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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在이면서 유령인 ‘사이’의 사유 또는 주변자의 윤리학
不在이면서 유령인 ‘사이’의 사유 또는 주변자의 윤리학
  • 민승기 / 경희대·영문학
  • 승인 2008.06.2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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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빈 중심-예술과 타자에 대하여』 박준상 지음|그린비|2008

□  서평자인 민승기 교수는  책 표지 장정에 시선을 모은다. ‘빈중심’이라는 글자 사이에 검은 먹으로 짙게 놓인 하나의 원이 원심력을 일으키고, 맨 끝에 ‘박준상 저’가 새겨져 있다. 이것이야말로 ‘관계’의 표상이라는 지적이다.

『빈 중심』, 흰 바탕위의 검은 얼룩, 중심은 얼룩으로 존재한다. 앞표지의 얼룩은 어느새 커져있다. 부분으로 존재하던 얼룩이 뒷표지에서는 전체로 바뀌어 있다. 감염. 얼룩은 세계를 감염시킨다. 아니 ‘우리’가 이미 세계 ‘속’에 또는 서로에게 ‘감염’돼 있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전체보다 큰 부분. 빈 중심은 거울의 투명함을 일그러뜨리는 얼룩(부분)인 동시에 투명함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전체)이기 때문이다.

거울의 기원이 거울 속에서 드러날 수 없는 어둠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검은 얼룩. 명증한 이미지를 제공해주어 나르시수스의 자기인식을 가능하게 했던 연못은 이제 블랙홀이 돼 나르시수스 자신을 눈멀게 한다. 얼룩은 바라보는 나를 눈멀게 하는 타자이다. 우리는 이미 얼룩 속에 들어와 있고 얼룩에 의해 감염돼 있다. 얼룩은 얼룩을 대상으로 바꿀 수 있는 재현적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 동시에 우리가 바라보기도 전에 이미 우리를 보고 있다.

 

우리를 ‘노출’시키는 빈 중심 또는 타자. 예술과 타자에 대하여. 그러나 이 책은 예술과 타자를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 거리가 불가능함을 증언한다. 예술과 타자에 감염된 채 이미 그 속에 들어와 있는 우리는 예술과 타자에 ‘대하여’ 쓸 수 없다.

불가능한 글쓰기. ‘예술과 타자’라는 부제는 이 책의 1부와 2부를 나누고 있지만 정작 예술과 타자의 동시성(‘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학과 음악적인 것」이라는 짧은 글이다. 마치 빈 중심처럼 「문학과 음악적인 것」은 예술‘과’ 타자를 연결해 예술이란 타자를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저자는 문학이 ‘인간행동에 대한 연극적, 음악적 모방’이라는 데 주목하고 ‘몸짓, 손짓, 얼굴, 목소리, 숨결’(121)들을 통해 드러나는 문학의 정치성과 윤리성을 말하고자 한다. 언어의 개념화에 이르지 못하기(less than) 때문에 언어를 능가하는(more than) 신체적 움직임들은 ‘음악적 기표’(1장)나 ‘문자의 목소리’(2장)이다. 그것들은 형상(이미지)없는 음악이요, 현전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자의 목소리’로 드러난다.

말라르메(St´ ephane Mallarm´ e)가 보여주는 것처럼 문학의 목소리는 차라리 ‘침묵의 목소리’(3장)이며 인간적인 것의 결핍을 지시하는 ‘동물의 목소리’(4장)이다. 이미지로 고정되거나 개념들로 정식화할 수 없는 움직임 또는 목소리들은 ‘저자와 독자가 지배할 수 없는 타자의 공간’(120)을 연다.
사실 플라톤이 두려워하는 것은 변신의 가능성이다. 문학 속에서 변신은 규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저자나 독자 모두를 분열시키는 제3의 공간을 개시한다.

더욱이 열림은 ‘자기력에 의한 이끌림’(122)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끌림은 청중을 ‘자신의 바깥’으로(122) 끌어내는 힘이며, 이제 미메시스는 메텍시스(타자에의 참여)로 기능해 이질적이고 낯선 것을 의식 속에 가져다 놓는다. 플라톤이 추방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정치성이며 감염을 통한 타자에의 오염이다.

 

비극이 보여주는 문화 ‘바깥’의 경험. ‘문화의 세계와 완전히 동일화 할 수 없고 거기서 완벽한 정체성을 소유할 수도 없는’(130) 주체가 바로 주변자(2부, 1장)이다. 그러나 주변자는 비극적 ‘영웅’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주변자는 나와 타인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제3의 공간, 나와 타인의 기원인 동시에 나와 타인 모두를 분열시키는 타자성의 공간에 참여하는 자이다. 영웅적 희생이 아닌 고통과 눈물, 슬픔이라는 비영웅적 공간에 참여할 때 비로소 정립되는 주체가 바로 주변자이다. 이것이 저자가 5·18을 ‘사건’으로 지시하는 이유다. 재현될 수 없는 몸의 현전, 침묵의 절규에 참여하는 사건(2부, 2장). 세계의 무의미와 마주하고 있는 주변자가 바로 ‘타자’이다(2부, 3장). 이렇듯 「문학과 음악적인 것」은 1부와 2부를 분리하는 동시에 1부와 2부가 이미 겹쳐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첩과도 같은 글이다.

박준상 저. ‘나는 철학도 문학도 아닌 공간을 탐구해 왔다’고 고백하는 데리다(Jacques Derrida)처럼 저자 역시 예술과 철학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주변자이다. 『바깥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이라는 첫 번째 저작이나 『빈 중심』과 같은 두 번째 책에서도 바깥이나 중심은 대칭적 개념이 아니다.

바깥은 안과 대립되는 절대적 이질성을 뜻하지 않으며 빈 중심 역시 충만한 현전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니다. 비어있음은 부재나 결핍이 아니라 불가능성이다.
얼룩이 불가능한 이유는 바깥이 이미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바깥은 이미 안의 안이며 얼룩은 안이자 바깥이다. 다시말해 안과 밖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이’, 안이자 바깥이며 안도 밖도 아닌 사이 공간이 바로 빈 중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빈 공간은 단순히 부재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부재인 동시에 유령이다. 부재는 현전과의 대립에서만 의미가 발생하는 반면 유령은 이미 삶과 죽음의 대립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목소리’(1부, 4장), ‘침묵의 목소리’(1부, 3장)는 정확히 말해 인간도 동물도 아닌 유령의 목소리, 현전도 부재도 아닌 침묵 다시 말해 사이공간의 귀환을 다루고 있다. 사이공간은 ‘관념 이전의 숨결이 감지되는, 나와 네가 아직 구별되지 않는 익명성의 장소이다(217).

 

익명적 존재자들은 모두 탈존(ex-istance)이자 외존(ex-position)의 방식으로 현상한다. 탈존이란 ‘외부의 공간으로 열릴 수 밖에 없는 필연성’이며 외존은 ‘외부의 타인으로 열려 있는 사건’을 지시한다(220). ‘우리’는 타자를 배제하는 동일한 전체가 아니라 탈존과 외존의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공동의 존재 양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나와 타자의 구별에 기초한 정치학과 윤리학 모두가 결핍을 드러낸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윤리학은 동일자의 정치학에 반대해 타자성의 윤리학을 개시하지만,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타자의 절대성은 여전히 나와 타자의 대립에 기초하고 있다. 타자에의 도달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비대칭성’은 내가 타자일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해 사이공간을 여전히 억압하고 있다. 

나와 타인이라는 명사적 두 항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 동사적 사건을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223). 헤겔을 나르시시즘의 절정으로 파악하면서도 여전히 헤겔적 인륜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김상봉 교수 역시 탈존과 외존의 공동체인 ‘우리’를 간과하고 있다.

그에게 ‘우리’는 객관적 공동체일 뿐이며 너와 나의 인격적 만남을 주장하는 ‘서로주체성’은 여전히 ‘우리’의 지평을 선취한 나일뿐이다(169). ‘우리’ 자체가 배제되거나 단지 나의 확장으로 간주될 때 저자는 헤겔과 레비나스의 ‘사이’, 동질성과 이질성 둘 다의 결핍을 지시하는 익명적 ‘우리’로 돌아간다. ‘나나 타인에게 귀속될 수 없는 공동의 부분, 동사적 탈존과 탈존이 부딪히고 겹치는 익명의 공간’(235)이 바로 ‘우리’이다. ‘우리 모두가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어느 누구도 ‘나’라고 말하지 못하는 ‘비분리의 영역’(232)에서 고통과 죽음에 참여하는 무력한 몸들의 울부짖음이 5·18이라는 사건이다. 타자로서의 ‘우리’는 관념화할 수 없는 형태로 이미 항상 도래해 있지만(197)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남아있다(133). 윤리 ‘이하,’ 또는 윤리 ‘이전’의 자기력에 따라 인간들이 제 3자로 전환되면서 형성하는 ‘사이’(126)에 참여할 때 주변자의 윤리학이 시작된다.

민승기 / 경희대·영문학

필자는 경희대에서 ‘데리다와 타자’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깡의 재탄생』(공저),  번역서 『우리시대의 욕망 읽기』 등의 저서가 있다. 「눈먼 나르시수스」, 「지젝- 라캉과헤겔 사이」 등의 문제적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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