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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위한 책’과 중층적 문화
‘입을 위한 책’과 중층적 문화
  • 교수신문
  • 승인 2001.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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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4 16:33:25
재미있는 우연의 일치가 하나 있다.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1월부터 ‘옛 음식책이 있는 풍경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옛 음식문헌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요즘, 파리에서도 국립도서관 주최로 11월부터 같은 주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14세기부터 프랑스 혁명 전까지의 요리와 식탁 예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전시회의 제목은 ‘입을 위한 책’.

약속이나 한듯이 같은 시기에 같은 주제의 전시회가 두 나라의 수도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두 나라의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맥도널드로 대변되는 무차별적 인스턴트 식품의 위협 앞에서 전통 음식문화의 정체성을 찾음으로써 자기 문화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어디에서나 요청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음식문화사가 최근 프랑스 사학자들의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된 역사적 배경은 길다. 우선 19세기 초반부터 음식에 관한 담론이 문학적 담론을 거쳐 미식비평의 형태로 정착되었다는 점을 들수 있고, 둘째로 정치사에 편중되었던 과거의 사학 방법론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생활사와 미시사를 중시하게 된 사학자들이 일상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 반복적인 활동인 먹는 일을 조명하는 데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문학적 에세이에 기원을 두며 프랑스의 고유한 담론영역으로 정착된 미식비평은 프랑스를 서양요리의 중심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오랫동안 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이 분야가 오늘날 재조명되고 있는 것은, 음식에 관련된 상상력이 미적 감수성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재발견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명과 삶 자체를 위협하는 광우병, GMO, 인스턴트 식품에 대항하여 건강하고 즐거움을 주는 식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입을 위한 책’ 전시회의 기획에 참여했고 미식담론사의 전문가인 알베르토 카파티 교수(불어학)가 국제음식문화운동단체인 슬로우의 리뷰 편집장인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오늘날 프랑스의 음식사 연구를 하나의 주제로 정착시킨 것은 지난 8월 타계한 쟝-루이 플랑드랭(전 고등사회과학연구소 교수)이다. 그는 맛시모 몬타나리와의 공동 주도하에 엮은 ‘음식의 역사’(1996)에서 원시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식품생산, 식습관, 그리고 그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탐구했다. 火食이 원시인의 인간화에 미친 역할, 중세 조리법과 향료의 사용에 얽힌 의학적 믿음과 오늘날의 인스턴트 식문화에 이르기까지 이 저작은 음식사가 주제화할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과 연구방법을 보여주었다.

문화사이자 동시에 생활기술의 역사라는 특수성 때문에 흔히 음식사는 조리법의 실험이라는 특이한 방법론을 채용하기도 하는데, 고문헌의 실제적인 고증을 거쳐 완성된 성과물인 프랑스와즈 사방과 실바노 세르벤티의 ‘르네상스 시대의 요리’(1997)와 ‘17세기의 요리’(1998)는 역사서이자 고문헌 연구서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식문화의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도 충분했다. 이 두 명의 학자는 최근, 유럽이라는 지역적 한계에서 벗어나 유럽과 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식품의 하나인 국수를 소재로 한 보편문화적인 연구의 결과물을 냄으로써(‘국수-보편적인 한 문화의 역사’, 2001), 이 분야의 연구를 한층 심화시켰다고 평가된다. 이 연구는 지역적으로 광범위할 뿐 아니라, 조리법과 식사문화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민속학과 신화학, 철학사, 경제사, 기술사, 의학사에 걸쳐 두터운 중층적 문화의 관계망을 보여준다.

이들의 연구에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는 이유는, 역사연구 방법론에 대한 비판과 논의, 그리고 연구대상과 사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활사와 미시사에 대한 관심 자체가, 거시권력의 관계만을 보여주는 전통적 역사방법론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 만큼, 이들은 문화적 차이의 맥락을 무시하는 역사해석에 대해 비판적이다. 다른 문화에 대해 문화적 차이를 무시한 채 행하는 비판이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음식사 연구를 보면서 드는 또 다른 생각은 자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또한 다른 문화를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홍서연 / 프랑스 통신원·파리 4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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