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6 13:25 (화)
[문화비평]‘人體神秘展’, 미래에서 온 범죄
[문화비평]‘人體神秘展’, 미래에서 온 범죄
  • 김영민 / 철학자
  • 승인 2008.04.14 14: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일제 관동군 731부대에 관한 ‘野事’가 전하는 귀신 이야기 한 토막.
어느 건물의 지하동에는 인간 신체의 장기와 부위들을 해부한 채로 병에 담아 전시한 곳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근육 표본의 일부로 어깨부터 손톱까지 온전한 팔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팔의 주인인 중국인 마루타는 용케 그 건물의 청소부로 얼마간 연명했고, 자신의 팔이 담긴 용기를 지날 때마다 한 동안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내 팔!(我的手臂!)이라고 짧게 탄식하곤 했다고 한다. 얼마후 그 불행한 사내는 자살로 생을 마쳤는데, 이후 그 표본실 일대에서그가 죽은 시간만 되면 ‘내…팔!’이라고 외치는 그 외팔이 사내의 호소가 終戰까지도 되풀이됐다는 것.  예수의 죽음으로 신비화, 낭만화된 십자가 처형은 애초 근동지방에서 지하의 신들을 위한 희생제의의 방식으로 쓰이던 것이었다. 그것은 워낙 고대의 유산으로 극형 중의 극형이었다. 이 형벌은 중대한 범죄일 경우 로마 시민들조차 가리지 않아, 그 형벌의 치욕을 강조했다.


사계의 권위인 헹엘(Martin Hengel)의 설명에 의하면, 십자가 형벌이 노린 최고의 가치는 그 시신을 매장할 수 없다는 사실에 따른 수치감의 대중적 公表였다. 예수는 운이 좋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호의로 매장됐다고 기록돼 있지만, 그 저주받은 나무(arbor infelix)에서 숨이 끊어진 시체들은 대체로 들개나 새들의 먹이로 주어진다. 요체는, (바타이유가 몇 차례 상설한 바가 있지만) 고중세인들의 경우 시신을 적절히 매장하지 못하는 일의 치욕과 슬픔은 우리 현대인들이 영영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서구 자유주의의 이론적 건축가의 한 사람인 로크는 홉즈와는 달리  자유주의의 근간을 소유권에 둔다: “권력은 가능한 한 한 사회의 전구성원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통치론)이다.

물론 자기신체의 자기소유권은 그 핵심에 해당한다. 소유권의 확보와 유지로 귀결되는 자유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의 길과 상통하는 것으로, 이는 기껏 절반의 성공이었다는 사실이 근현대사를 통해 아프게 증명된 바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본주의의 끝물에서 이른바 ‘신체포기 각서’가 횡행하거나 자신의 신체 일부가 거래의 대상으로 처분되거나 公益의 이름 아래 자신의 시신마저 공적으로 가공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은 또한 역설적이다.

결국 로크나 그의 동료들이 서구 자유주의의 토대로 삼은 신체의 자기소유권은 바로 그 자유주의의 역설에 의해 자가당착에 빠진다. 이젠 더 이상 사회적 약자들과 빈자들의 신체가 십자가 달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신체는 자본주의와 기술주의가 비도덕적으로 합류하는 곳곳에서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그 몸들은 제멋대로 분배되고, 팔리고, 전시되는 것이다.

‘인체신비전’이라는 이름의 첨단 광기가 유통되고 있다. 전국적으로, 아니 전세계적으로 팔리고 있다. 교양과 신비라는 이름 아래 호기심에 얹힌 구경꾼들을 인체 백화점으로 끌어 모으고 있다. 인간의 신체들을 전시가치(Ausstellungswert)로 환원시켜 상품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마녀라는 사회적 약자의 화형을 앞다투어 관람했던 그 인간들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만물의 상품화 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그 외부 없는 탈제국의 제국을 석권했듯이, 리 호이나키나 자크 엘루의 지적처럼 기술주의의 전일적·몰정치적 수렴성은 삶의 근원적 조건인 땅과 몸의 한계를 곧잘 잊고 기술의 제국주의로 치닫는다.

조르조 아감벤은 푸코나 아렌트를 잇는 생명정치적 논의의 맥락에서, 현대 주권 권력의 근본적 행위가 ‘벌거벗은 생명을 아무런 매개 없이 정치에 노출시키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20세기에 들어 가능해진 정치와
과학기술의 완벽한 조응에 의해 이른바  ‘새로운 시체’, ‘심층코마환자’, ‘거짓 생명체’ 등이 예외의 공간 속에 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요체는 ‘인체신비전’이라는 그 풍경의 전후, 혹은 그 과거와 미래에 놓여 있다. 과거의 문제는 절대적 타자/약자로서의 인간의 시체, 혹은 시체가 된 인간이 물건, 상품, 그리고 스펙타클로 물화된 채 영영 자신의 권리를 유린당한다는 사실이다(거꾸로, 도시의 24시간화로도 사라지지 않는 그 숱한 ‘귀신 이야기’들은 바로 그 절대적 약자의 권리를 복권하려는 대중적 욕망의 서사화다). 미래의 문제는 ‘인체신비전’이라는 형식이 품은 그 잠재적 범죄성에 있다. ‘인체신비전’은 미래에서 찾아온(올) 괴기스런 범죄의 흔적으로, 교양이나 신비라는 풍경의 틀 속에 묶여 있는 그 모든 구경꾼들을 공범의 시야 속으로 내몬다. 미래에서 찾아온 이 범죄의 징조는 미래로 다가서는 우리들의 운명이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시체들의 공화국’!

김영민 / 철학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