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6:40 (토)
찰나의 회화성, 전설이 된 포토저널리스트
찰나의 회화성, 전설이 된 포토저널리스트
  • 배원정 기자
  • 승인 2008.06.09 16: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결정적 순간’의 미학,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람의 시선과 동일한 50mm 렌즈와 소형 라이카 카메라로 어떤 보조 기구나 연출 없이 ‘결정적 순간’을 노렸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1908~2004). 자연광만을 이용하고 플래시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진을 잘라(트리밍) 구도를 바꾸는 행위만큼은 철저하게 거부하며 흑백사진만을 고집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화로 인해 전 국민이 포토그래퍼를 자청하는 요즘, 사진은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온 세상의 사진이 모두 다 예술적 완성도를 갖춘 것은 아닐 터. 어떠한 기교도 부리지 않으며 “사진은 순간으로 승부한다”고 말하는 그의 사진에 대한 기본적 시각은,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순간의 진실을 낚아채는 ‘빛·구도·감정’의 일치

브레송은 20세기 다양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세상에 대한 증거를 남겼다. 거리사진부터 보도사진, 인물초상사진 등 장르를 불문한 그의 작품은 ‘결정적 순간의 미학’, ‘리얼리티의 미학’, ‘동양적 미학의 산실’이란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네모난 카메라의 네모난 프레임을 통해 세상과 일치하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그는 세상과의 소통을 꾀한다. 물 위에 떠 있는 남자와 물에 비친 남자의 그림자 대비를 순간적으로 잡아낸 「생 라자르역 뒤에서」는 그의 ‘결정적 순간’을 대표한다. 정말 ‘결정적인’ 것은 사진 배경의 생 라자르역 담벼락에 붙은 발레 포스터 속 댄서와 남자의 동작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 브레송은 1908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났다. 라이카 카메라를 처음 접한 후 그것을 ‘사람의 눈의 연장’이라 부르며 평생 라이카만을 사용했다. 초기(1930-36)에는 스냅샷을 주로 사용했으며, 형식미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중기(1937-38)에는 내용과 형식의 밸런스 등 유기적 관계를 면밀히 다뤘다. 1936년 봄에 프랑스 잡지사에 응시했다가 낙방한 바 있으며, 2차 대전 중 프랑스군에 징집되어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2번 탈주를 시도했으나 3번째 성공했다. 종전 후 우연히 파리의 한 주점에서 로버트 카파와 데이비드 시모아를 만나 1947년 뉴욕에 매그넘이란 사진통신사를 창립했다. 그 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2개월 동안 161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어 큰 명성을 얻었다. 『브레송 사진집』, 『결정적 순간』, 『발리섬의 춤』, 『또 하나의 중국』 외 다수의 책을 발간했다.

 

‘결정적 순간’은 이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미학을 대표하는 고유 형용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결정적 순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결정적인 ‘사건의 순간’ 하고는 차이가 있다. 영국 조지 6세의 대관식에서 찍은 사진은 그가 생각하는 결정적 순간의 개념을 쉽게 풀이해 준다. 모든 사진 기자들이 왕관을 넘겨주는 모습에 ‘결정적 순간’을 부여했는데 반해, 그는 종이 쓰레기 위에 만취한 상태로 쓰러져 있는 취객과 그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모습에 결정적 의미를 던졌다. 대상과 촬영자의 내부의식이 일치된 순간이라면 그에게는 카메라 셔터를 누를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만약 그의 사진을 감상할 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현실인데도 현실과 다른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가 말하는 결정적 순간이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나와 대상, 그리고 카메라의 정신적 교감이 일치를 이뤘을 때 찍은 ‘순간의 찰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브레송 사진의 핵심 개념은 ‘찰나’이다. 사진평론가 신수진은 “브레송은 영상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 사진의 기본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그와 같은 완결된 사진 이미지를 통해 우리시대의 시각언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교육적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브레송 사진의 이미지는 매우 평면적이다. 안정적이고도 편안한 구도가 형성된 작품에는 이미지의 내용까지 더해져 그의 사진을 언뜻 보면 고전적 회화작품이 연상된다. 실제로 브레송은 1970년대 이후부터 타계 직전까지 자연을 대상으로 드로잉을 즐겨 그리며, “자연을 스케치하는 것은, 자연을 통해서 명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 공부를 한 것은 사진 촬영에 있어 화면 구성에 도움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작품이 갖고 있는 이러한 회화성과 철학성은 다양한 화면과 장르로 이어져 그를 평가하는 의견도 저마다 다르다.  

고전적 회화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평면성

임영균 중앙대 교수(사진학)는 “브레송은 다큐멘터리 작가”라고 말한다. 보도사진은 신문잡지에 보도를 목적으로 하지만, 다큐 사진은 시대적인 안목을 가진 좀 더 개인적인 사진으로, 그의 작품이 예술성을 인정받아 194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는 사실 등은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것. 반대로, 박주석 명지대 교수(사진기록학)는 “그의 작품이 언론사나 통신사 등 매체의 지시를 받고 찍은 사진들인 만큼, 그는 전설의 포토 저널리스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은 현대사진의 제2세대로 분류되는 리 프리들랜더, 게리 위노그랜드 등에게 계승되어 보다 현대성에 충실한 ‘새로운 결정적 순간’의 미학으로 개척됐다.

사진평론가 신수진은 “브레송의 사진은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묘사를 위주로 한 근대 사진의 한계성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현대 사진은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기반으로 색에 대한 해석과 아이디어를 전달해야 하는 지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신경철 광주대 교수(사진학) 역시 “근대 사진미학을 완성한 그의 ‘결정적 순간’을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해체시키려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현대사진의 등장이후 이미 시작된 ‘결정적 순간’의 개별화, 다양화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전개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배원정 기자 wjbae@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