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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편지’의 위험성과 중요성
은밀한 ‘편지’의 위험성과 중요성
  • 이영범 / 독일 만하임대 박사과정·독문학
  • 승인 2008.04.2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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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학술동향] 독일의 칼 슈미트 부활 논쟁

한 동안 이름을 거명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던 칼 슈미트가 21세기에 다시 부활했다. 프랑스에서는 그의 전집이 번역되면서 칼 슈미트의 좌파적 수용이 가능한가에 대한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자율평론> 13호, 좌파의 칼 슈미트 수용 논쟁 참조). 데리다와 아감벤과 같은 스타 철학자들에게도 칼 슈미트는 어떤 식으로든 대결을 피할 수 없는 상대가 돼버렸다.

독일의 문화적 지형 내에서도 칼 슈미트에 대한 호기심이 감지된다. 역사는 장미수 향기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피가 흐르고 있을 뿐이라는 그의 비극적 생활감정은 ‘지배와 구원’(얀 아스만)에 대한 은밀한 동경과 마틴 발저와 같은 문학적 반유태주의를 자극하고 있다. 슈미트 사상의 유령은 UN에 대한 페터 한트케의 증오나, 보토 슈트라우스와 같은 작가의 거만한 엘리트주의와 민주주의와 대중에 대한 그의 경멸에서도 출몰한다.

최근 독일에서 출간된 칼 슈미트의 3편의 서신교환은 그런 점에서 그의 저서와 논문에서 나타나지 않은 그의 인간적 측면을 통해 그의 사상에 접근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레타 윙어와 슈미트의 서신교환에서는 박해자이면서도 스스로를 희생자로 생각하는 그의 망상이 감지된다. 그는 나치 정부의 ‘계관 법학자’로 활동을 했고, 1945년 이후 짧은 구금생활을 한 뒤 강제포로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꿈꿀 수조차 없는 연금을 받으며 생활을 했음에도 스스로를 ‘정신적 인신제물’의 희생양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그는 편지글에서 전쟁의 승리자들이 생존자들과 자신을 “유대의식에 따라 도살하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작가 에른스트 윙어의 첫 부인인 그레타 윙어는 슈미트와 1934년부터 1953년까지 꾸준한 서신교환을 했는데, 사후에 출간된 그의 일기인 『Glossarium』에서는 놀랍게도 에른스트 윙어에 대한 증오로 가득찬 구절들이 발견됐다. 이는 에르스트 윙어가 1948년부터 다시 출판활동을 허락받고 곧 바로 존경받는 작가가 됐던 반면, 자신은 연금생활로 인해 그런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는 질투심의 표현이었다. 그레타 윙어와의 교류를 중단하지 않았던 까닭은 그녀를 통해 제 3자의 성공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슈미트의 전략적 처신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박사학위를 수여한 14살 연하의 제자 에른스트 포르스트호프와의 서신교환에서는 그 당시 ‘보수 혁명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속성과 초기 나치들과 파시스트 당원들과의 다양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포르스트호프는 여러 차례 실패를 경험한 후 1952년에 비로소 정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역시 교수가 됐다는 사실을 기뻐하기보다는 다른 전범들에 비해 늦게 기회를 얻게 됐었다는 사실을 불만스러워 했다. 다행히 그와 슈미트가 주고받은 서신들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공통적인 학문적 견해로 인해 그레타와의 서신교환에서 발견되는 긴장감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들의 서신 교환은 상호간에 대한 전략적 충고와 학문적 공동 네트워크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앞 선 두 편과 달리 한스 블루멘베르크와 슈미트 간의 편지글은 30쪽 가량의 적은 분량이지만, 블루멘베르크의 『근대의 정당성』, 『세속화와 자기주장』, 『신화의 작업』 등에서 발췌한 슈미트와 연관된 구절들과 슈미트의 『정치신학 II』의 해당구절에 대한 발췌본을 싣고 있어 이 양자의 지적 긴장감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흥미로운 점은 카톨릭교도인 슈미트와 세속화된 유대인인 블루멘베르크가 어떤 점에서 지적 친화성을 형성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슈미트의 ‘정치신학’에서 핵심은 정치적 개념들이 신학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 주권성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정당화되며, 다른 한편으로 민주주의 국가는 주권자의 결단이 아닌 절차에 의해 규칙들을 제정함으로써 ‘정치적인 것’ 아래의 영역에 놓이게 되고 결국 국가로서 자신을 해체하게 된다.

블루멘베르크는 슈미트의 테제를 구조적 차원이 아니라 근대의 맥락 내의 기능적 차원에서 수용한다. 즉 세속화 과정을 신학적 내용의 변형과정으로 이해하는 대신, 절대적 주관성, 진보, 역사, 국가와 같은 개념들이 신학을 대신해 그와 유사한 기능을 담당하게 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결국 슈미트와 블루멘베르크는 박해자와 피박해자라는 역사적 좌표 안에서 만나게 됐지만, 근대의 신화적(신학적) 유산에 대한 유사한 학문적 관심이 이들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 3편의 편지글들은 칼 슈미트의 사상이 지닌 위험성과 중요성을 동시에 시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이든 좋다”(Anything goes)는 식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나간 자리에 정신적 영도자와 형이상학적 명령에 대한 은밀한 동경이 자라나고, 슈미트의 결단론이 다시 부활하는 움직임은 파시즘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망각할 때 위험의 징후로 감지된다. 중대한 사안에서 어떻게 결정되는가보다 결단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될 때, 세계의 질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영범 / 독일 만하임대 박사과정·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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