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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권운동에 던진 도전적 ‘요청’
한국 인권운동에 던진 도전적 ‘요청’
  • 류은숙 / 인권연구소 창·인권운동가
  • 승인 2008.04.14 14: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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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 『인권의 문법』 조효제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

길지 않은 인권운동 또는 인권교육 활동이란 걸 하면서 자주 받는 어려운 질문이 ‘인권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뭘 읽어야 하나요’라는 것이다. 정말 대답하기가 어렵다. 망설이다가 결국 ‘인권관련 저작이나 출판이 한국 사회에는 너무 없거든요, 그래서 추천 드리기가 곤란하네요’란 답이 아닌 답을 하곤 했다. 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적극적으로 추천도서를 대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나마 얼버무렸던 대답에 숨통을 트이게 한 것이 『인권의 문법』이다. 적어도 인권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정독을 권할 수 있는 책이 등장한 것이다. 『인권의 문법』은 저자가 목적한 대로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둔 책”이다. 이심전심으로 인권운동의 고민을 이해하고 있는 한편, 성실한 수험생의 학습노트를 보는 것처럼 인권이론의 전개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인권에 대해 그저 좋은 것이라 하면서 얼버무려왔던 단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됐다. 저자가 서문에서 지적한대로 그간 인권의 서사 방식은 ‘전문적·근원적·응용적’ 서사방식 중 어느 한편에 치우친 것이었고, “인권개념을 선험적이고 절대적이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최고선으로 단순화해서 기술”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무턱대고 ‘천부인권’이라 하는 것 말고는 인권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는 것,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국제인권규범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국내인권현황을 비판하는 것, 인권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초월하는 그 무엇이라는 우월감에 취하는가 하면, 체제를 얘기하지 않고 개별권리를 얘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개량주의 운동의 모멸감을 느끼기도 하고, 사회적 이슈로 주장하고 싶은 모든 것에 ‘권’과 ‘인권’을 가리지 않고 갖다 붙이는 등이 인권에 대한 ‘전문적·근원적·응용적’ 서사방식이라 칭한 것들의 단편적 모습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각각의 접근법의 장단점을 지적하는 한편 서로간의 소통을 꾀하고 있다.  

인권연구는 그간 국제인권법 연구라는 것으로 축소돼서 진행되고 받아들여진 면이 적지 않다. 그렇지 않은 경우엔 다양하고 무수한 인권침해 현상을 고발하는데 그치곤 했다. “인권은 ‘학제간’ 연구의 진정한 과제”라는 저자의 평소 주장처럼 『인권의 문법』은 그간 인권연구에서 주를 이뤘던 법학을 벗어나 국제법학, 철학, 사회학, 정치학과 국제관계학을 넘나드는 장점을 지녔다. 철학적 질문을 바탕에 깔고 사회과학적 접근과 법학적 접근이 같이 이뤄져야 한다는 저자의 당연한 주장이 우리의 인권연구 풍토에 접목돼 인권현장에 이론이 수혈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편 인권 기초 이론에 관한 교재라고 생각했을 때, 인권의 역사·내용·주체의 변화 그리고 사회주의·페미니즘·상대주의 시각에서의 인권의 비판이론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다. 물론 이 책은 이들 내용을 뼈대로 서술했고, 이는 기존의 문헌들이 다룰 만큼 다룬 주제들이다. 그런데 저자의 정리가 돋보이는 부분은 기존에 애용되던 인권의 ‘세대론’식 단편적 나열을 벗어나 인권의 상호의존성과 연관성이라는 맥락에서 통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서술했다는 점이다. 인권의 비판이론도 주로 근대인권체계의 이념과 틀에 대한 초기 선각자들의 비판 이론을 소개하는 글이 대부분이었다면, 저자는 비판에 따른 인권의 대응 및 전개상황과 더불어 최신의 시각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인권은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갖는 권리’라는 것이 그간 인권을 정의해온 가장 손쉬운 서술이다. 저자는 ‘탄압 패러다임’에서 ‘웰빙 패러다임’으로 인권의 외연이 확장됐다는 배경 속에서 “인간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인간의 역량을 자력화하고, 인간을 활짝 피게 만드는 규범적 포부”라는 현대 인권이론이 지향하는 인권의 정의를 내세우고 있다. 이런 변화된 맥락 속에서 인권과 정치, 인권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인권을 어떤 절대적인 것으로 선언해놓고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불가침을 강조했던 구조와는 전혀 다른 구조에서 인권을 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인권과 정치가 상극이 아니라 ‘인권의 정치’가 요구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인권은 ‘논의의 문턱’을 가리킬 뿐이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결정하는데 ‘정치’가 요구된다. 사회문제를 권리라는 형태로 개념화할 수 있는 담론에는 정치의식화와 각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권은 궁극적으로 권력의 문제로 이해되기에 시대의 핵심적 억압권력을 읽어내고 대항권력적 인권을 어떻게 조직하느냐는 정치적 해석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전체 인권원칙을 옹호하면서 정치적 기회구조를 선용하고 정치과정에서 인권의제를 격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를 인권의 정치로 말한다. ‘탈정치성’을 강조했던 ‘초연한’ 인권운동과 특정한 이념이나 사상에서 인권을 도구로 보거나 중간단계로 보는 인권운동 두 측면에서 인권의 정치를 숙고해보라는 저자의 지적은 한국의 인권운동에 큰 도전이 된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저자는 “다수결 민주주의 아래서 배제되기 쉬운 소수의견을 보호함으로써 민주주의가 ‘다수의 횡포’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주는 안전장치로서의 인권”이라는 도식적이고 소극적인 설명을 거부한다. 개인의 자유 권리에 해당하는 문제는 처음부터 다수결의 심의대상이 되지 못하며, 경제적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민주주의는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못 박으며 충분히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 경제·사회적 권리 보장이 필수조건이 되는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이에 ‘직접행동민주주의’를 과감하게 수용하는 강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데 여기에 시민과의 소통이라는 과제가 겹친다. ‘인권의 정치’, ‘인권민주주의’의 모색이라 명명하고 저자가 펼친 주장들은 인권이론에 대한 이해를 넘어 행동의 과제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아쉬운 점을 얘기해보자. 저자는 인권을 “이론과 운동간의 양방향적 상호작용”이라 했지만 이 책에는 ‘운동’이 거의 들어있지 않다. 저자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오히려 곳곳의 맥락에서 애정과 신뢰가 지나친 것으로 보일 정도다) 이 책을 쓴 목표가 ‘인권의 개념, 배경, 작동 방식’을 ‘이론적’으로 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동에 대한 ‘해석’이 풍부하다. 하지만 이 책의 독자군을 예상해볼 때 ‘운동’을 이해함 없이 운동에 대한 ‘해석’을 이해할 수 있을까, 좀 더 생생한 인권이야기를 원하지 않을까, 인권의 역동적인 행위 없이 해석만을 읽은 느낌이 남진 않을까하는 걱정이 든다. 저자가 ‘지적 소통’을 염두에 두고 쓴 책에 이런 바람을 얘기하는 것이 걸맞지 않긴 하지만 인권현장에서 요구되는 저작들에 대한 일반적 바람이라 할 것이다. 

또한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인권이 보통사람들 기죽이는 엘리트들의 특권인양 논해지지 않으려면 보통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소위 ‘통념적 서사방식’의 질문들을 더 상세히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권리간의 갈등, 권리간의 거래를 둘러싼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들에 다가서기에 좀 더 친절한 설명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보통사람과 인권간의 사회적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처럼 인권담론을 주로 다루는 사람들이 인권의 이념과 구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뭘 모르는 소리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해하기론 인권현장에선 이 간극을 메우는데 좀 더 다가서는 더 직접적이고 쉽고 살아있는 얘깃거리에 목이 마르다. 인권 개념이 얼마나 심각한 이론적 긴장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긴장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를 막막해 하는 현실에 좀 더 가까이 와줬으면 한다. 『인권의 문법』 곳곳에는 이런 바람에 부응하는 듯한 신선함이 번득이는 사례와 시각들이 눈에 뜨인다. 모쪼록 저자가 그런 부분을 더 발전시켜 더 친숙한 저작을 들고 독자들을 다시 찾길 바란다. 

류은숙 / 인권연구소 창·인권운동가

필자는, 2007년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독립한 진보적 인권이론을 연구하는 단체인 인권연구소 ‘창’에서 인권교육, 활동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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