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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이성에 바탕한 단순미의 추구
상식과 이성에 바탕한 단순미의 추구
  • 이남재 / /한국교원대·음악학
  • 승인 2008.07.0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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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재의 ‘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 ]11.글룩의 ‘개혁’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대다수 문헌들은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개혁’ 오페라라는 꼬리표를 붙여놓고 있다. 그러나 이 오페라를 실제 감상하다보면 과연 무엇이 ‘개혁’이란건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끈하기만 하다. 이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짐작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1762년 이 작품이 초연됐던 비엔나는 물론, 당시 오페라가 융성했던 주요 도시들의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개릭에서 글룩까지』를 쓴 다니엘 하츠에 의하면, 이 오페라를 작곡한 보헤미아 출신의 크리스토프 글룩(1714~87)과 이태리 출신의 동갑내기 대본작가 라니에리 데 칼차비지는 “고대 연극의 독창, 합창, 기악 음악, 몸짓, 그리고 볼거리를 망라한 모든 측면들을 되살린 것으로 믿었다”고 전한다. 현존하는 첫 오페라였던 페리의 「에우리디체」의 대본을 쓴 리누치니가 내세웠던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목표를 다시 내세운 것을 접하면서 필자는 두 작품들 사이에 가로 놓인 한 세기 반 남짓한 기간 동안 어떻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됐는지 그 곡절이 궁금했다.

오페라의 본 모습 되찾으려는 움직임


오페라의 본 모습을 되찾고자 한 이러한 움직임은 음악보다는 대본의 문제에 대한 논의로 먼저 표출됐다. 1740년부터 9년간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서 오페라 대본의 번역 작업을 도운 바 있는 알가로티가 1755년 발표한 「오페라에 관한 소론」은 이태리 오페라 세리아의 병폐를 지적하고 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던 대표적 문헌이다. 그는 오페라에 대해 “고상한 영혼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인간이 고안해 낸 모든 방식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기발하고 완성된 것”이라고 운을 뗐다. “기쁜 감정을 북돋우며 마음을 사로잡고 정신을 달콤하게 유혹하기 위해 시, 음악, 마임, 춤, 그리고 그림이 모두 행복하게 결합돼 있다”며 오페라를 정의함으로써 자신의 개혁 방향을 암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오페라가 원래 의도했던 효과를 거두기 못하고 있는 것은 대본, 즉 줄거리에 너무도 적은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 결과 이러한 요소들이 제대로 연계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게 돼 아무런 환상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맥빠지고, 연결이 안되며, 비현실적이고, 기괴하게” 돼버렸다는 것.


이렇듯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에 빠진 오페라를 “지난날처럼 영광스럽고 품위 있는 상태”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음악계에 질서를 확립하여 기교가 뛰어난 가수들이 전과 같이 훈련과 규칙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알가로티는 역설했다. “아리아의 수와 투구의 높이, 외투의 길이” 따위의 소소한 문제로 싸우느라 분주했던 이태리 오페라 세리아의 혼란스러운 상태에 대한 그의 개탄은 새로운 방식의 오페라가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 이론적 바탕을 제공했다. 알가로티는 가수 중심의 오페라 제작 관행의 근본 원인이 바로 “오로지 수입을 올리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흥행사들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휘하에 “결단력과 열의를 겸비한 유능한 감독의 통제를 받는 극장”을 가진 “뮤즈들과 친근한 군주” 뿐임을 역설했다.


그의 이러한 음악적 논점들은 글룩의 「오르페오」에 충실하게 구현돼 있으나, 유일하게 서곡만은 예외여서, 알가로티가 지적한 “가능한한 시끄러운”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아쉬움은 이후 작곡된 「알체스테」에 극 전체의 분위기를 예감하게 하는 서곡이 붙여짐으로써 말끔히 해소됐다. 이 오페라의 출판된 총보에는 글룩의 이름으로 된 서문이 붙어 있는데, 그는 서곡이 “청중들에게 앞으로 펼쳐질 줄거리의 성격, 즉 그 주제에 대해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개혁 오페라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이 서문은 위에 소개된 알가로티의 언어와 음악의 관계에 대한 일반론을 축약해 반복함으로써 시작된다. 뒤이어 글룩은 자신이 가수로 하여금 “열띤 대화 중에 지겨운 리토르넬로가 끝나기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으며, “단어의 중간을 노래하기 좋은 모음으로” 나누지 않았고, “카덴차를 부르기 위해 숨을 고를 시간을 오케스트라가 주기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특히 기악 악구들이 “감정적 흥미의 정도에 맞게 사용됨으로써 무엇보다도 아리아와 레치타티보가 교체될 때 빚어지는 급격한 단절을 회피하려 했다”는 구절은 단순 레치타티보보다 기악 반주가 붙은 레치타티보를 선호했던 개혁 오페라의 두드러진 특징의 의도를 잘 설명해 준다. 결국 이 서문은 “상식과 이성에 반하는 모든 남용들을 제거해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겠다”는 한 마디로 축약될 수 있다.


글룩의 오페라 개혁의 저변에는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상황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었다. 당시 재상이었던 카우니츠 공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을 마무리한 1748년의 엑스라샤펠 조약의 체결을 이끌어 낸 유능한 외교관으로서, 1750년부터 3년간 파리 주재 대사를 역임했다. 1756년 발발한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입장을 바꿔 오스트리아 편에 서도록 하는데 성공한 카우니츠는, 비엔나의 극장 감독관으로 두라초를 임명해 프랑스 오페라와 이태리 오페라의 요소들을 접목시킨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를 모색하도록 독려했다. 이런 점에서 카우니츠가 글룩의 개혁 오페라 「오르페오」를 탄생시킨 근본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다.

통치자의 취향이 반영된 형식과 내용


이러한 정치적 배경의 고찰은 궁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오페라 형식과 내용이 통치자의 취향에 따라 크게 좌우됐음을 보여준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는 역시 글룩과 동갑이었던 욤멜리의 작품들이다. 비엔나를 위시한 여러 도시에서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했던 욤멜리는, 프랑스 취향을 가진 카알 오이겐 공작의 쉬투트가르트 궁정에 고용됐을 때 글룩의 개혁 오페라와 같은 양식의 「버림받은 디도」를 썼다. 그러다가 말년에 나폴리로 돌아가서는 레시타티보-아리아의 연속으로 이뤄진 전형적인 오페라 세리아 「버림받은 아르미다」를 작곡했던 것이다. 비엔나에서 글룩의 활동도 마찬가지로 통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미 언급한 엑스라샤펠 조약의 체결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 통치가 확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글룩은 역시 왕위가 위태로웠던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은 「세미라미데」를 작곡했다.


글룩이 개혁 오페라를 작곡하게 된 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준비 작업의 결실이었다. 초기 메타스타지오의 대본에 기반한 여러 오페라를 작곡해 명성을 확립한 글룩은, 비엔나에 정착한 후 일류 작곡가들이 기피했던 프랑스 발레단을 위한 발레곡의 작곡을 전담한 적도 있으며, 두라초가 들여왔던 프랑스의 오페라-코미크를 편곡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중에는 자신이 직접 이 장르의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의 성공적인 ‘개혁’에는 두라초와 칼차비지 외에도 첫 오르페오였던 이름난 알토 카스트라토 과다니, 경험이 풍부한 무대 디자이너 콸리오 같은 뛰어난 예술가들의 협력 또한 든든한 뒷받침이 돼주었다.

/한국교원대·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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