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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꿈과 역사의 아이러니
‘대왕’의 꿈과 역사의 아이러니
  • 이남재 / 한국교원대·음악학
  • 승인 2008.06.2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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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재의 ‘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 ]11. 프리드리히 2세의 베를린 오페라 개장

1742년 12월 7일 아직 채 공사가 마무리되지 못한 베를린 오페라 극장 무대에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정 악장 카알 하인리히 그라운이 작곡한 오페라 「클레오파트라와 체자레」가 올려졌다. 유진 헬름의 「프리드리히 대왕 궁정에서의 음악」에 의하면 “외부 장식도 없었고, 곳곳이 공사 중이며, 영구적이 아닌 임시 설비가 많은데다가, 첫 관객들은 건설 자재가 적재된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극장을 그득 메운 사람들에게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대에는 그라운이 이태리를 직접 방문해 초빙해 온 가수들과 프랑스 사람들로 구성된 발레단, 그리고 왕세자 시절부터 키워온 앙상블이 핵심을 이룬 독일 연주자 위주의 관현악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지휘자의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무대와 가까웠던 로얄 박스에는 1차 슐레지아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갓 서른의 젊은 왕 프리드리히 2세가 뿌듯한 표정으로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 프리드리히 2세가 건립한 베를린 오페라 극장의 모습

베를린에서 오페라가 마지막으로 공연된 것이 프리드리히 2세의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 시절이었으니, 거의 30년 만에 자신이 건립한 극장에서 처음 상연되는 오페라를 바라보는 프리드리히 2세가 뿌듯하게 느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자신이 처음 오페라를 접했던 것은 왕세자 시절인 1728년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따라 드레스덴 궁정을 방문했을 때였다. 이때 보았던 오페라는 한때 하세의 「클레오피데」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태리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펼치던 하세가 드레스덴 궁정을 위한 첫 오페라 「클레오피데」를 무대에 올린 것은 1731년의 일이었기에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러한 착오는 프리드리히 2세 자신이 하세의 「클레오피데」를 베를린 오페라 무대에 올리도록 한 데다가, 아리아 한 곡은 플루트를 위해 편곡했고, 심지어 경험이 모자란 가수에게 아리아에 장식을 넣어 부르는 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는 기록에 기인한 것으로 짐작된다. 「클레오피데」는 당시 오페라 대본을 뜻하는 드라마 페르 무지카의 최고 인기 작가로 명성을 떨치던 메타스타지오의 「인도의 알렉산더 대왕」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서 헨델 역시 같은 작품에 기반한 오페라 「포로」를 런던 무대에 올린 바 있었다. 하세가 오페라 제목을 포로의 상대역인 「클레오피데」로 붙여 주인공으로 삼은 데는 자신과 갓 결혼한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 파우스티나 보르도니를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왕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시작한 극장 건축

키가 육척이 넘는 거인들로만 이루어진 근위대를 거느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군인 왕’이라는 별칭이 붙었던 프리드리히 왕세자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왕위 계승 후 궁정 음악가들을 해고해 버렸을 정도로 심각했던 이러한 거부감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대 의상을 입고 오페라와 발레에 참여해 사람들 앞에 나서야 했던 뼈아픈 기억이 깔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할아버지의 예술적 감각을 물려받은 자신의 맏아들을 ‘플루트나 부는 여성화된 낙오자’라고 깔보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강압을 견디다 못한 프리드리히 왕세자는 1730년 마침내 두 군대 친구들과 함께 탈영을 도모한다. 모의가 발각돼 감옥에 갇힌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눈앞에서 연인이자 친구인 카테 중위의 목이 잘리는 모습을 직접 목도해야만 했다. 이후 아버지에게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게 된 왕세자는 1732년 룹핀에서 음악가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1736년 자신을 위해 새로 건립한 라인스베르크의 궁전으로 옮긴 후에는 17명으로 구성된 뛰어난 실내악단을 유지했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다. 그러나 왕세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장차 자신이 건립할 오페라 극장에 대한 구상이 날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1740년 아버지의 서거로 마침내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가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꿈을 구체화 하는 것이었다.

극장 설계와 시공은 라인스베르크 궁전을 건축했던 크노벨스도르프에게 맡겨졌다. 그가 한 베를린 신문에 쓴 기사에 의하면 “기둥들이 늘어선 극장 전면에 라틴어로 ‘아폴로와 뮤즈들의 왕 프리드리히’라고 새겼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 자신은 오스트리아의 어린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슐레지아를 탈취하기 위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갔으나, 전장에서도 오페라 극장 건축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점검하고 모든 세부 사항에 대해 직접 지시를 내릴 정도로 오페라 극장 건립에 온 힘을 기울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오페라 극장은 한 세기를 겨우 넘긴 1843년 화재로 소실됐고, 이후 재건축된 건물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번이나 파괴됐으나, 1955년 프리드리히 대왕이 지은 원형대로 복원됐다. 이때 복원을 주관한 동독 정부가 프리드리히 대왕을 기리는 위에 소개한 문구를 지우고 크노벨스도르프의 업적을 새겨 넣도록 조치하는 바람에 음악 감독으로 계약했던 에리히 클라이버가 사임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봉건절대군주인 ‘대왕’보다는 ‘노동자’인 건축가를 내세우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분출된 해프닝이었지만, 크노벨스도르프 자신이 작위를 받은 귀족이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마저 느끼게 된다.

1742년의 개장 이래 프리드리히 대왕의 오페라 극장은 1756년 다시 오스트리아와의 칠년 전쟁의 발발로 위축될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그 중에서도 1755년 초연된 「몬테주마」는 신대륙을 배경으로 한 주제와 더불어 프리드리히 대왕 자신의 프랑스어 시나리오를 번역한 이태리어 대본을 바탕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롭다. 이미 언급했듯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페라의 모든 사항에 대해 세부에 이르기까지 직접 간여했고, 특히 주제 선택은 오로지 그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프랑스 비극에 바탕을 둔 대본들의 비중이 유난히 높았던 것 역시 그의 취향 때문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체자레」의 대본도 피에르 꼬르네이유의「폼페이의 죽음」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1724년 초연된 헨델의 「줄리오 체자레」를 위해 하임이 쓴 대본과 닮은 점도 상당히 많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통치 하에 있던 할레 출신으로 런던에서 활동하던 헨델보다 자신의 궁정악장으로 거느리고 있는 그라운의 음악이 더 탁월하다는 언급을 남겼는데, 이러한 의견이 얼마나 진솔한 것인지 궁금하다. 실제로 프리드리히 2세가 작곡한 플루트 협주곡과 교향곡들을 들어보면 헨델의 명확하지만 날선 성격 표출보다는 원만하고 부드러운 중용의 테두리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 그라운의 음악과 닮아 있어 그의 의견이 왜곡된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왕세자 시절부터 서신을 교환했으며 1750년부터 53년까지 왕의 궁정에 머무르기도 했던 볼테르가 프리드리히 2세를 ‘대왕’이라고 부른 진의를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 호칭이 후대에까지 이어졌다는 것만으로도 프러시아 역사에서의 그의 비중을 헤아릴 수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가 처한 역사적 한계를 암시하기도 하는데, 한 예로 오페라 극장에 뒤이어 1747년 완성된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은 이미 프랑스에서는 유행이 지나버린 1720년대의 건축 양식으로 건립됐다고 한다.

이처럼 유행이 지난 양식을 뒤늦게 받아들이게 되는 일은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려면 어쩔 수 없이 겪는 현상으로, 프리드리히 2세의 오페라 극장 프로젝트 역시 당시 오페라 세리아의 흐름에 합류하려는 뒤늦은 몸짓으로 읽혀질 수 있다. 마이클 탤벗은 “18세기 이태리의 후진성과 음악의 뛰어남은 둘 다 봉건적 사회관계가 지속됐다는 데 그 근본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귀족 사회가 점차 해체되기 시작하기는 했으나 시민 사회가 자리 잡는 것은 아직 한참 후의 일이었기에, 귀족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교회 기부, 오페라 후원 및 음악가들을 고용함으로써 계속 음악이 번성하는 경제적 뒷받침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행 지난 양식을 받아들인 까닭

이러한 오페라 후원의 대열에 뒤늦게 뛰어들기는 했으나, 프리드리히 2세가 프랑스 비극에 바탕을 둔 대본을 선택했던 것 자체가 이미 메타스타지오로 대표되는 드라마 페르 무지카의 경직성에 대한 반발로도 이해될 수 있는데, 이는 추후의 오페라 개혁과도 맥이 닿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의 절정에 있는 글룩의 오페라들은 비엔나와 파리에서 대성공을 거뒀다. 이 두 도시가 바로 프리드리히 대왕이 극복하려고 그토록 애썼던 합스부르크와 부르봉 왕조들의 수도였다는 점에서도 역사의 아이러니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한국교원대·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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