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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평론가’들이 있을 뿐 ‘여성’ 평론가는 없다
‘새로운 평론가’들이 있을 뿐 ‘여성’ 평론가는 없다
  • 강유정 / 고려대·문학평론가
  • 승인 2008.06.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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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교수신문 483호‘여성평론가들의 약진, 성과와 한계’를 읽고

문학은 여성이어야 한다. 폭탄 테러로 유명한 유나바머는 행동에 앞서 선언문을 남겼다. 그 선언문 중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있는데, 바로 여성과 좌파 그리고 열등감을 동일선상에 두고 말한 부분이다. 유나 바머는 좌파라는 말 속에 정치적 열등감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좌파들이 일부러 ‘여성’이라는 말 속에서 ‘약함’이라는 의미를 도출해냈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소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기호를 정치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해석 때문에 소수자가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쯤에서 한 번 돌이켜 보자. ‘여성’이라는 단어가 그의 말처럼 순수하게, 비정치적 언어로 사용되어 왔던가. 수많은 여성 비평가들이 자신의 첫 비평집 제목에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던 것이 과연 열등감의 결과였을까.

선배 평론가들이 ‘여성’이라는 수식어를 ‘문학’ 앞에 붙였을 때에는 소수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자각이 전제되어 있다. 김미현은 평론집 『여성문학을 넘어서』에서 그동안 ‘여성문학’이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오해가 축적돼 왔는지 보여줬다. 이러한 태도는 등단 이후 줄곧 여성과 섹슈얼리티 문제를 고민해 온 심진경의 평론에서도 엿보인다. 심진경은 여성이야말로 문학을 가로지를 수 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평자는 스스로 ‘진짜 여성’이 되는 것이 곧 문학을 관통하는 길이라고 규정한다.


1990년대를 관통해온 이 두 평론가는 그 동안 여성 평론가가 어떤 입장에서 문학을 비평해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생물학적으로 먼저 태어나, 활동해왔던 선배 평론가들의 글에는 축자적 의미에서 이미 소수자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 평론가로서의 자의식이 침전해있다. 이들의 글에는 남성 중심적으로 구축된 문학 비평의 관습에 흠집을 내고 여성적 시선의 여지를 확보하기 위한 결연함이 있다. 문학-남성을 여성-비평으로 관통하고자 하는 간절함과 날카로움이 동시에 배어있는 것이다.

1990년대 등장해 활동했던 여성 평론가들의 역할에는 당대에 등장해서 주목받았던 여성 작가들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은희경, 전경린, 조경란, 신경숙과 같은 소설가들이 당대 문학의 주류로서 자리 잡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만일 생물학적 성별을 따진다면 1990년대 문학은 ‘여성문학’으로 규정지어야만 할 것이다. 소수자에 대한 낙인과 같았던 ‘여류’, ‘여성’이라는 수식어는 1990년대를 지나면서 점차 그 정치성을 잃어간다. 적어도 소설과 시에서는 말이다. 평단과 대중에게 모두 인정받았던 이 작가들은 당대만 하더라도 따라다니던 ‘여류’라는 수식어를 췌사로 만들었다. 이제, 누구도 정이현을 비롯한 2000년대 이후의 작가들을 굳이 ‘여성’이라는 수식어로 한정하지 않는다.

2000년 이후 등단한 여성 평론가들은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비롯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2000년 이후 등장한 여성 평론가들의 글에서 공교롭게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휘발됐다는 사실이다. 이는 수적 증가를 토대로 여성 평론가들의 약진을 가늠하는 태도와의 결별을 요구한다. 평자들은 황병승, 김태용, 정이현, 편혜영, 천운영과 같은 젊은 소설가들의 작품에서 동시대의 맥락과 무의식을 짚어낸다. 그들은 마치 병명을 모른 채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처럼 동시대의 치부를 개성적 상황으로 제시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2000년대 활동하는 작가들이 자기들 스스로를 ‘소수자’ 혹은 ‘여성’으로 칭한다는 사실이다. 황병승만 해도 그렇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화자들은 상징계적 그물에 걸리지 않는 그 무엇이거나 ‘여성’으로 부를 수 있는 무엇이다. 이러한 태도는 질서가 된 기존의 문학적 역사를 못된 아버지 대하듯 위반하는 새로운 소설가들에게도 발견된다.

필자를 비롯한 허윤진, 차미령, 정여울, 양윤의와 같은 젊은 여성 평론가들은 이러한 징후를 동시대적 맥락 속에서 파악해낸다. 우리에게 ‘여성’은 문학을 대하는 태도다. 우리는 ‘여성’을 소수자로서의 징표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한 성적 구분으로 여긴다. 우리는 여성-문학이라는 협의를 벗어난 ‘문학’과 접촉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문학을 소수자로 가늠하는 태도와도 연관된다. 젊은 여성 평론가들은 자신들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문학적 자의식을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조건보다 전치한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보다 20세기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 놓인 젊은 평론가로서의 문학적 자의식을 먼저 가졌다는 뜻이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성평론가들은 만성적 문학 위기론의 끄트머리에서 등단했다. 1990년대의 문학평론은 문학의 위기와 죽음을 기정사실화 한 후 위기론 자체를 반복해온 경향이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시와 소설은 문학의 전통적 가치와 의미를 훼손하는 대중적이며 상업적인 결과물들로 취급됐다. 문학이 죽었다는 소문이 횡행했던 1990년대 문학을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태도는 문학의 주체로서의 여성에 대한 불편함을 암시한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여성 평론가들은 만성적 위기론 자체를 부인했다. 그들은 문학이 죽은 것이 아니라 ‘오래된, 문학’이 죽고 새로운 문학이 탄생했음을 고지했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여성 평론가들은 달라진 동시대의 형편을 문학 내부뿐만이 아닌 외부의 시각에서 들려주기 시작했다. 기존의 전통적 문학관에 따르자면 ‘문학도 아닌 것’, ‘문학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야 말로 문학이 진화한, 새로운 동시대적 산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결과물로 재해석된 것이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기존의 문학과 결별한 새로운 문학을 발견하고, 호명한 주체들이 바로 2000년 이후 등장한 젊은 여성 평론가들이다.

문제는 소수자로서의 자의식을 문학 주체적 자의식으로 교체한 여성 ‘평론가’들에게 여전히 ‘여성성’으로 회귀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다. 이 음성은 계몽적 어투로 담론의 부재라는 윤리적으로 너무도 온당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는 새로운 문학의 등장을 기본도 갖추지 못한, 수준 미달의 실험으로 폄훼하는 권력화된 목소리와 닮아 있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담론의 부재라는 오래 묵은 비관론이 등장한다. 진정한 시나 소설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평론 역시 죽었다, 라는 우회적 조소가 나타나는 것이다. 한 때 비평가는 삶을 조형하는 ‘사적 교사’이자 ‘지식인’의 역할을 자임했다. 이 때 비평가는 작품을 읽고 공명하는 일차적 독자라기보다는 공적 권력가에 가까워진다. 2000년 이후 등단한 젊은 여성 평론가들이 무관심한 것이 있다면 문학 담론이 아니라 문학 자체를 벗어난 문학이다. 문학은 여전히, 아직도 더 ‘문학’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시와 소설들이 ‘시와 소설’을 죽이면서 등장했다면 평론 역시 우리가 알고 있었던 고전적인 ‘평론’을 지우면서 문학 비평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새로운 비평들은 심인성 불치병을 앓고 있던 문학에 여러 가지 갱생의 회로를 제공하고 있다. 가령, 허윤진은 비평문이 갖는 도식적 관습을 정면으로 배반함으로써 ‘평론’의 에피스테메를 교정하려 한다. 그리고 정여울은 대중문화와 문학의 경계를 지우면서, 세상에 대한 낯선 태도의 견지가 곧 문학적 자의식임을 보여준다. 이는 새로운 서정을 ‘서정의 매트릭스’에 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인 김수이의 평론에서도 발견되는 태도다.

새로운 평론들은 비평 자체를 하나의 문학 텍스트로 격상하기 위해 고심 중이다. 여성 평론가들은 애초부터 문학의 죽음과 무관하게 문학의 영역에 발을 내밀었는지도 모른다. 단언컨대 새로운 평론가들이 있을 뿐 ‘여성’ 평론가는 없다. 이는 남성 평론가의 자의식과 같은 말이 비문 취급당하는 도착과도 연관된다. 만일, ‘여성-문학’이라는 용어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여성만이 욕망을 횡단할 수 있듯이 ‘여성’만이 문학을 횡단할 수 있다는 뜻일 테다. 문학이 ‘여성’이 돼야만 하는 이유이다.

강유정 / 고려대·문학평론가

필자는 고려대에서 「1960년대 소설의 나르시시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오이디푸스의 숲』 등의 비평집이 있으며,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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