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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거장 중심 미술사 연구, ‘물건’ 만났네
명품·거장 중심 미술사 연구, ‘물건’ 만났네
  • 장진성/ 서울대·미술사
  • 승인 2008.06.3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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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참관기_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와 물질문화’

지난 12일에 열린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의 전기 학술대회였던 ‘미술사와 물질문화’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물질문화연구(material culture studies)의 방법론과 시각을 미술사 연구에 적용해 미술작품 해석에 대한 새로운 학문적 전망을 탐색해 본 자리였다. 물질문화연구는 예술작품을 포함한 인간생활과 관련된 모든 물건들(objects)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러한 사물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맥락에서 사용됐는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로써 물건과 인간이 맺는 다양한 관계 및 해당 문화의 구체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을 학문적 목표로 하고 있다. 물질문화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결국 유물(artifacts) 혹은 물건들(objects)로 이야기 되는 인간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사물들(things)이다. 이 경우 연구의 대상은 고급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의복, 주방기구, 묘지, 서적, 완구, 가구 등 인간생활과 연관된 모든 물건들로 확대된다.

물질문화연구는 이러한 다양한 물건들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상징적 성격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해당 사회 및 문화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사유방식, 가치체계, 취향 및 태도 등을 복원함으로써 이제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인간역사의 또 다른 측면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김종일 서울대 교수(미술사)는 「물질문화의 고고학적 이해와 미술사」에서 물질문화연구의 학문적 기반을 마련한 고고학, 인류학 이론을 학설사적으로 점검해 물질문화에 대한 다양한 개념규정들을 검토했다.

한편 조인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미술사)가 발표한 「물질문화연구와 동양미술」은 물질문화연구의 쟁점과 현황, 연구사를 정리하고 물질문화연구의 방법론이 동양미술사 연구에 적용된 사례들을 분석했다. 조인수 교수는 물질문화연구가 수용되면서 기존의 미술품에 대한 심미적 접근과 양식적 분석을 탈피해 미술사연구가 미술작품의 생산, 소비, 기능 등 다양한 사회적 맥락을 고찰하는 방향으로 전환됐음을 주목했다.

조인수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1970년대 이후 물질문화연구의 시각과 방법론이 미술사연구에 수용되면서 미술사는 연구대상의 확대와 다양한 방법론의 모색을 달성할 수 있었다. 즉 회화, 조각, 건축 등 미술사의 핵심 연구영역에서 제외됐던 가구 등 공예사연구가 물질문화연구의 학문적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원용하면서 미술사의 새로운 연구영역으로 부상했다. 아울러 1990년대 시각문화연구(visual culture studies)가 활성화되면서 미술사는 기존의 고급 미술작품, 이른바 명품(masterpieces)과 거장(masters)에 대한 인식에 도전을 받게 됐다. 시각문화연구와 물질문화연구가 미술사연구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명품 위주의 고답적인 연구에 대한 비판이었다. 명품과 거장의 개념이 흔들리면서 미술사학자들은 모든 미술작품은 연구대상으로서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연구대상 사이에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즉 미술사연구에 있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중요하지만 어느 가정집 식탁에 놓여있던 물주전자도 이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주경미 부경대 교수(미술사)는 「불교미술과 물질문화: 물질성, 신성성, 의례」에서 불상, 불탑, 사리기의 ‘물질’적 속성에 주목해 불교미술사의 맥락이 아닌 불교와 물질문화라는 보다 거시적인 틀에서 불교미술품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불상, 불탑, 사리기 등은 근대에 이르러 불교미술사의 연구 대상이 되기 이전에는 불교 의례를 위한 종교적 예배대상이며 동시에 성스러운 ‘물건’들이었다.

최공호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미술사)는 「사진 한 컷에 담긴 근대 공예사의 원풍경」이라는 발표에서 공예사 연구의 주류적 방법론인 양식사적 접근의 한계를 비판하고 공예품의 형식을 결정하는데 있어 조형요인 이외에 환경요인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공예품들은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지며 왜 특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는가를 「할머니와 정안수」라는 20세기 초 사진을 통해 규명하고 있다. 즉 최 교수는 공예사 연구는 생활사, 물질문화연구를 포괄하면서 인간의 생활공간 속에서 가구 및 생활용품들이 어떠한 형식과 기능을 지니게 되는가를 고찰하는 보다 거시적인 학문적 영역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질문화연구와 미술사연구의 만남은 기존의 순수미술이라는 범주를 넘어 디자인 등 보다 상업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됐다. 진휘연 SADI 교수(미술사)의 「미술·디자인의 통합과 물질문화: 무라카미 다카시의 미술상품과 욕망」에서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복잡하게 전개되는 개인의 욕망과 일본 오타쿠 문화의 특징에 주목, 자신의 작품을 루이비통 가방 등에 응용해 기업가적인 작가로 성장한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세계를 통해 현대미술을 물질문화라는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무라카미의 작품은 더 이상 순수미술이 아니며 자본주의 시대의 끊임없는 소비 욕망을 반영하는 상업화된 사물인 것이다.

우정아 KAIST 교수(미술사)의 「물질의 소멸의 예술의 탄생」은 남대문 화재 사건을 통해 제기된 원작이 소멸된 상태에서 예술작품의 진정성과 권위는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즉 설치 작품들에서 자주 거론되는 작품의 상실과 소멸이라는 주제를 마르셀 뒤샹과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있다. 우 교수는 후기구조주의 시대의 중요한 주제인 원작의 모멸과 저자의 죽임이라는 틀 속에서 현대미술의 특징 중 하나인 주체의 소멸과 상실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규명하고자 했다.

물질문화연구에서 제기된 많은 학문적 이슈들이 아직 미술사에서 적극적으로 검토되고 있지는 않다. 아울러 학제적인 성격이 강한 물질문화연구의 학문적 정체성을 명쾌하게 규명하는 일도 쉽지 않으며 아울러 학자들 사이에서도 물질문화연구의 기본 방법론에 대한 많은 이견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물건을 통한 문화와 역사에 대한 통찰’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물질문화연구는 명품과 거장들을 중심으로 미술의 역사를 연구해 왔던 미술사연구에 앞으로도 많은 학문적 자극을 줄 것이다.   

 

장진성 / 서울대·미술사

필자는 예일대에서 「왕휘(1632-1717)와 청초 산수장권 제작의 역사적 의미」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동기창과 서양기하학」, 「조선후기 사인풍속화와 여가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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