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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문명’의 새로운 운명
‘자본주의 문명’의 새로운 운명
  • 교수신문
  • 승인 2008.04.1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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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단_‘문화정치’와 ‘문화경제’를 생각하다

이제는 기억 속에 아련해진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보려 한다. 표면적으로 외설시비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사건은 비단 문화예술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권력집단과 시민사회, 진보세력과 보수세력, 상이한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의  매스컴과 그룹들의 속성과 역학관계의 여러 면을 가차 없이 노정시켰기 때문이다. 마광수 교수는 1989년 수필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사회적 논쟁을 유발시켰고, 소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으로 1992년 10월 전격 구속됐다. 그는 그해 12월 징역 2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구속되자마자 문화부는 『즐거운 사라』를 판금시켰다. 사건 직후 연세대 국문학과에서 해직됐던 그는 지난 98년에야 복권됐지만, 재임용 탈락 등 우여곡절 끝에 대학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자유주의자 마광수의 주장과 저항(?)에 더불어 이를 둘러싼 검찰 등의 국가권력, 이에 대한 진보·보수 세력들의 대응은 의미심장해 보였다.

마광수 옹호론의 요지는 그가 성의 자유를 통해 한국사회 억압구조를 폭로했다는  것이다. 마광수 필화사건은 보수적 권위주의, 권위주의적 횡포, 광적인 집단주의, 전체주의적 억압, 나아가서 사회적 통념에 대한 저항으로까지 언급되기도 했다. 마광수는 표현의 자유나 성 논의의 개방, 합리적 개인주의 등 기본적인 자유주의에 집착하고 있으며 보수적 전제주의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순수한 자유주의자’로 평가된다(최연구, 「보수적 권위주의에 짓눌린 순수한 자유주의자, 마광수」, 『마광수 살리기(중심, 2002)』).

마광수 교수는 필화사건을 겪고 나서 ‘개개인의 생각과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세상’ 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고 밝혔다. 자신이 학기 도중 인신 구속까지 당해 유례 없는 법적 폭력의 피해를 입은 것은 표현의 자유나 절차의 민주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성에 대한 논의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위선적 이중성에 바탕한 ‘도덕적 테러리즘’ 현상만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의 낙후된 경직성 때문이었다고 강변했다(마광수, 『운명』). 또 마광수는 자신은 정치적인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성급한 체제전복에는 반대하며, 단지 문화적 자유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돕고자 했다는 것이다(<관악>, 1997년 여름호).

이러한 마광수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진보·보수를 망라해 전방위적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권위주의 국가 권력에 대해 그렇게 오랜 세월 투쟁해온 진보진영이 한국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인 1993년 전후로 성의 개방적 논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에 대한 국가권력의 억압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한 어떻게 검찰의 강제력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대응이 유사할 수 있는가.

일부에서는 한국사회의 두 가지 금기사항을 이데올로기와 성의 문제로 파악해 진보진영의 이데올로기 투쟁과 마광수의 성담론 문제제기를 동일한 차원에서 거론했다. ‘남북분단: 매카시즘’의 관계는 ‘전통적 윤리와 현실과의 괴리: 마광수 탄압’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강준만, 「마광수를 위한 변명」, 『마광수 살리기』). 이런 맥락에서 강준만 교수는 마광수와 진보주의자는 같은 배를 탔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마광수에 대한 진보진영마저의 비판과 적대적 입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보수세력들이 ‘자유주의자’ 마광수에 대한 국가권력의 행사를 찬성하는 것까지는 이해되나, 진보진영의 대응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오랜기간 권위주의 국가권력에 저항해온 진보진영이 국가권력의 자유주의자 억압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민주화가 개혁의 기치 아래 전향적으로 진행된 1993년 김영삼 정부 시절에 말이다. 몇 가지 함정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관건은 이데올로기/정치/권력과 문화의 관계일 것이다. 어떠한 이데올로기, 예를 들어 사회주의든 자유주의든, 권위주의든 민주주의든 그 체제에 국가권력이 필요하고 또 구축되어 있는 한,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反문화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화는 시민사회의 토대 속에서 그 토대를 통해 형성 정착될 수 있으며, 반면 국가는 이를 규제ㆍ관리ㆍ조작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도식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보수체제, 진보체제 공히 국가권력을 통해 문화를 주도하고 활용하려하는데, 전자는 여기다 경제적(친자본주의적 혹은 친자본적) 논리를, 후자는 여기다 정치적(인민 지배 지향의 국가 혹은 당과 관련된) 논리를 강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이를 보수체제의 ‘문화경제’와 진보체제의 ‘문화정치’로 인식한다.    

한국의 보수정치세력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집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면서 진보진영에 대한 비판의 기치를 들고 18대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했다. 과연 그 두 정권이 ‘진보적’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문화정책과 관련된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은 봇물터지듯 했다. 한마디로 노무현 좌파정권이 문화계를 장악하기 위해서 노정권과 ‘코드’가 맞는 좌파인사들을 전면 배치하고 좌파정책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흔히 알려져 있듯 노사모 출신의 일부 영화계 인사들이 노무현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 되면서 문화세력으로서 튀는 모습들을 보이기도 했고, 특히 ‘문화연대’등은 막강한 문화정치 세력으로 부각됐다. 1999년 정부의 문화정책을 감시하겠다는 취지를 가진 문화연대는 “오늘날 가장 큰 문화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국가와 시장 그리고 문화제국주의 세력”이라면서 “국가기관과 자본에 의한 문화권력 및 자원의 독점 경향, 다국적 문화산업의 침탈에 따른 문제점을 비판하고 시정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선포했다. 진단은 일리 있으나 노무현 정부와 더불어 진보적 문화세력들의 행태는 너무 설익고 역량부족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집권에 대한 반감의 반사이익(?)으로 실은 심각한 악재들에도 불구하고 수월하게 집권을 시작하고 이번 총선에서마저 압승을 거두긴 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미숙한 행태들을 노출했고 심심찮게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최근 발언들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심각한 우려를 촉발시켰다. 유 장관은 노무현 정부의 소위 ‘코드인사’의 유산으로서 문화계의 인적 청산의 매카시즘을 가동시켰다. 회고컨대 노무현 정부의 첫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창동 감독은 ‘문화가 정치경제를 이끄는 세계로의 꿈’, ‘문화적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틀’ 등 다소 이상론적이지만 방향은 제대로 잡은 세계관을 피력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문화부가 먼저 권위주의의 두꺼운 철갑옷을 벗어던지고 부드러운 문화의 비단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의 신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에 비해 심각한 함량미달에, 게다가 오류로 판명난 좌파들의 문화혁명식 반문화적 정치공세를 취하는 것으로 신고식을 했다. 자유민주주의 하에서 진보세력의 ‘문화정치’는 아무리 오버해도 민주적 제도의 제약과 견제, 사회 곳곳에 깔려있는 ‘자본주의 문명’의 반격을 받게 돼 있다. 노무현 정부하의 진보적 문화세력이 요란했던 것에 비해 그다지 결실을 맺지 못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보수 우파의 ‘문화경제’ 논리는 좀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본적으로 막강한 자본을 토대로 그것이 다양한 층위와 측면에서 장악하고 침투한 ‘자본주의 문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오류로 판명난 반문화적·정치적 강제력마저 동원한다면 이는 스스로의 논리에도 배치된다.

진정한 보수주의 체제는 시장의 자율성과 자유로운 시민사회를 바탕으로 제대로 작동할 수 있으며 이러한 순기능을 통해서 자유롭게 행해진 ‘타락’과 실책마저 자율적으로 교정될 수 있으며, 그것이 이데올로기나 국가권력에 의한 교정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그 체제의 근본적 존재이유인 것이다. 그 ‘자본주의 문명’의 한 층위 속, 자본으로 구조화되고 침투된 문화토양에서, 동시에 (민주적일지라도) 권력에 의해 형해화된 문화지형에서, 또한 쁘띠 부르주아의 (외양으로는 체제비판적이지만 실은 체제함몰적인) 모순되고 이중적인 문화논리 속에서 자본과 권력의 거대한 카르텔에 어떻게 대항하며, 제도적 민주주의의 파장이 미치지 못하는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인 세계관/헤게모니(대항헤게모니) 투쟁을 지속시킬 수 있을지는 시민사회의 또다른 과제이자 ‘자본주의 문명’의 새로운 운명이 될 것이다.     

강문구 / 경남대·정치학

필자는 미국 뉴멕시코대에서 ‘한국 군부의 정치개입에 관한 연구:1979년~1980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민주화의 비판적 탐색』,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와 진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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