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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잠식한 전통사회의 두 축 명쾌하게 분석
대중문화 잠식한 전통사회의 두 축 명쾌하게 분석
  • 박현숙 중국통신원
  • 승인 2001.12.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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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24 16:30:52
최근 중국의 TV드라마나 서점가 등에는 봉건왕조시대의 ‘황제’에 관한 역사드라마 및 무협지의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바야흐로 WTO 가입과 함께 세계무역질서를 바꾸고 있는 거인 중국에서 왜 갑자기 시대를 역류하는 듯한 황제열풍과 영웅열풍이 불고 있는지 문득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이러한 의문은 1999년도에 드라마 ‘옹정왕조’ 신화를 만들어낸 감독 후메이(胡)의 말에서 간접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흔히 중국역사에서 폭군으로 인식돼온 옹정제를 강희제나, 건륭제, 진시황제보다도 더 위대한 업적을 쌓은 영웅으로 재부활시킨 의도에 대해 그녀는 “프랑스인은 나폴레옹을, 미국인은 워싱턴을 영웅으로 받들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그럼 중국에는 이러한 영웅이 없는가. 나는 중국인을 위해 한 명의 또는 몇 명의 위대한 인물들을 만들어내고 싶었다”고 그 속내를 밝혔다.

유민의 역사를 되짚어 봐야

‘황제와 건달’(皇帝流氓)은 바로 이러한 중국인들의 속내와 잘못된 영웅관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고 있는 왜곡된 문화현상에 대한 비판서이다. 책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주요 내용은 중국전통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양대축인 ‘황제’와 ‘건달’ 또는 ‘부랑자’ 문화가 오늘날 중국의 현대화에 어떠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으며 또한 중국의 대중문화를 어떻게 오도하고 있는지를 따지고 있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맥은, 중국 전통사회의 ‘황제’와 ‘건달’은 결국 배다른 형제와 같으며 본질상 한 핏줄을 이루면서 중국의 장구한 역사속에 섞여 함께 흘러왔다는 것이다. 즉 진시황의 중국통일 이후 중국역사 속에 등장한 수많은 황제들의 행적과 황권주의로 불릴수 있는 중국봉건시대 정치문화의 기저에는 사회주변을 떠도는 游民문화와 유민지식인들이 이끈 반사회적 문화가 침잠돼 있다고 본다. 이들 유민집단에서 파생돼 나온 ‘流氓(건달이나 부랑자)’문화 그리고 이러한 건달 문화의 영향은 문화대혁명의 홍위병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고 현재 유행하는 대중문학이나 문화속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일찍이 ‘유민문화와 중국사회’(游民文化與中國社會)라는 책을 저술한 왕쉬에친(王學秦)은 그의 저서에서 이러한 유민문화와 유민지식인들이 중국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중국학계에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중국역사에 대한 또 다른 편향된 해석을 낳았다고 주장하며 유민문화에 대한 논쟁 및 연구를 촉발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유민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송대 이후다. 송대

이후 중국사회에는 잦은 자연재해와 기아, 전쟁 등의 원인으로 각 도시마다 농촌에서 올라온 유민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일정한 사회적 지위나 고정적인 연고 등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계층인 동시에 기득권 및 주류사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반사회세력으로 자리잡아 갔다. 이들은 일정한 문무를 갖춘 같은 계층의 지식인들(왕쉬에친에 의해 유민지식인으로 지칭됨)의 지도하에 각종 농민봉기등에서 실제로 농민들보다 더 주요한 역할들을 담당했고 ‘황권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가장 강했던 집단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세력이 될 수 있었던 이들 ‘유민’ 집단들이 중국역사속에서 진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결국 ‘건달’로밖에 남을 수 없었던 것은 사회에 대한 올바른 개혁적 대안을 가지지 못하고 사회의 주변에서 맴돌면서 사회의 공공질서와 안정을 해치는 ‘부랑자’들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집권에 성공해서 ‘황제’로 탈바꿈한 ‘건달’들은 황제가 되자마자 예전의 적대세력이었던 귀족들과 지식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을 하기 시작했고 제도를 중심으로 한 개혁보다는 또 다른 정통을 내세우며 황제전제주의를 확립해 나갔다. 이들 ‘건달’황제의 대표적인 예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에게서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서구의 봉건주의와 비교되는 중국특색의 ‘황권주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형성하면서 중국이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 등의 국가와 같은 근대적인 개혁에 뒤질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즉 합리적인 관료정치의 기제 없이 황제 1인의 ‘전제’에 의존하다 보니 사회적 부패와 무질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이외에도 필자들은 과거의 ‘유민’ 집단이 오늘날 ‘민공조’ 현상으로 대변되는 도시 민공들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들은 또 다른 현대의 ‘부랑자 문화’와 대안없는 반사회세력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리고 이들 ‘부랑자’집단의 문화는 흔히 왕슈어(王朔)등으로 대표되는 ‘子文學‘ 즉 룸펜문학과 룸펜문화를 양산하는 근원이 되고 있다고도 말한다.

진정한 영웅 새로 만들기

오늘날 영웅만들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중국의 살아있는 대중문화들 속에 담겨있는 논리는 모두 죽은 것들이라고 냉소하는 이 책의 필자들에게 21세기의 현대적인 중국은 어떠한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을까. 그것은 법치와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기반으로 한 중국이라고 역설한다.

이 법치와 민주적인 제도가 있는 이상국에서 중국인들은 황제의 ‘신민’에서 정치적으로 해방된 ‘인민’이 됐었던 과정처럼 이제는 다시 법적인 평등권과 민주적인 권리, 의무 등을 가진 현대 법치국가의 ‘공민’으로 거듭 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만이 중국의 질긴 고질병인 ‘황제와 건달’문화, 그리고 그들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국인을 계몽하는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필자들의 간절한 바람이다.
박현숙 / 중국통신원·남경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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