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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생래적으로 권력적 … 지적 모험이 더 필요하다
비평은 생래적으로 권력적 … 지적 모험이 더 필요하다
  • 고명철 / 광운대·문학평론가
  • 승인 2008.07.07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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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교수신문 ‘여성평론가들의 약진, 성과와 한계’(483, 486호) 논쟁을 읽고

최근 한국문학비평의 동향을 냉철히 점검해보면, 여전히 비평계가 침체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을 묵과해서는 곤란하다. 분명한 사실은, 매해 신춘문예를 포함하여 각종 문예지의 신인상 제도를 통해 비평적 글쓰기가 잘 훈련된 비평가들이 속속 배출되면서 비평계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고 있으나, 어찌된 일인지 침체된 비평계는 좀처럼 활기를 회복할 기미가 아니다. 이렇게 진단하면, 나의 성급한 주관적 판단의 오류일까. 왜냐하면 2000년대 이후 급부상한 여성비평가들의 활발한 글쓰기를 고려해보건대, 나의 이와 같은 판단은 여성비평가들의 두드러진 약진을 너무 과소평가한 게 아니냐, 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점을 분명히 해두자. <교수신문>에서 최근 마련한 여성비평가들의 활동에 대 한 두 비평가(하상일과 강유정)의 확연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비평가 모두 2000년대 이후 한국문학비평에서 여성비평가들의 존재와 그 비평적 가치를 존중하고 있듯, 나 역시 여성비평가들 특유의 비평적 글쓰기를 통해 한국문학비평의 외연을 확장할 뿐만 아니라 내실도 튼실히 다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큰 異見이 없다. 하지만, 뭐랄까. 한때 유행했던 히딩크 축구 감독의 말을 슬쩍 빌리자면, 한국문학비평계는 여전히 배가 고픈 형국이다. 새로운 피가 끊임없이 수혈되면서 공격과 수비를 위한 다양한 전술이 실험되고 있지만, 한국문학을 한 단계 고양시키기 위한 전술과 전략이 좀처럼 한국문학 토양에 착근되고 있지 못하다.


겉으로 보면, 비평적 글쓰기의 실험성과 대중문화와 문학의 통섭을 통한 새로운 유형의 비평을 통해 “비평 자체를 하나의 문학 텍스트로 격상”하기 위한 노력을 다 하면서, “20세기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 놓인 젊은 평론가로서의 문학적 자의식”(강유정)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이러한 비평이 한국문학의 토양을 풍요롭게 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면이 있다.

이에 대해 “여성문학비평은 끊임없이 새로운 의제를 만들어나가면서 여성과 문학의 관계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의식을 생산적으로 제시해 나가야 할 것”(하상일)을 요구한 점은 귀 기울일 대목이다. 나는 이것과 관련해 덧보태고 싶은 게 여성비평 스스로가 그 존재적 가치를 특화시킴으로써 은연중 비평 일반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와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비평, 불필요한 오해 가지고 있다

가령, 강유정은 ‘여성비평’의 존재를 주목하면서 ‘여성비평’과 상대적으로 구분 짓는 여타의 비평에 대해 “작품을 읽고 공명하는 일차적 독자라기보다는 공적 권력가에 가까워진다.”라는 견해를 앞세워, ‘여성비평’이 다른 비평보다 개별 작품의 미의식에 섬세히 공명하는 特長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여기에는 비평 일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비평은 생래적으로 권력과 무관할 수 없다. 어떤 비평가가 자신의 비평을 권력과 무관한 비평이라고 주장하거나, 비평의 독자적 예술성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비평의 존립 기반은 비평의 대상인 텍스트라는 물질성을 부인할 수 없고, 더욱이 출판·언론·교육이 다층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문학제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비평의 생래 자체가 권력과 매우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해서는 곤란하다. 이게 어디 비평에만 국한되는 일인가. 무엇을 기록하는 문자 행위 자체가 권력을 수반한다는 것은 새삼스레 강조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평이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여부의 문제를 놓고 괜한 소모적 입씨름을 할 게 아니라 부여된 권력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활용하느냐, 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바로 여기서 ‘여성비평’은 그 특유의 비평적 권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담론을 적극적으로 기획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비평적 권력 자체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갖는 것보다 ‘여성비평’의 존재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여성비평’이 소유한 권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럴 때, ‘여성비평’은 자연스레 당대의 비평계에 의미 있는 쟁점을 형성하고, 그 쟁점에 대한 다양한 비평가들의 활발한 논의의 장 속에서 한국문학의 토양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여성비평’뿐만 아니라 비평계 전반에 요구되는 게 있다면 무엇일까. 아마도 2000년대 이후 젊은 비평가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새롭게 급변하는 문화감각과 이론의 변화 속도에 뒤처져서는 안 돼.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난 이론에 기반한 비평은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져주지 않아. 따끈따끈한 새 이론을 빨리 공부해 그것을 비평의 언어로 드러내야지. 내 비평의 언어는 무언가 다르고 참신해야 해.’ 이러한 생각 자체를 탓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문학이론을 습득하고, 그것을 한국문학과 접맥시킴으로써 한국문학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새 지평을 여는 그들의 열정과 노력을 충분히 북돋워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국문학비평이 ‘지금, 이곳’에서 넓고 깊이 숙고해야 할 문제 또한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비평 일반이 갖는 권력을 외면하지 말고, 그 권력의 속성을 제대로 활용하는 문제와 결부돼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문학비평은 삶과 현실로 下放해야 할 것이다. 비평의 언어는 이론의 성채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현실과 호흡할 수 있는, 그러면서 비평 특유의 지적 모험을 통해 현실에 活捉하는 역할을 다 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촛불집회의 현장에서 소통되는 언어로부터 어떤 시사점을 제공받곤 한다. 이른바 ‘촛불의 언어’는 타자를 향한 맹목적 敵意를 품는 언어가 아니라 모두 다 함께 공생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는 언어다. 그들의 언어는 비판의 속성을 띠고 있되, 칼끝이 타자의 목울대와 심장을 겨냥하는 殺慾의 언어가 아니라, 위정자와 조중동 거대언론 권력의 잘못을 풍자와 해학으로 깨닫게 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높은 차원의 비판성을 확보한 新生의 언어다. 21세기 촛불집회에 참가하고 있는 다중의 언어들은 1970,80년대의 집회가 갖는 ‘父性의 언어’가 갖는 성취와 한계를 훌쩍 넘어 21세기 문화적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母性의 언어’와 ‘友愛의 언어’를 집회의 현장 속으로 절묘히 배합해 버무린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비평적 감각을 육화하고 있다. ‘모성의 언어’와 ‘우애의 언어’가 버무려진 ‘살림의 언어’를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미적 정치성에서 멀어진 한국문학비평

고백하건대, 나는 이러한 ‘촛불의 언어’에서 그동안 한국문학비평이 망실하고 있던 비평의 언어가 어떠한 꼴로 갱신돼야 하는가에 관한 모종의 깨우침을 얻는다.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한국문학비평은 ‘촛불의 언어’와 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솟구치는, 그러면서 경직되지 않고 비평 특유의 경계를 활달히 넘나드는 비평의 감각을 통해 높은 차원의 미적 정치성을 보증하는 비평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비평가들만이 비평을 심드렁히 읽는 데 자족하고, 창작과 팽팽한 긴장 관계도 형성하지 못하고, 더욱이 문학제도를 간신히 유지시켜주는 거간꾼 역할로 자처하고 있으니, 한국문학비평은 바닥을 치는 심정으로 ‘촛불의 언어’가 들려주는 저 숱한 거리의 비평적 감각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문학비평이여, 거리의 곳곳에서 들려오는 ‘촛불의 언어’로부터 비평의 생산적 권력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 한국문학비평은 ‘촛불의 언어’가 지닌 미적 정치성을 어떻게 전유할 것인가. 비평의 下放은 그래서 매우 절실하다.

고명철 / 광운대·문학평론가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1970년대 민족문학론의 쟁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칼날 위에 서다』, 『‘쓰다’의 정치학』, 『비평의 잉걸불』 등이 있다. 계간지 <실천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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