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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고기 한 점이 곧 윤리다
[문화비평]고기 한 점이 곧 윤리다
  • 김영민 / 철학자
  • 승인 2008.05.26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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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광우병)와 새(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한 소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어리석은 자가 이를 두고 단지 ‘소와 새의 문제’라고 일축할 수 있을까. 이 경우의 소와 새는 대상이나 항목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일종의 至點이나 水位인데, 말하자면 미래로부터 밀물처럼 다가올 어떤 위험의 예보이자 그 징조인 것이다. 마치 ‘안전한 섹스(safe sex)’가 어떤 근본적인 질문들을 영영 묻지 않고 감추듯이, ‘안전한 소고기/닭고기’의 확보로 귀결되고 마는 시민사회적 저항 역시 정작 물어야 할 질문들을 숨긴다.

병든 소와 새를 솎아내고 안전한 먹거리를 확보하자는 논의의 일차원적 이기심에서 벗어나는 순간 소와 새는 그 역사성과 장소성의 맥락을 다시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상호관련성의 맥락 속에서야 비로소 인간들은 병든 소와 새를 지목하던 그 어리석은 손가락을 꺾어 자기자신을 가리키게 된다. ‘풍부하고 안전하게!’라는
슬로건 아래 사상되는 문제와 억압되는 물음은 인류의 대다수가 당연시하고 있는 생활양식을 의제화하는 순간 다시 표면 위로 떠오른다. ‘변산 쭈꾸미축제’가 쭈꾸미를 위한 것이 아니고, ‘마산 전어축제’가 전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에 대한 단순한 자각은 ‘쭈꾸미와 전어를 안전하고 풍족하게 먹자!’는 슬로건이 은폐한 문제들을 다시 묻는 열쇠가 된다.

‘안전한 섹스’, ‘안전하고 값싼 소고기/닭고기’,  그리고 ‘맛있고 값싼 쭈구미/전어’ 등의 1차원적 계몽주의의 맹목성은 일부 독일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목적합리적-도구적’ 차원에서만 움직이는 자본제적 삶의 태도에 특징적인 것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자본제에 얹힌 군중적 인간(das Mann)들이 자신들의 이기심을 돌보는 행태나 장치에 불과하다.

로빈슨 크루소의 세상이 아니라면, 굳이 해석학적 논의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기술(Be-schreibung)은 곧
평가(Be-wertung)일 수밖에 없을 터, ‘안전하고 값싼 소고기/닭고기’는 다만 어느 특정한 먹거리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세속과 그 인습에 대한 제 나름의 평가이며, 기성의 자본제적 체제에 얹혀있는 방식이고, 동료 인간들을 포함한 뭇 생명을 대하는 삶의 태도일 수밖에 없다. 언어를 삶의 양식에 결부시키거나 심지어 인간 존재성의 내적 조건으로 치는 사상가들이 적지 않지만, 실은 ‘말하는 일’ 못지 않게 ‘먹는 일’도 극히 중요한 정치사회적 함의를 지닌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Der Mann ist was er ißt)”라는 포이에르바흐의 유명한 말이 회자되고 있거니와, 그것은 단지 유물론의 한 단면을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러 형식의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종교인들, 그리고 세속에 드러나지 않는 수도자들이 한결같이 양생과 성숙의 길을 ‘먹는 일’을 살피고 가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개인의 존재윤리적 차원을 살피거나 혹은 사회생활의 기본을 다스린다는 의미에서라도, ‘안전한 섹스’와 ‘안전하고 값싼 소고기/닭고기’에 대한 방법(how)을 따지기 전에 섹스와 고기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가치(why) 물음들이 선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영모나 함석헌, 그리고 김흥호 등이 一食晝夜通’을 말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이 고기-知剌의 세속은 영영 이해할 수 없다.
호이나키나 니어링 등 몸의 영성과 화해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나름의 음식문화, 음식정치을 매개로
그들의 삶을 재배치, 재구성하는 이유는 오직 실천의 뒷맛 속에서만 응집한다. 그 깡마른 몸매로 물레를 돌리면서 서구 식민제국주의 삶과 단호하고 생산적인 결별의 상징이 된 간디는 인간의 열정이 그 口味의 향방과 직결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Passion in man is generally co-existent with a hankering after the pleasures of the palate.”) 나는 一食을 하면서, (마치 숨쉬기가 목-숨으로부터 발바닥-숨으로 낮아진다는 호흡법의 이치처럼) 음식을 입으로 먹는 데서 벗어나 그 상호작용의 현장은 胃나 몸(氣)으로 낮아지고, 이윽고 ‘음식-들이기’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실천하는 길을 배우게 되었다. 옛 사람은 ‘밥 한 그릇 속에 진리가 있다’고 했거니와, 섭생은 곧 정치의 시작이니 (자연 그 자체가 윤리가 된 세상 속에서) 쌀 한 톨, 고기 한 점이 곧 윤리다.

김영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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