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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이목, 바로크 오페라의 꽃에 쏠리다
유럽의 이목, 바로크 오페라의 꽃에 쏠리다
  • 이남재/한국교원대·음악학
  • 승인 2008.06.09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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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재의 ‘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 ]<10>헨델의 「리날도」와 오페라 세리아

 “그대, 심연의 거대한 힘으로 나를 계율의 천국에서 끌어내려 영원한 고통의 지옥으로 떨어뜨렸네”란 애통한 가사로 시작하는 ‘울게 하소서’는 ‘라르고’와 더불어 헨델의 작품 중 우리 귀에 가장 친숙한 곡이다. 사라방드의 기품 있는 춤곡 리듬에 실린 이 감동적인 아리아는 오페라 「리날도」에 등장하는 알미레나가 부르는 곡이다. 「리날도」는 륄리의 「아르미데」와 마찬가지로 타소의 「해방된 예루살렘」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륄리의 서정 비극에는 알미레나가 등장하지 않아 자연히 알미레나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우선 알미레나는 제1차 십자군의 사령관 고프레도의 딸이자 리날도의 약혼자이며, ‘울게 하소서’는 자신을 납치한 예루살렘의 이교도 왕 아르간테가 알미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자신을 풀어주거나 아니면 울게 내버려두라고 호소하는 노래라는 것부터 알아두자.  전형적인 다카포 아리아인 이 곡의 단조로 바뀐 중간 부분에서 알미레나는 첫 부분의 기품 있는 겉모습 아래 억눌러온 ‘슬픔’과 ‘고통의 사슬’을 얼핏 드러내지만,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첫 위엄을 되찾는다. 영화 『파리넬리』에도 삽입돼 더욱 널리 알려진 이 곡은 알미레나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절도 있는 리듬 아래 감추어진 감동은 자연히 이를 작곡한 헨델과 그의 오페라를 둘러싼 주변 여건에 대한 관심을 유발한다.

위엄서린 알미레나의 감동이 환기하는 것

「리날도」는 메리 여왕의 뒤를 이어 앤 여왕이 통치하던 1711년 런던의 퀸즈 극장에서 초연됐다. 대본은 극장 매니저 아론 힐의 초벌을 지아코모 롯시가 이태리 운문으로 옮겼는데, 그 서문에서 힐은 이전의 이태리 오페라들은 영국 무대를 위해 작곡되지 않아 취향과 목소리가 맞지 않았고, 기계와 무대 장치가 없거나 허술해 보는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서문이 반어법적으로 강조했듯 런던을 위해 특별히 작곡됐고, 힐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무대 장치가 곁들여진 헨델의 첫 런던 오페라 「리날도」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어 1731년 개작된 후에도 계속 공연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리날도」이전의 런던 오페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기에 힐이 그런 언급을 했을까. 1695년 퍼셀의 죽음으로 자국민에 의한 영국 오페라의 맥이 끊긴 이후 런던 무대는 외국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태리 오페라가 점차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퍼셀 생전에도 이미 이태리 성악가들이 영국 연주회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나, 이태리어로 부르는 막간극이 무대에 오른 것은 1703년에 와서의 일이었다. 1706년에는 후에 헨델과 라이벌이 될 지오반니 보논치니(1670~1747)의 오페라 「카밀라의 승리」가 영국 가수들에 의해 무대에 올려 졌는데, 1696년 나폴리에서 초연된 이 오페라는 1709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64회나 상연됨으로써 영국에서 인기를 끈 첫 이태리 오페라라는 영예를 안게 된다. 이러한 인기는 이태리 말이 아닌 영어 번역으로 노래해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공연이 지속되다보니 이태리 가수들이 영국 가수들 틈에 섞여 한 공연이 두 나라 말로 진행되는 경우마저 생겼다. 「리날도」의 성공을 질시한 애디슨이 「스펙테이터」에 “마침내 오페라의 반만 알아듣는데 지친 청중들은, 생각하는 수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젠 아예 전체 오페라를 못 알아들을 외국어로만 공연되도록 주문했다”고 비꼬는 투로 언급한 데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이렇듯 이태리 오페라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문제가 된 것은 비단 런던 뿐만이 아니라 헨델이 한때 머물렀던 함부르크를 비롯한 다른 곳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685년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1703년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말단 바이올린 주자로 채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는데, 한자 동맹의 일원으로 상업적 융성을 누려왔던 함부르크는 궁정들을 제외하고는 독일 지역에서 유일하게 오페라 극장이 지속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다. 런던에서 영어와 이태리어가 공존했듯 함부르크에서도 독일어와 이태리어가 같이 사용됐는데, 그 차이는 런던에서는 가수의 국적에 따라 다른 말로 불렀던 것에 비해 함부르크에서는 레시타티보는 독일어로, 아리아는 이태리어로 불렀다는 해결 방식에 있었다.

함부르크에만 머물 수 없었던 헨델에게 피렌체의 페르디난도 대공의 초청은 바라던 이태리 방문의 기회를 제공했다. 1706년 피렌체로 간 헨델은 이듬해에로마를 방문해 가톨릭교회 음악들을 작곡했으며, 베네치아에서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라의 오페라를 관람하는 한편 자신의 세레나타를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베네치아에서 만난 귀족들로부터 하노버와 영국으로 갈 것을 권유받은 헨델은 1710년 6월 하노버의 궁정악장으로 부임했으며, 한 달 후에는 휴가를 얻어 마침내 영국으로 건너가 「리날도」를 준비하게 됐던 것이다.

「리날도」는 당시의 모든 이태리 오페라들이 그렇듯이 나폴리의 오페라 세리아를 본보기로 삼는다. 오페라 세리아를 또한 ‘번호 오페라’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규칙적으로 쉽게 번호를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무척 단조로운 결과를 초래할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구성 방식은 등장인물에 따른 아리아의 배정과 이들의 배열에 대한 오랜 경험에 바탕을 둔 관습적 규칙들에 의해 백년 이상 지속된 나름대로의 예술적 성과를 거뒀다. 후에 극작가로 명성을 날린 골도니는 젊을 때 겪었던 오페라 작가로서의 실패담을 회고하던 중 다음과 같이 오페라 세리아의 관습들을 정리했다. “극의 주인공들인 주역 소프라노 카스트라토, 여가수 및 테너는 하나는 비장하고, 하나는 기교적이고, 하나는 말하는 것 같고, 하나는 성격이 섞여 있고, 하나는 눈부신 다섯 곡의 아리아를 각각 불러야만 한다. 조연급의 남자와 여자는 각기 네 곡, 마지막 남자는 세 곡, 그리고 혹시 극이 일곱째 인물을 요구한다면 그 역시 같은 수의 아리아를 불러야 한다. 주역들의 열다섯 아리아들은 같은 색깔의 두 곡이 바로 뒤따르지 않아 각 가수들의 아리아들이 서로 대조를 이루도록 배치돼야 한다.” 골도니가 제시한 큰 틀의 정신은 모든 오페라 세리아를 어김없이 관통하고 있다.

 

아리아 선호도, 18세기 사회변화와 맞물려

흥미로운 것은 ‘울게 하소서’나 ‘라르고’를 비롯해 현재 우리가 즐겨 듣는 바로크 시대의 아리아들은 모두 골도니가 비장하다고 한 아리아 칸타빌레들 일변도이며, 당시 오페라 세리아에 가장 많이 사용된 힘차고 기교적인 아리아 브라부라는 모차르트 「마적」에 나오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만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아리아 유형에 대한 선호도의 변화는 18세기 이후 빚어진 사회 구조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프랑스 서곡에서 보았듯 으뜸가는 목표가 전쟁의 승리를 통해 얻어진 ‘영광’이었던 군주들로서는 아리아 브라부라에 담긴 결연한 투지가 무엇보다도 소중한 마음가짐이었겠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시민의 신분을 획득한 예전의 피통치 계급으로서는 사랑과 미움의 절절함을 담은 아리아 칸타빌레만이 오페라 세리아의 아리아 유형들 가운데 유일하게 마음에 다가왔을 것이다.

헨델의 「리날도」에는 알미레나의 ‘울게 하소서’ 외에도 리날도가 알미레나에게 부르는 ‘사랑하는 신부여(Cara sposa)’와, 알미레나가 부르는 모방(simile) 아리아 ‘노래하는 새들과(Augelletti)’ 같은 유명한 아리아들이 들어 있다. 특히 ‘노래하는 새들과’의 전주 부분에는 생상의 「동물의 사육제」에 못지않게 생생한 새들의 모습이 플루트와 피콜로를 비롯한 목관 악기들에 의해 소리로 그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애디슨은 이 아리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일화도 하나 남겨 놓았다. 그가 「리날도」의 초연을 보러 극장으로 가던 중 새들로 가득한 새장을 들고 가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새들은 바로 ‘노래하는 새들과’가 연주될 때 극장 안에 풀어놓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리아가 끝난 뒤에도 멋대로 극장 안을 누비며 노래를 불러대던 새들은 애디슨에 의하면 ‘청중의 머리 위에 불편을 끼치는’ 일마저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헨델은 「리날도」이후 삼십년 동안 런던 무대를 위해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1728년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의 성공과 뒤이은 왕립 극장의 파산으로 영국에서의 이태리 오페라의 인기가 하락하자 1741년 이후로는 ‘영국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전념한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와 구별하기 어렵다. 잘 알려진 「메시야」를 보더라도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번갈아 나오는 방식은 오페라 세리아와 같으나, 레치타티보-아리아 뒤에 합창이 추가되어 하나의 그룹을 이룬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오페라 세리아를 접할 기회가 많지 못한 우리 입장에서는 「메시야」가 오페라 세리아의 전통적 짜임새와 아리아 유형들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다음 글에서는 후에 ‘대왕’으로 불리게 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오페라 극장 건립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한국교원대·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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