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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본토 겨냥한 ‘R-7’, ‘스푸트닉 1호’ 우주궤도에 올려
미 본토 겨냥한 ‘R-7’, ‘스푸트닉 1호’ 우주궤도에 올려
  • 하성업/러시아통신원·모스코바국립항공대 박사과정
  • 승인 2008.04.2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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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초점]한국 우주인 태운 러시아의 ‘소유즈’ 탄생 배경

지난 8일은 한국 첫 우주인이 탄생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많은 국민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한국 우주인이 우주로 떠나는 장면을 바라봤으며, 신문과 방송에서는 한국 우주인이 타고 떠나는 발사체, 우주선 그리고 우주정거장 등에 대해 많은 기사를 쏟아냈다. 역시 최고 장관은 우주발사체가 불을 뿜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독특한 모양으로 러시아 우주발사체가 우주로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신문·방송에서는 이 발사체에 대해 이런저런 많은 기사가 올라왔었다.

발사체 관련 이야기는 비단 우주공학 분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주발사체 기원은 인류가 우주에 나가는 수단으로 개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발사체의 원천기술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의 탄도미사일 개발에서 시작됐다. 이 기술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 격랑의 세계근대사 속에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 이번에 한국 우주인을 싣고 우주를 향한 우주발사체의 역사적 흔적을 되짚어 보자.

한국인이 올라간 러시아 발사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액체추진제 로켓을 최초로 실용화 한 독일에서 그 이야기를 출발해야 한다.

신무기에서 시작된 우주연구의 꿈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은 비밀리에 독특한 두 개의 신무기를 개발했다. 하나는 ‘V-1’이라고 부르는 무인비행기로, 내부에 폭발물을 장착하고 일정거리를 비행한 후 엔진이 정지, 추락하는 방식으로 오늘날 크루즈미사일의 효시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무기는 ‘V-2’라고 부르는 최초의 탄도미사일로 오늘날에는 이를 단거리탄도미사일(SRBM)로 분류한다. ‘V-2’는 75%의 알코올을 연료로, 액체산소를 산화제로 사용한다. 추진제는 연소실에 고압으로 공급되는 과산화수소를 촉매·분해한 고온기체로 터보펌프를 돌렸다. 유럽 본토로부터 영국 런던을 직접 타격했던 이 무기는 당시 연합군측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공포의 무기였다. 그러나 정확하지 못한 유도제어로 전술적 목표물을 정밀타격하지 못하고, 단지 목적지 인근에 무작위로 떨어져 실효성 면에서는 그리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V-2’가 개발 완료된 시점은 이미 전세가 연합군으로 상당히 기울어진 이후, 즉 종전 직전인데다 ‘V-2’의 제작에 너무 많은 자원이 들어간다는 점도 큰 문제였다. 결국 독일은 패전했다.

당시 독일은 미국을 직접 타격하기 위한 다단 개념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실질적으로 준비 중에 있었다. 그러나 종전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역사가들은 독일의 “V-2 개발시점이 좀 더 빨랐으면 2차 세계대전의 승자는 독일이 될 수도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V-2’ 기술은 종전과 함께 미국과 소련으로 전해졌으며, 미국과 소련의 탄도미사일, 우주발사체의 기원이 되었다. 따라서 로켓 분야에서는 ‘V-2’를 ‘우주발사체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終戰은 ‘우주전쟁’이라는 새로운 냉전의 시작이 됐다. 그동안 단순한 흥밋거리에 불과했던 로켓의 군사적 잠재적 위력을 확인한 미국과 소련은 독일의 ‘V-2’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때 ‘V-2’ 개발자 폰 브라운과 다수의 주요 엔지니어들이 혼란 속 독일에서 살아남고자 스스로 미군에 투항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한 일행의 길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전범국가 출신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감시의 대상이 됐으며, 개발참여도 번번이 좌절됐다. 이후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소련이 로켓분야에서 미국을 상당히 앞서나가자 위기를 느낀 미국은 결국 폰 브라운에게 손을 내밀었으며, 이후 그는 세턴 로켓(아폴로 프로젝트)을 개발, 인류를 달에 보내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폰 브라운은 미 우주개발 역사만 보면 미국의 국가적 영웅임에 틀림없었으나, 2차 세계대전 전범이라는 전과가 그를 계속 괴롭혔다. 국가적 입장에서도 전범의 힘을 빌려 우주를 개발했다는 윤리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소련은 미국에 비해 한발 늦게 독일에 도착했다. 책임자와 주요기술자, 중요문건이 이미 미국으로 넘어간 후였지만, 당시 로켓엔지니어였던 꼬롤료프를 독일에 파견해 남아있는 부품과 정보를 최대한 수집, ‘V-2’를 복제하기에 이른다. 이 복제된 소련형 ‘V-2’는 ‘R-1’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됐다.
‘R-1’의 성공적인 복제 이후 소련은 ‘R-2’, ‘R-3’ 등 새로운 단거리 및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계속 개발했다. 일련의 연구가 한창 진행되는 중 소련에서는 핵무기 위력을 능가하는 대량살상무기가 개발됐다. 그것은 수소폭탄이었다.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성공적 개발을 이룬 소련으로서는 이 수소폭탄을 미 본토로 향해 항공기 등을 이용하지 않고 바로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운송수단, 즉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개발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이다.

‘R-7’의 추진기관은 기본적으로 독일의 ‘V-2’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연료는 케로신(등유)으로 바뀌었으나, 산화제는 액체산소를, 그리고 터보펌프 구동에는 과산화수소를 촉매·분해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등 ‘V-2’의 기본구조를 그대로 사용했다. ‘R-7’은 큰 추력을 내기위해 대형 연소실을 개발하는 대신 하나의 터보펌프로 4개의 작은 연소실에 추진제를 공급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래서 이 발사체 하단을 보면 20개의 연소실이 보이기는 하나 실제 엔진 개수는 5개라 말한다.

‘R-7’ 개발을 책임졌던 꼬롤료프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었다. 인류의 우주진출. 꼬롤료프는 대륙간탄도미사일과 우주발사체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음을 역설하고 인공위성을 만들어 우주에 올리고자 했다. 그러나 오직 대륙간탄도미사일 용도에만 관심이 있었던 정부는 추가 개발을 쉽게 승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꼬롤료프의 끈질긴 설득으로 소련정부는 이를 승인했고, 1954년 10월 4일 인류는 최초의 인공구조물 ‘스푸트닉 1호’를 ‘R-7’을 이용해 우주 궤도에 올리게 됐다.

인공위성의 성공은 예상외의 반향을 몰고 왔다. 미국은 소련의 인공위성이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공포에 빠졌다. 소련당국은 뒤늦게 우주개발의 군사적 이점을 깨닫고 본격적인 우주개발을 승인하게 된다. 이후 대륙간탄도미사일에서 우주발사체로 자리매김한 ‘R-7’은 최초의 동물실험, 최초우주인, 최초여성우주인, 최초우주유영 등 다수의 기록을 내는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이번 한국의 우주인 역시 바로 이 기종을 사용해 우주정거장으로 향했다.

유리가가린 우주선, 소유즈 아닌 보스톡
때때로 ‘R-7’ 계열 발사체는 명칭 때문에 많은 혼란을 겪기도 했다. ‘R-7’ 계열이 탑재체에 따라 ‘스푸트닉’, ‘루나’, ‘보스톡’, ‘몰랴’, ‘보스호드’, ‘소유즈’ 등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현재 많은 언론에서는 “소유즈 발사체로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올라갔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실제 유리 가가린이 타고 올라간 기종은 ‘R-7’ 계열 중 ‘소유즈’가 아닌 ‘보스톡’이었다.
지금까지 인류는 약 5천회의 유·무인 우주발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단일 계열인 ‘R-7’은 전체 횟수의 1/3에 해당하는 무려 1천700 여회 발사를 수행했고, 높은 발사성공률을 보여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기종이다. 그 중 ‘소유즈’는 약 98%의 성공률을 가지고 있는 기종이며, 특히 최근의 기록은 거의 100%에 육박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현재 사용 중인 우주발사체들은 대략 90% 정도의 발사성공률을 보이고 있으며, 이 중 95% 이상을 보이는 기종은 ‘R-7’ 외 미국의 우주왕복선, 델타, 러시아의 코스모스, 사이클론 등 불과 몇 기종으로 국한된다.
무인 발사의 경우도 물론이지만, 유인 프로그램에서의 발사 성공률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98%의 성공률이라 하면 50번 중 한 번, 95%의 성공률은 20번 중 한 번 정도 발사에 실패하고 우주인들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소유즈’의 성공률과 그 역할은 가히 경이적이라 말할만하다.

지금까지 많은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한국의 첫 우주인이 탄생했다. 아직 우리나라는 인공위성 분야에서 다소 앞서 있을 뿐, 우주인 프로그램도, 우주발사체 프로그램도 우주개발국들 중 저 먼 발치 아래에 놓여 있을 뿐이다. 현재 우주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일회성으로 끊이지 않고 향후 한국의 우주개발 초석이 되길 바란다.

하성업/러시아통신원·모스코바국립항공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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