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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과 실험, 어디로 이어질까
파격과 실험, 어디로 이어질까
  •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
  • 승인 2008.06.30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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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연의 새로운 트렌드] 넌버벌 퍼포먼스

언어는 인간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오랜 세월동안 활용돼 왔다. 그러나 언어만이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언어 외에도 우리는 수많은 비언어적 코드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해 생각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입과 귀를 통하는 언어적 커뮤니케이션과 달리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은 인간의 오감과 지각 능력, 시각적 기호와 상징을 통해 이뤄지는 특성이 있다. 언어 체계만큼 복잡하거나 구조적이진 않지만, 적절한 장소와 상황에서는 오히려 말보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고 함축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시선, 하나의 손짓이 더 압축된 메시지를 담아내기도 한다.

무대 위 공연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는 바로 이러한 비언어적 상징과 은유, 코드와 기호를 활용해 무대의 의사소통을 이뤄내는 일련의 장르적 속성을 지닌 공연물을 말한다. 사전적 정의를 내리자면 넌버벌 퍼포먼스는 비언어극과 퍼포먼스의 결합체이다. 비언어극이란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활용해 무대를 꾸미는 일련의 예술적 활동을 지칭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임 혹은 판토마임이 있다. 원래 마임이란 그리스어의 미모스(Mimos)에서 파생된 용어로 ‘흉내를 낸다’는 의미다. 대상이나 정물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를 다양한 육체 언어를 통해 재연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칭한다. 한편, 퍼포먼스란 그 기원을 명확하게 정의내리긴 힘들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표현 욕구를 이야기를 통해 표출한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원시 사회의 종합예술행위에서 이미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한때 퍼포먼스보다 해프닝이나 이벤트로 더 많이 불리기도 했는데, 오늘날에는 이러한 총체적 행위 자체를 퍼포먼스라 부르는 경향이 우세하다.

넌버벌 퍼포먼스는 이렇듯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활용한 전위적인 예술 행위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사실 요즘 세계 상업공연가에서 인기를 누리는 넌버벌 퍼포먼스는 보다 특정된 개념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즉, 무언극적 전통과 실험적 예술 행위로서의 의미 외에도 보다 쉽고 대중적인 비언어적 상업예술을 통칭하는 경향이 있다. 뮤지컬의 한 부류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대중적 전통을 지닌 상업 극장가에서 오랜 기간 공연하며 장기 흥행을 이룬 결과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상업 극장가에서 넌버벌 퍼포먼스로 각광을 받았던 초기 작품들로는 「스톰프(Stomp)」, 「탭덕스(Tapdogs)」, 「튜브스(Tubes)」 등이 있다. 특히 1991년 영국에서 처음 등장한 「스톰프」는 이 분야의 선구자적인 작품이다. 퍼쿠션 주자인 루크 크레스웰과 배우 겸 작곡가인 스티브 맥니콜라스가 처음 구상한 이 작품은 영국 남부 해안의 휴양도시인 브라이튼에서 시작돼 런던 블룸스버리 극장에서의 프리뷰를 거쳐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대중적 성공을 거두며 세계적인 인기를 구축했다(덕분에 지금도 넌버벌 퍼포먼스들은 일반적으로 축제를 통해 선을 보이고, 그 반응에 따라 시장으로 유통되는 구조를 따르는 게 일반적이다). 「스톰프」의 파격과 실험성은 적은 자본으로도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펼칠 수 있는 소극장 뮤지컬의 시장 환경과 맞물려 다양한 넌버벌 퍼포먼스 작품의 등장을 촉발시켰다.

새로운 시장의 욕구와 수요에 따라 대중적 흥행을 기록한 넌버벌 퍼포먼스들로는 「블라스트(Blast)!」나 「델 라 구아다(Del La Guarda)」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암벽등반가와 드라마 스쿨의 배우들이 참여해 완성한 「델 라 구아다」는 실험성과 대중성, 예술성과 흥행의 여러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성공적인 사례다. 스페인어로 ‘지켜주는 이’, ‘관리하는 사람’ 혹은 ‘수호천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95년 첫 막을 올렸는데, 배우들의 몸에 와이어를 달고 천정을 포함한 극장의 모든 공간을 돌아다니며 ‘날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몸짓에 담아 표현해냈다.

언어적 장벽에 비교적 덜 민감한 탓에 넌버벌 퍼포먼스는 국내 뮤지컬계와 상업 공연계에서도 해외 진출이 용이한 장르로 주목 받아 왔다. 대표적인 창작 넌버벌 퍼포먼스로는 단연 「난타」가 손꼽힌다. 「난타」란 투기종목에서의 난타전처럼 마구 두드린다는 의미로 네 명의 남녀 조리사가 결혼피로연을 위한 요리를 급히 준비해야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소동을 다룬 작품이다(그래서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은 「쿠킹(Cooking)」이다). 배경이 주방이다 보니 칼이나 도마, 냄비, 프라이팬, 접시 등 온갖 주방기구와 일상 용품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을 던지고 두드리며 빚어지는 타악 리듬이 독특한 묘미를 창출해 냈다. 「난타」의 형식상 특성을 두고 항간에는 「스톰프」와 「튜브스」의 혼성 모방임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면 「난타」에는 한국 특유의 사물놀이 리듬이 가미돼 있어 신명나는 공연을 만들어낸다는 주장 또한 만만치 않다.

한국적 넌버벌 퍼포먼스의 또 다른 성공사례로는 「점프」를 꼽을 수 있다. 2002년 「별난 가족」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막을 올렸던 이 작품은 2003년부터 공연 제목을 「점프」로 바꾸고 꾸준히 해외공연을 펼쳐왔다. 「점프」는 동양 무술과 아크로바트 그리고 코미디를 뒤섞은 내용으로 3대에 걸친 무술 집안에 도둑이 들면서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를 말과 대사 대신 무술과 몸놀림에 담아 표현한 작품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넌버벌 퍼포먼스는 B-Boy performance와 결합되며 그 활동영역을 더욱 넓혀가고 있는 추세다. B-Boy의 B란 브레이크 댄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남자를 지칭한다(여성 브레이크 댄서는 B-Girl이다). 넌버벌 퍼포먼스와 B-Boy의 결합은 극적 구성을 가진 춤이라는 미적 가치를 잉태해내며 확장되고 있는데, 발레리나와 비보이가 춤을 통한 교감을 나누게 되는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나 인형을 극적 구성으로 빌어온 「마리오네트」 등이 대표적인 흥행작이다. 

상업적인 흥행을 거둔 넌버벌 퍼포먼스 시장이 앞으로 어떤 방향성을 지향해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그러나 넌버벌 퍼포먼스에는 늘 파격과 실험이 주요한 방향성으로 자리매김해 왔으며, 앞으로도 갖가지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통한 형태적 진화가 꾸준히 지속될 것으라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형식의 해체와 파괴가 진보나 진화를 상징한다는 것처럼 넌버벌 퍼포먼스는 단순히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기 위한 상업적 자본의 ‘차선의 선택’이 아닌 포스트모더니즘의 충돌과 해체,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다시 새로움이 잉태되는 현대 문화산업의 형식적 구조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바로 넌버벌 퍼포먼스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평가의 잣대가 돼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원종원 / 순천향대·신문방송학

필자는 한국외대에서 「외국 음악방송의 국내 도입과 그 영향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등을 번역했고, ‘미스 사이공’ 예술자문, ‘비밀의 정원’ 예술 감독을 맡았다. 저서로는 『원종원의 올 댓 뮤지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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