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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인문학 위기담론의 허구성
[문화비평] 인문학 위기담론의 허구성
  • 김진석/인하대
  • 승인 2000.12.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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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대학, 특히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말이 무성하다. 최근에는 전국 대학의 인문(과)학 연구소들이 대책을 논의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위기' 담론들은 많은 경우 '위기'를 제대로 진단하기는커녕 그 맥락을 헛짚으며 때로는 보수·수구적인 관점에서 '위기'를 부풀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인문학이 단순히 문화 산업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많건 적건 그 안에 있다는 점에서, 인문의 위기는 학술뿐 아니라 문화 차원의 접근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도 버려야할 것은 대학과 시장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관념적 도덕주의이다. 물론 우리는 과도한 시장 논리 및 맹목적인 경쟁 이데올로기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장 전체주의'와 대학을 순전한 대립 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대학에 대한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도정일 교수가 말하는 위기 담론이 이 경향을 띤다. 도 교수는 경쟁적 세계시장 체제를 부인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도, '오로지' 시장 논리를 모든 영역에 확대시키는 '시장 전체주의'와 대학을 대립시킨다. "교육은 전적으로 시장 경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제도가 아니다"라는 식의 말은 명분은 좋지만, 사실은 시장 논리가 사회를 '전적으로' 혹은 '전면 규정'한다는 총체주의적 근본주의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순진하고 과장된 이분법은 악마를 과대 포장한다는 점에서 현실에 대한 냉정한 서술은 아니며, 현실에 대한 능동적인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도덕적 명분을 축적하는 데 치우치는 듯하다.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띠기는 하지만 대학이 시장과 권력과 명예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있었을까? 좌파·진보적이라고 하면서 왜 그 점에는 눈을 감는 것일까.

위기의 대책으로 사람들은 흔히 빈약한 연구비를 거론하는데, 낯뜨겁고 때로는 한심하다. 연구비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가? 시장 아니면 국가일 것이다. 시장 논리는 거부하면서 시장을 받치는 연구비는 왜 거부하지 않는가? 시장은 그렇다 치고 정부와 국가에서 주는 돈은 그냥 받아도 좋은 것일까? 자율성을 주장하는 인문학이 국가 관리를 양성하는 목적에 봉사했다는 점은 독일 이상주의 철학의 근거지인 19세기 초 프로이센의 대학뿐 아니라 동양의 (특히 과거시험을 통한) 봉건적 전통에서도 드러난다. 대학과 인문학에 대한 상투적 이상주의를 버리고, 현실적 존립 근거에 대해 성찰하자.

현실적이고도 섬세한 구분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필요하다. 미국 중심의 세계화와 시장논리를 맹목적으로 유포하는 신자유주의를 경계하는 일과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일은 백 번 옳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대응은 세계 체제의 차원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봉건적 경제질서를 깨기 위해 일정 정도 전략적으로 자유주의적 경쟁을 도입할 필요도 있는 것처럼, 봉건적 대학체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경우에 新자유주의와 舊자유주의를 구분하는 어려움이 있고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이미 좋은 사회민주주의적 질서를 갖춘 유럽이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경계하는 경우와 한국의 경우는 공통점 못지 않게 다른 점도 있다. 언어-정치적으로도 불어와 독어는 영어에 저항할 여지를 비교적 많이 확보하고 있는 반면에 한국어는 훨씬 그렇지 못하듯이.

또 위기 담론은 인문학이 인간 존재에 관한 유일하고도 독점적인 권한을 가진다고 설정한 후 그것이 훼손되고 있다고 말한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혹은 실용과학에 대한 불변의 권한이나 경계, 이런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애매하다. 유럽에서 중세적 '철학부'가 분열하면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낳았을 뿐 아니라, 이들 사이의 구분조차도 오래 전부터 유명무실할 정도로 오늘날 경계들은 삼투하고 침투한다. 또 '기초학문의 위기'라는 구호도 반은 진부하거나 상투적이다. 혹자는 말과 글을 배우는 것이 인문학의 고유한 임무라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인문학을 기초화하는 것이 오히려 공허하거나 해로운 면도 있다. 실제로 어문학과가 실용적인 회화수업을 전담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연구의 질에 관한 내부적인 토론이나 평가를 거치는 대신 그 자체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자연과학적 모델을 따른다는 점, 그리고 무조건 회원 수가 많은 전국 규모의 학회지를 연구 평가의 잣대로 삼는다는 점, 교수들 사이의 초빙이나 수평이동이 부재하다는 점, 또 비교적 현실적인 작업을 하거나 계간지 등에 글을 쓰는 작업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들은 인문학자들 내부의 분열과 갈등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들의 자체적 문제 해결 능력을 의심하게 한다.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 맞물린 내부의 문제일 것이다. 위기 담론은 많은 경우 '위기'를 일반화하는 대신 대학의 고질적인 내부 문제를 은폐한다 (다른 예. 독점적 특권에 근거한 서울대가 오히려 기초학문뿐 아니라 사회질서를 왜곡하고 부실화시킨다). 그러면서 내부 개혁에 대해서는 침묵시키고, 바깥에서 핑계와 희생양을 구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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