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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낯익은 1960년대 장르들의 반복과 복제
너무나 낯익은 1960년대 장르들의 반복과 복제
  • 교수신문
  • 승인 2008.06.2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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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 표류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컨템퍼러리 아트가 표류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초부터다.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신분이 특정한 훈련을 통해 고유한 영역을 점하게 된 전문가란 인식을 부정했을 때, 혹은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반드시 받아야 할 훈련이란 없음을 알고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에, 그때부터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런 자의식은 1960년대 시대정신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 초는 외적으로 평화와 부의 시대였지만 이면에는 정치적·사회적 병폐의 기미가 다분했다. 1960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데모하던 학생들이 무장한 경찰관들의 공격을 받았으며, 1963년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 백인과 흑인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밥 딜런의 저항 노래는 불평에 가득 찬 젊은이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정부는 은밀히 더 많은 군사적 조력자들을 남베트남으로 보내 북쪽의 공산주의 침략자들에 대항하게 했다. 베를린에는 1961년 장벽이 세워져 독일을 둘로 나눴다. 평화와 부 그리고 분노의 분위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에 반발했고, 이는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

실재와 외양의 불일치에 대한 반발이 미국과 영국에서 팝 아트를, 유럽에서 누보레알리슴을 생산했는데, 명칭만 다를 뿐 유사한 이런 운동의 배경은 해방이었다. 이 운동의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로서 그는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누상자인 브릴로 상자를 모사하여 1964년 봄에 화랑에서 선보였다. 실재와 외양에 있어 진부한 비누상자에 불과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미술품으로 바라봤으며, 이는 미술품이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것을 입증했다. 해방과 관련해 1964년에 괄목할 사건이 많이 발발했으며, 비틀즈가 에드 설리반 쇼를 통해 미국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미국 전역과 곧 이어 전 세계를 휩쓴 해방정신의 상징이자 촉매가 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미술품은 더 이상 실재의 그림자나 실재의 모방이 아니라 실재 자체라는 인식이 1960년대에 보편화됐다. 아티스트들은 더 이상 소수의 엘리트들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지 않고 대중을 위해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진부한 매체들을 선호했다. 그리고 대중이 미술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복제를 통해 다량 생산했다. 그들은 모든 매체를 받아들였고, 버려진 산업폐기물과 쓰레기소각장에서 처분을 기다리는 물질들로 작품을 제작했으며, 자신의 몸을 재료로 사용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배설물까지도 미술품의 재료로 사용했다.

우리가 현재 미술관과 화랑에서 접하는 대부분의 작품 형식이 1960년대에 만들어졌다. 고도의 자의식 운동인 팝 아트와 누보레알리슴을 시작으로 1970년대 개념이 미술가들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해방의 무드가 다양한 장르들을 생산해냈는데, 아상블라주와 정크 아트, 펑크 아트, 설치, 키치, 시추에이션 아트, 비디오 아트, 해프닝, 퍼포먼스 아트, 바디 아트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성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컨템퍼러리 아트는 1960년대에 생산된 장르들의 혼재 현상에 불과하며, 수준에 있어 1960년대에 머물고 있다. 그 시대의 다양한 아트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컨템퍼러리 아트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아울러서 질이 매우 저하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념의 해체를 시도하는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띠지만 이 역시 1970년대의 개념미술에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오브제와 개체들이 미술품 내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하나가 복제들을 대량 생산하고, 반복과 복제가 의미의 대상, 혹은 기호를 소멸시킨다.

팝 아트의 전형인 키치 아티스트들은 기분 전환을 위한 오락에 굶주린 대중, 혹은 감상적 자기 향락을 좋아하는 대중을 위해 문화의 질이 낮고 인습적인 가상 실재를 그대로 소재로 이용하고 있다. 키치는 복제를 통해 늘어나고 있는데, 복제를 통한 키치의 생산은 워홀에 의해 이미 극단적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그는 1963년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전시회에 대응해 이 유명한 작품을 서른 번이나 복제하면서 ‘기술복제시대의 미술작품’을 양산했다. 실크스크린 인쇄방식을 사용했으므로 그의 키치는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으로 각광받았다. 그의 복제화는 원화와의 관계에 질문을 던질 뿐 아니라 미술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한 당시의 관습에 이의를 제기했다. 워홀은 “서른 개가 하나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복제를 하게 되면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는가 하는 것인데, 라스코 동굴화의 복제화에서 사람들이 원화와 같은 체험을 하는 데서 복제에서도 원화가 지닌 예술성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입증됐다.

복제가 용인되자 만화, 광고, 낭만을 특징으로 하는 키치 아트가 등장했으며, 이는 팝 아트가 통속적인 회화세계를 다루고 원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는 데서 더 나간 것이다. 예술에서의 엘리트주의를 철저히 배척한 제프 쿤스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하는 작품만을 제작한다. 「진부함의 도래」는 어린 천사가 목에 리본을 두른 분홍색 암퇘지를 예술로 끌어들이는 장면이다. 쿤스는 진부한 것, 즉 키치를 예술로 끌어들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하지만 내 마음에 들어’ 하는 반응을 유도한다.

유머와 아이러니는 키치 아트의 생명이다. 그만큼 대중이 키치를 사랑하고 애호하기 때문에 이런 예술이 생겨난 것이다.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좋은 취향이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오늘날 사람들은 키치를 진지한 미적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촌티패션, 찢어진 청바지, 배꼽티, 복고열풍을 통한 값싼 재료로 모조한 옷들이 키치에 속한다. 음악에서의 웅얼거림, 무의미한 소리가 키치에 속한다. 사람들은 본래 금지되었던 것, 감동적인 것, 나쁜 취향을 즐길 줄 알게 된 것이다.

키치 아트가 팝 아트의 변종으로 나타난 것을 제외하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성행하는 미술은 1960년대 이미 생산된 장르들의 혼재에 불과하므로 컨템퍼러리 아트는 거의 반세기 동안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김광우 / 미술평론가

필자는 뉴욕 시티칼리지와 포담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주요저서로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  『프랑스미술 500년』, 『백남준 VS 앤디 워홀』,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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