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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사은회와 망년회
[딸깍발이] 사은회와 망년회
  • 교수신문
  • 승인 2001.12.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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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6 21:11:45
사은회는 해마다 이맘때 겪는 거북한 통과의례였다. 다른 대학의 사정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근무하는 이 나라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에 있는 대학의 경우 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이 뻔한데, 번듯한 음식점으로 ‘모심’을 당할 때는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근년에는 취업 사정이 어려워져서인지 사은회 자리에 빠지는 학생들이 많아서 참석한 교수와 학생의 수가 비슷한 민망한 일도 생겨났다.

또 졸업 무렵이 되면, 高麗葬에서 알 수 있듯 조선시대 이전에는 은혜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둥, 감사할 줄 모른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는 둥 하면서 가르침을 빙자하여 사은회를 종용하기도 했지만, 내가 ‘은혜’로 불릴 가르침을 저들에게 베풀기는 했는가 하는 자괴감이 앞섰다. 게다가 4년 동안 대학에 다니면서 ‘실력 없는’ 내 강의는 한번도 듣지 않은 학생들까지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다’고 노래할 때는 은근히 솟아나는 부아를 근엄하면서도 자애롭고 흐뭇한 표정 뒤로 감춰야 했다.

그 사은회를 드디어 올해에는 하지 않고 넘어갔다. 과대표라는 학생이 뒤늦게 찾아와서 송구한 목소리로 ‘사은회 일정을...’이라며 쭈뼛거릴 때, 같은 학과의 친한 동료교수와 입을 맞춰 ‘망년회들’을 핑계로 무산시킨 것이다. 왜 우린들 가르쳐 내보내는 제자들과 격식 있는 자리를 열고 서로를 가슴속에 다시 새기는 일을 마다하겠는가만, 취업 전쟁의 와중에서 어깨 처진 저들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어떻게 웃으며 마주볼 수 있단 말인가. 또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풀죽은 채 ‘사은’을 준비해야 할 저들의 마음 고생은 또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보지 않는다고 있는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견기업의 중견간부로 있는 친구에게 취업을 부탁하는 전화를 걸었다. 당장의 실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경력자를 쓰지 대졸자는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회사는 내일은 생각하지 않느냐는 나의 목소리 높아진 반문에, 오늘의 내 자리가 불안한데 회사의 내일까지 걱정할 수 있느냐고 그는 미안해했다.

청년실업난 해소를 위해 ‘교육부는 100대 기업에 공문을 보내 채용규모의 확대와 지방대생 및 여학생에 대한 차별 폐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아마도 기업들의 반응은 내 전화에 대한 내 친구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비아냥거렸을 것이다. 만인을 만인에 대한 늑대로 만드는 시장의 논리를 정정해야 할 정부가 냉혹한 시장에 자비를 구하다니.

이런 무능한 정부는 묵은해와 함께 가고 새해에는 고용을 창출하여 내 제자들의 어깨를 펴주는 정부가 오기를. 送舊迎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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