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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비평과 틈새문화
[문화비평] 비평과 틈새문화
  • 김영민 / 철학자
  • 승인 2008.07.07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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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 이론을 ‘알면서 모른 체하기’ 속에 숨기는 까닭은 달을 위해 손가락의 기세가 숙져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나치게 도드라진 방편은 ‘力說-逆說’의 자가당착에 물리기 일쑤다.

특히 생활세계의 일상에 내려앉으려는 문화비평의 경우 이론과 함께 이론의 고개를 넘어가는 습작과 발효의 과정은 긴요하다. 이론이 차분해지면서 일상의 문화분석은 정치화하게 마련이다. 묘사(Beschreibung)와 평가(Bewertung)가 어우러질 수밖에 없는 글쓰기의 지평에서 이론은 제 나름의 길을 내며 선택을 주도하는데, 체계 속의 선택은 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이 정치는 이념의 투쟁에 근거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론들이 생활 속에 내려앉는 과정에서 각자가 선택한 생활양식이 불가피하게 평가당하는 기회를 가리킨다. 그래서 비평은 문학적이지만 문학만은 아니다.

‘이론으로 인해 차분해진 비평’은 생활세계를 그 전체상에서 훑으면서 정치적인 평가와 더불어 기존의 생활양식에 실천적으로 개입한다. 학인들이 손쉽게 주워섬기는 지행합일의 이념은 바로 이 ‘개입’의 정치성에 의해 그 현대적 양식을 얻는다. 여기에서 문제는 그 개입을 체계적으로 막아 인문학 공부 일반을 탈정치화 하고 고작 화폐나 권력 매체의 공격적인 구매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현실체계에 대한 저항이다. 물론 비평이야말로 바로 이 저항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이 비평적 저항이 마치 게릴라처럼 훑어낼 곳이 곧 틈새(niche)들이다.

 

‘니치 마켓팅(niche-marketing)’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니치의 사전적 의미는 “장식을 목적으로 두꺼운 벽면을 파서 만든 반원형의 움푹한 臺, 혹은 壁龕”이다. 니치인더스트리(niche-industry)를 ‘틈새산업’으로 옮기듯이 니치컬쳐(niche culture)를 그저 ‘틈새문화’로 번역해서 거시적 대중문화가 세분화하면서 만들어져 가는 소규모의 특정 마니아 문화로 옮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시장이나 시장주도적 문화가 다변화, 세분화, 전문화돼 가는 영역이기 이전에 오직 전체상과의 관련성 시야 속에서만 드러나는 삶의 선택적 정치성이 망실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권력 매체의 망을 피해 숨어들어간 틈새 역시 시장의 리좀화로 인해 생성된 화폐공간의 특이성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시화의 상처들로부터 숨어들어간 루소적 식물공간이나 국가권력에 대해 조용하고 지속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소로우적 산책공간은 이미 추억이나 공상이 되고 말았다. 다양한 니치공간 속의 개인들은 개인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개성화함으로써 공적 권력장으로부터 자유로운 듯하지만, 비평의 실천을 통한 생활양식의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여전한 매체권력과 화폐권력의 하수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고도 하듯이, 니치공간 속의 문화적 쾌적과 그 미시적 有閑은 오직 거시세계의 체계논리에 무감각한 탓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리고 모든 선물은 눈에 띄지 않는 비용의 청구서를 동봉한다. 삶의 전체상을 잃고 스타일화한 취향 속에 사적 유토피아를 구하는 니치족의 세계 속으로 인문학적 비평공간을 개입시키는 것은 안팎으로 난감한 노릇이다.

‘생활양식의 완벽한 불간섭주의’로 진화한 소비자 공간의 특이점은 비평의 촉수를 거부하거나 기껏 냉소할 뿐이다. ‘남이야 어떻게 살든!’이라는 反비평적 자유주의는 신경증적 상대주의 속을 부유하면서 생활양식에 근거한 비평적 개입을 근원적으로 차단한다.

비평적 개입을 거부하는 태도는 자본제적 교환체제 속의 소비자들에게는 당연한 권리처럼 인정된다. 가령 학생들의 생활양식을 구성하는 태도나 버릇에 선생들이 비평적으로 개입할 수 없게 된 데에는 학교가 시장으로 변하고 학생들이 소비자로 변신한 세태가 완고하게 자리한다. 음식을 남기는 것도 소비자의 권리이듯 강의를 잘라 먹는 것도 소비자의 권리다. 소비사회 속의 ‘마지막 인간’(니체), 혹은 ‘영혼이 없는 전문가와 마음이 없는 향락가’(막스 베버)는 제 구멍(niche) 속의 열정을 ‘문화’라고 부르며 벽을 향해 제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
기껏 ‘소비자주권’ 따위가 진보의 상한선인 이 자본제의 거리에서!

김영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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