에 아부하는 비겁한 지식인은 아니다.” 지식인이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유 교수의 배포는 도저히 측량할 길 없다.

지식인 논쟁하면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과)?도 빠뜨릴 수 없다. 최근엔 ‘문학 권력’이라는 책을 상재, 문단 사람들에게 악감정을 사고 있다. 그의 무기는 실명비판. 감싸주고 대충 눈감아주는 비판 풍토에서 본다면, 그의 실명비판은 양날의 칼이긴 하지만 분명 소득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강 교수의 이런 작업을 인정하면서도 ‘딴지’를 거는 측들이 알량한 주지주의 태도를 견지한다는 점이다. 강 교수와 과감히 논쟁을 벌이는 일을 왜 다들 피하려고만 할까.

전 세계적으로 인간 복제 논쟁이 일고 있는 가운데 생명공학 영역에서 다양한 이견들이 쏟아져나왔다. 올해는 다만 시작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생명윤리논쟁과 관련 서정선 서울대 교수(의학과)?의 자기 목소리는 비록 과학의 합리적 전개라는 대세론에 기운 것이긴 했지만, 신의 영역에 도전할 수밖에 없는 지적 호기심의 덩어리, 연구자들의 비정한 운명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하다. 과연, 인간은 신의 영역에 도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종교는 어디로 가야 하지?

올해 TV를 타고 안방 공략에 나선 대중스타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동양철학)?는 학계를 은근히 긁어댄 화제의 얼굴. 김용옥에 대해 침묵하는 쪽도, 그의 행태를 비판하는 쪽도 모두 일종의 강박을 앓아야 했다. 왜 저렇게 시원하고 쉽게 고전을 해설할 수 없을까. 쉽게 말해, 아카데미의 담론은 어렵고 도대체가 무슨 소린지 모른다는 대중의 욕구가 반영된 현상이었다. 미디어가 복제해낸 엔터테인먼트, 미디어가 잠식하고 있는 지식 사회의 균열을 보여준 얼굴이었다.

이에 반해 교수신문을 통해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과)?가 동양철학계에 날린 비판의 화살은 서양철학자의 ‘동업자 비판’이었다는 단순 차원을 넘어, 실질적으로 동-서 철학의 대화를 시도한 好機로 보였다. 그러나 이어진 동양철학계의 반론은 ‘비판의 현상’에 매몰된, 싱거운 화해 제스처로 나타난 감이 없지 않았다. 이래서 한국 학술논쟁의 단계를 한 차원 끌어 올릴 수 있었던 대단한 기회가 한 지적 자유주의자의 독백 정도로 간단하게 정리돼 아쉬움을 남겼다. 역시 논쟁이란, 성숙을 향해 가는 대화지 혼자 영그는 독백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지적 성숙이니 논쟁이니 사유의 지평이니, 인문학의 부흥이니, 삶의 질적 고양이니 하는 말들이 자기 뼈와 육체를 얻으려면 뭔가 토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책 좀 읽자, 도서관 좀 많이 만들고 책으로 풍성하게 채우자고 주장한 책읽기 국민운동본부의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어영문학과)?도 문화적, 학술적 인프라 구축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올해 바빴던 사람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성과가 있었던가. 그저 씨앗 하나가 저 광활한 마른 대지에 뿌려졌다고 생각하자.

대구와 부산에서 각각 간행돼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녹색평론’과 ‘오늘의 문예비평’도 사실 그런 씨앗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서울’ 지방에서 누가 대수롭게 봐주는 것도 아니지만, 이들은 자기 자리에서 제 목소리를 내면서 문화의 여백을 가꿔왔다. 이 잡지를 주관하는 김종철 영남대 교수(영어영문학과)?와 남송우 부경대 교수(국어국문학과)?의 얼굴은 그래서 더욱 값져 보인다.
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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