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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쓰기 유혹의 수렁 … 부실한 박사논문 심사가 문제 키웠다
베껴쓰기 유혹의 수렁 … 부실한 박사논문 심사가 문제 키웠다
  • 박상주 기자
  • 승인 2008.05.19 13:5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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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논문표절로 시름 깊어진 예체능계

, 2008.
미술·무용 등 예체능계 실기교수들의 학위논문 표절문제가 잇따라 불거짐에 따라 관련 학계가 시름을 앓고 있다.
예체능계 교수들의 학위논문 표절은 제보자들의 주장처럼 ‘관행’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예체능계 실기 교수들에게 박사학위를 요구하는, 즉 자질이나 능력보다 학위를 중시하는 학계 풍조에도 책임이 있다는게 학계의 중론이다. 신정아씨 사건 배경에도 동일한 요인이 작용했다.

학위논문 표절 문제는 또한 박사논문 심사의 공정성과 철저성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한국 대학원 교육에 허점이 있음을 방증했다.
이론과 실기 두 교육과정을 구분하지 않은 채, ‘자기 박사 만들기’에 치중한 일부 실기교수들의 과욕도 원인으로 지적된다. 이와 더불어 실기 전공자들이 학문적 창의성이나 진실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채 베껴쓰는데 급급할 정도로 ‘문제의식’이 희박하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표절 의혹 제기가 특정인을 겨냥한 사적 감정 대응과 결부돼 공적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 있다”면서 “표절로 거론된 해당 학자가 어떤 소명도 없이 집단 매도당하지 않도록 투명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제시하고 있다.

□ 폭로된 표절 실태= 문화예술 NGO ‘예술과시민사회’(대표 오상길)는 지난 6일 ㅇ아무개 ㅎ대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 국내 석·박사 논문을 짜깁기한 표절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상 논문의 쪽수까지 대조해가며 근거를 제시했다.
‘예술과시민사회’는 미술계의 상세한 표절경위를 추적해 “ㅇ교수는 39편에 달하는 석·박사 학위논문 및 학술지 게재 논문 등에서 텍스트를 표절했으며 원문이 된 학위논문 중 18편도 표절”이라면서 “박사논문의 경우, 본론 전체의 91%가 표절·도용됐다. 분량으로는 논문 160쪽 중 146쪽에 달한다”고 밝혔다.

‘예술과시민사회’는 “이 외에도 ㅂ아무개 ㅅ대 교수와 ㅅ아무개 ㅎ대 교수 등의 논문에서도 표절 의혹이 있다”고 제기했다. 이 단체는 교수들의 박사학위 논문 외에 “ㅎ대 17명의 20편(석사학위 14편, 학술지 2편, 박사학위 4편), ㅇ여대 10건, ㅅ여대 2건, ㄱ대 3건 등 12개 대학의 석사학위 논문 37편, 박사학위 논문 국내 3편 및 해외 1편, 학술지 논문 4편 등 45편의 논문에서 표절 의심 사항을 발견했다”면서 “미술계 전반에 논문 표절 문제가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국민일보>는 무용계 교수들의 논문을 중심으로 표절실태를 점검했다. 제자가 스승의 무용공연을 소재로 위인전 형식의 학위논문을 쓰고 그 논문을 스승 본인이 심사하거나, 한 지도교수가 두 가지 표절논문을 심사하거나, 다른 사람의 논문을 간추려 학회지에 투고한 사례도 드러났다. <국민일보>는 “무용계 학위 및 학술지 논문 200편 가운데 최소한 50편이 표절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ㅊ아무개 미술평론가는 이같은 예체능계 표절 파문에 대해 “실기전공자들이 논문의 학문적 창의성, 진실성과 같은 가치를 인식하지 않는 풍토가 문제”라면서 “신정아 사건처럼 자질·실력보다 학위를 중시하는 풍조가 표절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ㄱ아무개 무용평론가는 “예술계에는 서로 믿을만한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들어 논문을 대필해주는 곳이 따로 있다”고 충격적인 내용을 털어놓았다.

□ 예체능계 대학원 교육은= 최근들어 실기분야 박사과정이 늘어났다. 서울대 음대는 5년 전부터 실기박사과정인 DMA를, 홍익대 미대는 서양화학과 박사과정을, 사진계는 4년 전부터 비평 분야 박사과정을, 무용계는 인문·사회과학·스포츠생리학 등과 연계한 박사과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홍익대가 1995년 첫 실기과 박사를 낼 때만해도 실기 박사는 2, 3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상황이었다. 당시 논문심사는 이론을 전공한 교수들만 참여했다.

안휘준 명지대 석좌교수(미술사)는 “미대 스스로 방향을 찾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그간 미술계가 자정의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면서 “그러나 미대 입장에서 실기교수들이 미술 이론 교육의 주도권을 내놓기 싫어하고, 교수업적평가 및 점수를 받기위해 무리하게 박사학위제를 끌고 가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원 교육의 파행 가능성에 대한 우려다.

▷한국 무용계의 논문표절이 심각하다. 각기 다른 사람이 쓴 석사학위논문 중 ‘백조의 호수’를 패러디한 작품을 비교 분석한 표. 두 표의 내용이 완전히 일치한다. ※출처: <국민일보>, 2008.4.27.

□ 실기교수, 학위 필요하나= 홍익대 첫 실기과 박사인 김재관 청주대 교수(회화)는 “외국에도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 박사논문을 받은 사람들이 다수 있다. 실기 교수라도 자신의 논문을 이성적인 판단기준으로 분석해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미술은 사상적·개념적·철학적인 배경이 깔린 경우가 많아 작가의 논문이 중요해졌고, 이는 세계 미술계의 흐름”이라고 밝혔다.

10년 전부터 실기분야 외국학위과정을 이수한 졸업생이 많아지자 “실기부문이라고 해서 학위보다 경력만을 인정해서는 안 될 상황”이 됐다.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무용)는 “이제 이론분야 학위소지자가 늘어난 만큼 대학에서 예술 이론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박사학위가 보다 더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사학위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추세는 그렇다면 과연 누가 박사학위논문을 심사할 수 있는가라는 또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더해 대학이 교수 임용기준이나 업적평가에서 박사학위나 논문실적을 요구하는 것도 실기교수들이 성급하게 학위와 논문실적을 만들기 위해 표절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 실기교수, 논문지도 해야하나= 김재관 교수는 “논문 심사 시스템에서, 실기로 교수가 된 기존 교수들이 작품의 수준을 판단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하려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박사학위논문 심사는 이론을 전공해 학문적 깊이가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게 마땅한데, 실기 교수들이 논문심사를 하려고 하니 쉽게 아무데서나 박사학위논문을 만들어 오게 된다. 학위논문을 제대로 써보지 않은 교수가 학생들 논문을 심사하려니 학위논문 심사가 철저하게 이뤄질 수 없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실기 전공 교수들은 그들의 이권을 위해 논문에 관여하는 제도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휘준 석좌교수는 “작가교육 과정에서 미술이론 교육은 필수적이긴 하지만 논문이 창작의 의무인 작가들의 작품 활동에 부담을 주는 면도 있다”면서 “미술 이론 연구나 교육은 이론 전문가에게 맡기고 창작은 창작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안 교수는 “창작과 이론 수업을 엄격히 분리하고 대학 안에서 인문대학과 연계해 이론 교육은 이론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맡기는 게 효율적”이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이 모든 논란의 가운데에는 ‘인정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적 풍조가 작용한다는 진단도 있다. 미술실기를 담당하는 ㅈ아무개 교수는 “교수 승진에 있어 논문과 같은 연구실적 외 개인전이나 전시회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연구업적 평가를 받을 수 있어서 굳이 논문에 구애받지 않아도 된다”면서 “실기로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라도 향후 대학에서 보직을 맡거나, 사회적 활동을 하려고 염두에 두다보니 박사라는 학력을 인정받고 싶어한다”고 지적했다. ‘신정아’의 에피고넨이 아직도 배회하고 있는 사회라는 진단이다.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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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2008-05-24 02:24:59
위 기사 중 'ㅂ아무개큐레이터가 말한 예술과시민사회 대표와 ㅇ교수가 전혀 무관하지 않은 관계이므로 개인적 폭로로 비춰질 수 있다라는 인용 부분'의 문장 전체를 삭제합니다.
예술과 시민사회 오상길 대표는 “이번 표절문제 제기는 ‘예술과시민사회’ 조사팀에서 7개월에 걸쳐 진행한 성과다. 예술계 자정운동 차원에서 진행하는 작업이다”라고 밝히면서 “대표의 사적 관계가 전혀 끼어들 부분이 없는 투명한 문제제기”라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또 오 대표는 “표절 당사자들이 퍼뜨리는 음해성 루머가 많다. 한국현대미술메타비평가들이 표절을 추적했고, 일부 교수들도 이 표절 문제제기 과정에 자문을 해주는 등, 합리적 절차에 따라 진행된 공정한 문제제기”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교수신문은 ㅂ큐레이터의 지적이 예술과 시민사회 활동을 왜곡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 문제된 부분을 삭제합니다.
예술과시민사회의 이번 표절문제제기 노력이 미술계자정운동으로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기를 기대합니다.

오상길 2008-05-19 18:48:25
박상주 기자님, 예술과 시민사회 대표직을 맡고 있는 오상길입니다. 대외접촉팀장님을 통해 정정보도 요청을 했는데, 거절하셨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전화를 했으나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이곳에 글을 남깁니다.
예술과 시민사회는 500명이 넘는 회원이 참여하고 있는 시민단체이고, 이번 표절논문조사는 ㄱ팀장이 주축이 되어 7개월 가량 많은 회원들이 실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업입니다. 이런 일을 대표인 저와 이모 교수의 관계운운하며 사적인 폭로인양 호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사실관계에도 어긋나고 경우에 따라 예술과 시민사회의 활동을 음해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결코 가벼이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해당 기사 내용이 심각한 상황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신중히 생각하시고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상주 2008-05-19 17:28:01
<예술과시민사회>의 지적에 따라, '폭로된 표절 실태'의 단락의 45편->39편, 원문이 된 학위논문 중 18편이 표절, ㅎ대 14건->17명에 20편, 박사학위 논문 1편->국내 3편, 해외 1편, 42편의 논문->45편의 논문 등으로 발표내용을 일부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