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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오페라를 마무리한 다 카포 아리아
17세기 오페라를 마무리한 다 카포 아리아
  • 교수신문
  • 승인 2008.05.2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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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재의 ‘오페라로 읽는 서양 근대의 편린’ ]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와 오페라 세리아

오페라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17세기를 보는 시각 중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런 눈으로 볼 때 베스트팔렌 조약을 비롯해 1640년대 후반 유럽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정치적 혼란들을 16세기에 형성된 스페인 중심의 세계 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유발된 증상들로 이해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를 통해 예감한 이러한 과정은 결국 또 한 번 세기가 바뀌던 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음으로써 매듭된다.  

이러한 과정을 유럽 역사상 명멸했던 여러 왕가들의 흥망성쇠 가운데 하나로만 넘겨버리기는 어렵다. 대영제국에 앞서 16세기에 이미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룩했던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세계 제국의 꿈이 사라진 것은 뽈 아자르의 책 제목처럼 하나의 기독교 국가라는 중세적 이상이 허물어진 “유럽 의식의 위기”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루이 14세의 ‘위대한 세기’의 떠오르는 태양과 견주어 볼 때 더욱 초라해 보이는 스페인 합스부르크家의 저물어가는 석양이 오히려 그 후 벌어질 여러 사건들을 더 잘 비추어 줄 수도 있다. 기존 국제 질서의 붕괴가 차후 야기된 다양한 국지적 현상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설명인 경우가 역사상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주인공인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삶은 이러한 과정의 전후를 둘 다 비추는 양면경이다.

오페라의 첫 세기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에 의해 마무리된다. 페리와 캇치니의 피렌체의 궁정 오페라가 만토바와 로마를 거쳐 베네치아에서 공공 오페라의 꽃을 피웠고, 몬테베르디의 뒤를 이은 카발리, 체스티의 손에 의해 이러한 전통은 이태리를 벗어나 파리와 비엔나로, 그리고 마침내 바다 건너 런던에 이르기까지 뻗어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이태리는 오페라의 중심이었으며 특히 나폴리는 다음 세기 오페라의 향방을 결정했다. 스페인 왕을 대리한 부왕(副王, Viceroy)의 통치를 받았던 나폴리는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흥망성쇠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으며,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족적 또한 이러한 나폴리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나폴리의 운명, 작곡가의 旅路

1660년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태생인 알레산드로는 음악가였던 부친 사후 어린 나이로 어머니와 함께 로마로 갔다. 1679년 열아홉에 발표한 첫 오페라 「닮은 사람들」이 큰 성공을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알레산드로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궁정 악장에 임명됐다. 30년 전쟁 중 부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2세가 전사하자 1632년 여섯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크리스티나 여왕은 1654년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왕위를 버리고 스웨덴을 떠난다. 기착했던 여러 도시로부터 반종교개혁의 영웅으로 환대를 받은 후 마침내 다음 해 성탄절 로마에 도착한 크리스티나 여왕은 로마 문화 예술계의 중심인물로 군림했다. 1684년 나폴리로 돌아온 알레산드로의 공식 직함은 왕립 예배당의 음악 감독이었는데, 여기에는 부왕 궁정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하는 책임도 포함돼 있었다.

새로운 오페라를 부왕 전용 극장에서 먼저 상연한 후 곧이어 대중을 위한 성 바르톨로메오 극장에서 공연하는 것이 관례였던 나폴리를 위해 알레산드로는 1702년까지 18년 동안 최소한 서른 두 편 이상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러나 나폴리의 음악적 취향이 더 이상 자신의 것과 맞지 않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감지한 알레산드로는 로마로 되돌아가 1706년 코렐리 및 파스퀴니와 함께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가입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로마 체류 동안 알레산드로는 피렌체를 통치하던 코지모 3세의 세자 페르디난도 대공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는데, 보다 단순하고 대중적인 음악을 촉구하는 대공의 편지들은 후에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에 대해 “너무 음들이 많다”고 평한 요제프 2세를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알레산드로가 나폴리를 떠난 것은 카를로스 2세 사후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발발과 무관할 수 없었다. 1702년 5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영국 및 네덜란드와 함께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그러나 1705년 레오폴트가 서거하고 후임 요제프 1세마저 1711년 사망하자 그때까지 동맹국들이 앙주를 대신할 스페인 왕 후보로 밀었던 카를 대공이 카를 6세로 등극하게 된다. 카를 5세처럼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카를 6세가 둘 다 통치하는 사태를 두려워 한 영국과 네덜란드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 포기를 조건으로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승인함으로써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마무리됐으며, 이듬해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라슈타트 평화조약에 의해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스페인 소유령들은 오스트리아에 넘어가게 됐다. 그러나 나폴리는 이미 1708년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무혈점령 돼 그리마니 추기경이 나폴리 부왕으로 취임한 바 있었다. 추기경의 총애를 받았던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역시 나폴리로 돌아와 궁정 악장으로 재임명 돼 때로 오페라 작곡과 공연을 위해 로마를 방문하는 경우 외에는 1725년 죽을 때까지 나폴리를 떠나지 않았다.

음악사에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는 오페라 세리아의 틀을 완성한 인물로 기억된다. 오페라 세리아의 특징 중 이태리 서곡과 다 카포 아리아를 우선 살펴보자. 기존의 느린 두 박 계통 다음 빠른 세 박 계통의 춤곡이 나오는 베네치아식 기악 전주곡을 대신한 이태리 서곡은, 빠르고 경쾌한 첫 부분에 뒤이어 간결한 느린 서정적 부분이 나오며 빠른 춤곡으로 마무리 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화려한 장식음과 성악적 기교

1700년 직전 알레산드로에 의해 확립된 이와 같은 이태리 서곡의 틀은 륄리가 확립한 프랑스 서곡과 더불어 18세기 작곡가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를 제공했다. 또한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명확히 구분되는 오페라 세리아에서 아리아란 주로 다 카포 아리아를 의미한다. 잘 알다시피 ‘다 카포’란 ‘머리[=처음]부터’라는 뜻으로서, 두 연의 가사로 이루어진 다 카포 아리아는 첫 연에 뒤이어 대조적인 둘째 연이 나온 후 다시 첫 연으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연주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을 때 보다 화려한 장식음들을 솜씨 있게 붙여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의 깊이를 더욱 돋보이게 함과 동시에 가수의 성악적 기교를 마음껏 뽐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다.

1721년 로마에서 초연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의 마지막 오페라 「그리젤다」의 아리아는 전형적인 다 카포 아리아이다. 농부의 딸로 왕과 결혼했으나 자신의 사랑이 진정한지 시험해 보려는 왕에 의해 다시 시골 농가로 보내진 그리젤다는 “나와 재회하리, 오 그늘진 숲이여, / 그러나 더 이상 왕비와 신부가 아니라 / 불운하고, 경멸받는 / 양치기 소녀로서. // 저기 내 고향의 산들과, / 여기 친숙한 샘물, / 들판이 있고 강물도 흐르건만 / 나 홀로 예전 같지 않구나”라고 노래하는데, 이러한 내용은 르네상스 전원극(田園劇, pastoral)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젤다」의 대본은 오페라 개혁의 선구자 아포스톨로 제노(1668~1750)의 것으로, 베네치아 출신의 제노는 공교롭게도 나폴리의 철학자 지암바티스타 비코도 제노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뉴턴과는 달리 나폴리 대학 교수였던 비코가 오페라를 관람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비코의 철학이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를 위시한 동시대 나폴리 사람들이 겪었던 급격한 정치 사회적 변혁의 와중에서 형성됐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러한 변혁기에 난무하게 마련인 수많은 해결책들 중에서도 그 깊이에 있어 단연 돋보인다는 크로체의 평가를 받은 비코의 말들 중에서도 “어떤 사물에 대해서는 이를 만든 존재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말이 특히 마음에 남는다. 사람이 만든 사회는 사람이 가장 잘 알기에 사회학이 성립된다는 비코의 생각은 음악과 음악학에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울게 하소서”로 잘 알려진 헨델의 「리날도」에 얽힌 사연들을 통해 오페라 세리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 한국교원대·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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