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20:05 (토)
역할·독립성 놓고 격론 … ‘인문사회홀대’ 지적도
역할·독립성 놓고 격론 … ‘인문사회홀대’ 지적도
  • 박상주 기자
  • 승인 2008.06.02 13: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상중계]‘한국연구재단’ 공청회

한국학술진흥재단(이하 학진)·한국과학재단·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통폐합으로 만들어지는 ‘한국연구재단’ 밑그림에 뚜렷한 비전이 없고, 인문사회과학 연구단 학문분류를 엉뚱하게 뭉쳐놔 “인문사회과학계 홀대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됐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달 29일 학진에서 ‘한국연구재단’ 통합시안 발표와 함께 공청회를 가졌다. 공청회 좌석은 시작 전부터 만원을 이뤘다. 학진 직원들이 간이의자 수십 개를 들고 와 자리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자리가 부족해 서서 듣는 사람들이 태반을 이뤘다.

안내데스크 직원은 “인쇄된 자료집이 부족하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분들은 자료집을 돌려 달라.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료집을 내려 받을 수 있다”고 호소했다. 한 참석자는 “연구지원 관련 유일한 재단이 될 테니 관심이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청회 참석자들은 연구지원기관 통폐합의 근본적인 문제부터 구체적인 운용방식까지 문제를 제기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 재단성격, ‘시너지 효과’는 뭔가=조성택 고려대 교수(철학)는 “명칭에서 ‘학술’이 빠지고, 연구재단의 주요 역할이 ‘원천기술’ 등 ‘돈 되는 연구’에 집중됐다. 국가 기초학문 지원은 학술 발전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데 왜 학술이라는 말을 굳이 배제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돈 되는 연구는 기업이 지원하고 국가는 학문을 키워야 한다. 연구재단 성격에 심각한 우려를 가진다”고 밝혔다. 또 “선진형, 창의적, 연구자 친화 등으로 연구재단을 설명하는데 이는 이미 학진이나 과학재단에서 추구해왔던 것이다. 연구재단 설립으로 더 나아지는 장점 등 비전과 철학이 없다”고 비판했다.

박정훈 서울대 법학연구소장은 “통합은 정부 자율로 할 수 있지만, 헌법상 학문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면서 “학술진흥, 학문이라는 용어가 어디엔가는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철구 연세대 교수(물리학)는 “연구재단이 재원확보를 위한 기관인지, 평가를 위한 기관인지 불명확하다”면서 “연구재단법 등에서 구체적인 역할이 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 과학재단 관계자는 “교과부는 통합으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다고 했는데, 국제협력센터를 부설로 두는 것이나, 창의사업을 과학문화재단으로 넘기는 것은 통합과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양오봉 전북대 교수(화학공학)는 “시안이라면 안을 5개 정도는 만들어 와야 할 텐데, 달랑 하나를 내놓고 우리가 갈 방향이라고 하는 것은 불충분하다”면서 “각 연구본부 예산을 3분의 1씩 나눈 걸 보면 분리를 염두에 둔, ‘이혼을 위한 결혼’처럼 보인다. 국제협력센터는 국제협력실정도면 될 일 같은데 위인설관 같다”고 평했다.

□ 지배구조, 독립성 보장 관건=연구재단은 효율성을 위해 지배와 경영을 분리, 15명 내외 이사회가 연구지원정책을 정하고 상근 전문경영인 ‘총장’을 선임하는 독립 체제를 지배구조로 한다.

김철구 교수는 “15명 비상근 이사가 전체 연구기획 기능을 담당하기 어렵고, 정부의 당연직 이사도 빼기 어려워 독립성 유지가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김 교수는 “이사회는 존치하되 자문그룹은 저명한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학술이사회나 과학위원회 등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독립성 유지를 위해 총장은 장관이 아니라 대통령이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성택 교수는 “효율성을 목적으로 하자면 지배-경영을 통합, 책임경영제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사회체제로 가면 그 상위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이사회(국가권력 등)가 분명히 있다. 법·제도적으로 독립성을 보장해야한다”고 말했다.

여준구 항공대 총장은 “미국 NSF는 독립 기구지만 정부가 더 많은 예산을 늘여준다. 연구재단이 부처소속기관이라도 독립성을 더 많이 줘야 할 것”이라면서 “이사회는 견제의 의미로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 PM확대, 민간전문가 책임소재 불분명=연구재단은 민간전문가를 학진 단장급의 프로그램매니저(PM)로 선임, 국내외 PM이 연구지원 전 과정을 관리·평가하고 외국 학자들의 피어리뷰를 시행할 계획이다.
여준구 총장은 “연구재단은 행정보다 연구자 위주 조직이 돼야한다”면서 PM제 도입에 찬성을 표했다.

김철구 교수는 “우수한 PM을 확보하려면 미국과학재단보다 독일 DFG를 고려해봄직하다”면서 “현재 기초연구 수혜자가 7~8명 중의 1명인 상황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연구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연구비를 주는 ‘풀뿌리연구지원’이 정착돼지 않는다면 학자들이 PM 결정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 교수는 국제 피어리뷰에 찬성하면서 “그러나 외국학자들은 응답률이 낮다. 일본이나 중국 등과 함께 상호평가협약을 맺으면 상대기관이 책임지고 국제 평가를 수행해줄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병기 기계연구원 재료연구소 선임연구부장은 “PM이 민간전문가라면 이들 역시 어느 기관에 소속된 사람이다. PM의 책임소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각 PM이 담당하는 학문분야별 예산 배분안이 나오지 않아 역할을 가늠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시안을 작성한 박재민 건국대 교수(소비자정보학)는 “국가기초과학위원회에서 (각 학문별 예산배분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공청회 사회를 맡은 전승준 고려대 교수(화학)는 “이번기회에 종합적으로 예산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학문별 지원, 학제·융합연구 미비=연구재단은 현행 연구사업별 지원에서 학문분야별 지원으로 연구지원 형태를 바꿨다. 재단 산하 기초연구본부가 이공학을, 인문사회연구본부가 인문사회과학을 담당한다. 우주기술·원자력기술 등은 국책연구본부에서 담당한다. 각 연구본부는 사업운영위원회를 두고 있다.

여준구 총장은 학문분야별 협력체계 보완을 강조했다. “미국과학재단도 부처 간 갈등이 생겨 협조가 어려웠었다. 그러나 지금 NSF 내 프로그램들은 연구사업별로 관계된 다른 프로그램과 협조관계를 형성, 서로 예산을 함께 투자하기도 한다”며 “학문분야별 예산은 나눠 갖는 게 아니라 협조해가면서 리서치커뮤니티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김철구 교수는 “기초연구와 국가부처연구는 각기 다른 성격으로 접근해야 한다. 국책연구본부는 국책연구센터처럼 별도 기관화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복합연구단이 인문사회과학분야 산하에 있는 것에 대해 김 교수는 “이공계, 인문사회계 공동에 둬 학문분야별 협조의 창구나 가교로 삼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조성택 교수는 “사업운영위원회 기능과 역할이 정해진 바 없다. 불분명한 위원회가 학술 방향에 일관성을 훼손할 수 있다”면서 “오래전부터 분과 학문 구분은 있었다. 해결점은 학제연구나 융합연구 방안인데, 연구재단은 이런 연구경향에 대해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채 후진적인 낡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연구단 구성, 인문사회 홀대?=연구재단은 학문분야를 이공학, 인문사회과학별로 나눠 연구본부를 만들고, 연구본부아래 세부 학문분야별로 연구단을 구성했다. 연구단 구성은 이공계의 경우 ‘수학’, ‘물리학’ 등으로, 인문사회계의 경우 ‘인문1(언어·문학·예술·체육)’, ‘사회2(사회·문화·교육)’ 등으로 예시를 들어 놨다. 공청회 참석자들은 연구단 예시를 두고 “인문사회 홀대”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조성택 교수는 “인문사회분야가 서자 취급을 받는 느낌”이라면서 “예술과 체육은 문학과 공학만큼이나 다르다. 어떤 철학으로, 어떤 이유로 이렇게 인문사회 분야에 여러 분야를 뭉쳐 넣었는지 모르겠다”면서 인문사회과학이야말로 국가경쟁력의 원천이다. 국가경쟁력 담당자를 이공계가 독점하는데 대해 제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ㄱ아무개 전북대 교수는 “연구단을 이렇게 나누면 이공계는 13개, 인문사회계는 5개 연구단을 가진다. 분류나 구성 기준이 뭐냐”고 따졌다.

전승준 교수는 “그건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이걸 보고 인문사회 홀대 언급이 나오는데 확정된 것이 아니다”라면서 “예를 뭔가로 들어야 할 것 같아 적은 것 뿐”이라고 해명했다. 한 공청회 참석자는 “아무리 예시로 잡았다해도 숨겨진 의도는 들어간 것”이라면서 “공청회 의견이 수렴되는지 지켜볼 일”이라고 푸념했다.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