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외국어대·이태리어과
근대성은 탈근대성과 더불어 현재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화두일 것이다. 근대성 자체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논의가 분분하다. 그런데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는 근대성의 기획을 어떻게 완수할 것인가 하는 쪽과 근대성의 기획 자체를 무효화하고 다른 차원의 문명을 형성하자는 쪽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성을 계속 발전시키고자 하는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흐름은 대체로 안정되고 희망찬 미래를 구상하는데 반해, 탈근대를 말하는 쪽은 비교적 논의가 분분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바티모가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탈근대성의 논의가 터를 두는 ‘차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고 해체적인 전망에서 기존의 사유 구조와 역사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다원주의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이 개념은 전통적인 서구 사상에 비판적인 입장이란 면에서, 어떤 절대적인 기반 위에 서있는 근대에 대처하는데 꽤 유용해보인다. 그러나 또 다른 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상대주의와 해체가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 곧 무책임과 생략의 논리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정작 서구 중심적 근대성에서 밀려나있는 주변부를 지역적 특성으로 싸잡아 버리면서 생략해버릴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차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탈근대의 계획은 환상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근대성에 대한 비현실적인 과잉 반작용일 수 있다는 이글턴의 지적이 의미를 갖는다.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한가운데서 바티모는 오랫동안 깊이 있는 철학적 사색의 길을 걸어왔다. 1936년 토리노에서 태어나 현재 토리노 대학 철학 교수인 바티모는 60년대 초반,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에 대한 연구로 출발하여 아방가르드의 시학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과 함께 특히 19, 20세기 독일 철학에 전념했다. 그 결과 슐라이어마허, 하이데거, 그리고 니체에 대한 책들을 발표한다. 그 외에 ‘차이의 모험(1980)’, ‘주체를 넘어서(1981)’, ‘투명한 사회(1989)’, ‘해석의 윤리(1989)’를 출판했고, 최근 들어서는 ‘해석을 넘어서. 철학에서 해석학의 의미(1995)’와 니체에 대한 논문들을 묶은 ‘니체와의 대화’ 1961-2000(2000)를 출판했다.
존재의 위치를 통해 타자에게 다가가기
1985년에 출판한 ‘근대성의 종말’에서 바티모는 니체와 하이데거를 해석하면서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근대성의 종말에 관한 논쟁을 뜨겁게 불러일으켰다. 근대성의 종말은 ‘약한 사고(pensiero debole)’, 또는 ‘약한 존재론’을 낳는데, 이는 보편주의적이고 무시간적이며 공격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형이상학이나 ‘강한 사고’에 대한 급진적인 반대의 입장에 서는, 전형적인 탈근대적 사고 방식이다. 약한 사고의 적절한 표현은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제안하는 ‘올바른’ 해석학적 태도인데, 해석자는 그러한 태도 속에서 소위 방법론적 약함을 실천한다. 바티모는 이를 존재의 ‘위치’로 설명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를 빌어 바티모는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급진적으로 이해하면서, 존재는 언제나 한 상황 또는 역사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단, 존재는 자신의 위치를 부동의 것으로 보지 않는 ‘약한’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자신의 자리의 변화에 따라 끝없이 변화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약한 사고’를 가질 때, 위치성이 존재의 시각을 결정하는 한편, 동시에 존재는 이러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공간적 경험에 연루되고, 그럼으로써 시공간적 지평을,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위치성을 변화시킬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의는 바티모가 1983년에 로바티와 함께 편집한 ‘약한 사고’에서부터 발전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존재의 위치는 타자에 대한 의식적인 열림 또는 응답성 안에서, 혹은 실제 세계에 관계함으로써 정해지고 변한다. 여기서 우리는 윤리가 존재론에 대해 우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는 이러한 응답 또는 이러한 관계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존재가 따로 있고, 타자에 대한 응답과 현실 세계와의 충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응답과 충돌 자체가 존재를 구성하는 필수 조건들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실천적, 윤리적 조건없이 존재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어 개인의 윤리적 지평을 여는 시발점이다. 이러한 취지의 논의는 바티모의 다른 책 ‘해석의 윤리’에도 잘 반영돼있다.
이러한 바티모의 논의는, 하버마스를 비롯해,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벤야민 등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근대성의 옹호에 대립하여, 데리다와 푸코, 리오타르 등 하이데거와 니체를 계승하고 있는 일군의 프랑스 현대 철학과 같은 선상에 서있다. 예를 들어 바티모의 ‘사건’ 개념과 같은 식의 논의를 리오타르도 전개한 바 있다. 또, 바티모가 ‘토대’와 ‘기원’을 문제삼듯이, 데리다는 “전제가 없으면 틀린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어떤 강력하고 보편적인 전제에 기대는 위험성과 동시에 거기서 벗어나는 자유의 가치를 논한다. 그러나 하버마스 등에 의한 근대성의 옹호를 반드시 바티모와 대립 선상에 놓아야 하는지는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이는 근대와 탈근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아주 중요하면서도 미묘한 문제에 닿아있다.
근대성, 또는 근대화는 비서구 지역에서는 서구화와 동의어로 간주될 수 있다. 한국에서 근대성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물결처럼 일상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 전면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그 문제는 분단 문제와 더불어 피할 수 없는 숙제거리로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되짚어보는 거대한 사업과 맞물리고, 우리의 정체성을 묻는 지난한 과제의 토대가 되며, 나아가 현재 인류 전체가 당면하고 있는 근대성의 모순들 예컨데,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문화적 소외 등의 극복을 위한 필수적인 여정임에 틀림없다. 특히 근대성의 문제를 서구에 의한 비서구의 지배라는 도식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던 미숙한 논의를 바로잡고, 근대성의 오류와 한계가 비서구 뿐만 아니라 서구에 있어서도 넘어야 할 산이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서구지성의 반면교사
탈근대가 유행처럼 논의돼온지 서구에서는 수십 년, 한국에서도 십 년이 넘어가는 동안 너나 할 것 없이 탈근대를 구세주처럼 떠받드는 마당에 탈근대를 옹호하는 바티모의 입장을 뒤늦게 소개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구태의연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티모의 논의가 빛을 발하는 것은 탈근대의 옹호가 자칫 빠질 수 있는 환상을 경계하고 근대성으로부터 확실하게 몸을 빼내려는 치밀한 논리를 전개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티모는 근대의 종말을 말하면서, 근대가 터를 두는 존재의 확실성에 회의를 표하는 동시에 존재가 역사성에 침투할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탈근대의 논의가 자칫 빠지기 쉬운 상대주의적 무책임과 무정부주의적 혼란에 대처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상대주의를 윤리로 무장시키는 탈근대적 윤리학으로 발전될 수 있을 것 같다.
바티모는 근대성의 종말을 말하고 있지만, 근대성이 지닌 강하고 오랫동안 단련된 체계성의 이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궁극의 목적은 그것을 비판하거나 넘어서자는 것이면서도, 진정으로 근대성에 종말을 고하는 것은 존재를 역사의 흐름에 실으면서 가능하다고 말함으로써, 근대성-탈근대성의 쌍이 하나의 이항 대립으로 빠져서 또 다른 근대성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의 근대성-탈근대성 논의가 순환 논법이나 대항 논리 등, 비생산적인 관계에 빠지지 않으면서 전향적으로 개진되어나가는 길을 트는데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바티모의 논의는 근대성 문제에 대한 서구 지성의 치열한 고민을 같이하는 기회를 주면서, 근대성의 극복 내지 비판에 하나의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