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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민주주의’로 포퓰리즘 극복할 수 있을까
‘균형 민주주의’로 포퓰리즘 극복할 수 있을까
  • 교수신문
  • 승인 2008.04.1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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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 『포퓰리즘: 현대민주주의 위기와 선택』 서병훈 지음 | 책세상 | 2008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대개의 경우 좌파적인 ‘경거망동’을 지칭한다. 주로 보수언론들이 이른바 진보 또는 좌파 세력의 몇 가지 정치 행태에 대해 국가의 안정적 발전을 해치는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며 배격해왔기 때문이다. ‘좌파’의 포퓰리즘이 지속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보여주는 타산지석으로 항상 등장하는 것이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스트 정권, 그 중에서도 페론 치하의 아르헨티나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의도적으로 편파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면적이라는 비판만큼은 피할 수 없다. 다른 많은 포퓰리즘의 사례들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정치권과 언론에서 주로 정치적 적수를 폄하하거나 그 도덕적 자질에 흠집을 내기 위해 마구잡이로 사용되는 빈도수가 높아지는 데 반해,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거의 부재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몇 개의 주목할 만한 논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형태와 내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저작은 국내학자가 쓴 최초의 본격적인 포퓰리즘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일찍이 남미의 포퓰리즘에 대한 논문을 통해 국내 학계에 포퓰리즘이라는 정치현상을 이론적으로 선보인 적이 있다. 그 후 20년 만에 나온 이 연구서는 남미를 넘어 전 세계의 주요한 포퓰리즘에 대한 고찰과 이로부터 도출된 포퓰리즘의 일반적 속성 및 각각의 형태들이 지니는 고유의 특징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를 담고 있다. 게다가 이 논의는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민주주의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민주주의론의 사상적 계보와 이론적 지형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하게 해 주는 미덕도 지니고 있다.

국내학자가 쓴 최초의 본격 포퓰리즘 연구서
저자는 포퓰리즘이라는 정치현상이 실로 다양하고 그 의미와 용도가 애매모호하다는 이유에서 개념 규정을 포기하는 다수의 이론가들과 달리 포퓰리즘의 핵심적인 공통점으로부터 출발하는 개념 규정을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민주권 회복론’과 ‘선동 정치인에 의한 감성 자극적 단순 정치’가 모든 포퓰리즘의 핵심적 공통점이다. 저자는 이 둘을 포퓰리즘의 ‘기본 명제’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둘은 각각 다시 여러 개의 하위 명제를 포괄한다. ‘인민주권 회복론’은 보통 사람들에 대한 낭만적 미화, 엘리트에 대한 적개심 고취, 현상 타파 주장,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계급연합과 같은 5개 하위 명제를 포함하며,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단순 정치’로부터는 권위주의적 지도자중심주의, 선동정치, 체제 개혁의 한계와 같은 3개 하위 명제가 파생된다. 저자에 따르면 어떤 정치적 현상을 포퓰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이 현상이 반드시 두 가지 기본 명제를 뚜렷이 드러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다양한 형태의 하위 명제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역으로 이 두 기본 명제만 확인할 수 있다면 하위 명제들 중 일부만 갖추고 있더라도 큰 무리 없이 그러한 정치현상을 포퓰리즘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기준을 통해 포퓰리즘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할 것을 주장한다.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점은 포퓰리즘과 ‘인민 민주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포퓰리스트들이 인민주권 회복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 널리 설득력을 발휘하지만 그 비민주적 지도자중심주의나 감성 자극적인 단순 논리에 바탕을 둔 선동 정치야말로 민주주의의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까지 고려하면서 저자는 포퓰리즘을 “기성 질서 안에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정치 지도자가, 인민의 주권 회복과 이를 위한 체제 개혁을 약속하며, 감성 자극적인 선동 전술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정치 운동”이라고 규정한다.
저자는 러시아의 나로드니체스트보와 미국의 포퓰리즘, 남미의 신·구포퓰리즘, 유럽의 신포퓰리즘, 고이즈미식 포퓰리즘 등 포퓰리즘의 다양한 현상형태들을 서술하고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특히 현대 포퓰리즘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도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유럽에서 포퓰리즘은 대의제 민주주의 정치의 위기로부터 발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는 세계화의 높은 파고 앞에서 불안한 삶을 영위하는 대중들이 믿고 의지할 곳을 찾기 힘들다는 ‘구조적 상황’으로부터 비롯된다.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하에서 사회민주당마저 ‘제3의 길’을 표방하며 전통적 우파 정당에 가까워지는 등 기존의 정당 체계가 무너짐으로써 서민 계층은 자신들을 대변해줄 정치 세력을 상실했다. 이러한 공백을 파고들며 우익 포퓰리스트들이 ‘반엘리트 정서’, ‘반외국인 정서’ 등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민족’이나 ‘우리’와 같은 집단적 정체성을 제공함으로써 정치 지형을 일시적이나마 뒤흔들 정도의 득표율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후기 산업 사회의 경제가 맞닥뜨려야 하는 구조적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진단하고 있다.

현대 정치의 위기와 포퓰리즘의 발생 원인에 대한 저자의 분석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버나드 마넹에 의거해 민주주의의 현 단계를 ‘대중 정당이 쇠락하고 선거 운동 과정에서 대중 매체의 영향이 증대되는 청중 민주주의(audience democracy) 시대’로 규정하는 부분이다. 이에 따르면 1970년대 이후 소위 ‘미디어 정치’가 보편화되면서 전통적 정당 질서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여론 조사와 선거 마케팅이 정당의 선거 공약이나 정책 방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며 미디어 전문가의 역할과 비중이 당 관료와 핵심 활동가를 능가하게 된다. 정치인들은 정당 기구보다 텔레비전 등 미디어를 통해 유권자들을 직접 설득한다. 이는 대화와 토론을 통한 설득 대신 이미지 정치의 확산을 가져오며 수동적 청중을 양산한다. 이러한 변화는 연예인처럼 미디어를 능숙하게 활용할 줄 아는 포퓰리스트 -정치 흥행사!- 에게 더 없는 호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록 서구의 정당 체계를 대상으로 한 분석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하겠다.

풍부한 논의, 균형잡힌 시각, 남는 문제점
그런데 저자는 포퓰리즘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더 심각한 이유를 들고 있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철학적 논쟁, 특히 ‘민주주의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가 바로 그것이다. 민주주의 이상의 그늘에서는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며 충동적인 대중의 다수지배가 합리적인 전문가의 견해와 활동을 가로막을 수 있으며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무시할 수 있고, 인민주권의 명분을 내세워 법치주의의 근간을 훼손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실적 폐해를 이유로 민주주의, 특히 인민 스스로의 지배를 역설하는 인민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민주주의의 억제’를 요구해왔다. 저자는 엘리트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자 등의 ‘민주주의 억제론’에 대해 ‘근본주의’ 민주주의자들이 벌이는 ‘이론적 싸움’에 포퓰리즘이 편승하고 있다고 바라본다. 이러한 싸움은 민주주의에 본원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기에 민주주의가 균형을 상실할 때 그것은 언제라도 고개를 들 수 있는 것이 된다.

포퓰리즘은 부분적으로 현실적 성과를 보이기도 했으나 본질적으로 이성적 토론을 가로막고 다원성을 억압하는 등 민주주의의 토대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으므로 그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저자는 여기서 포퓰리즘의 극복 방향으로 대중의 참여와 전문가의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균형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특히 존 스튜어트 밀의 구상, 즉 대중 지배의 틀 속에서 전문가가 능력을 발휘하는 ‘숙련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한다. 나아가 사무엘 헌팅턴이 주장한 민주주의의 선별적 적용에도 마음을 두고 있다. 이에 따르면 민주주의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을 구분해야 한다. 학문, 예술 등 소수 지배가 관철돼야 하는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일정 부분 배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엿볼 수 있듯 저자는 자유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국내의 포퓰리즘 논란에 대해 저자는 비교적 균형 잡힌 평가를 하고 있다. 풍부한 경험적 사례와 이론적 논의를 토대로 포퓰리즘을 연구한 저자에게는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 결론은 보수 논객들이 김대중 및 노무현(정권)에 대해 제기해 온 포퓰리즘 혐의는 몇 가지 근거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개혁을 거부하는 일부 정치 세력의 편견이 담긴 결과”라는 것이다. 나아가 노무현 정권에서 산견되는 포퓰리스트적 정치 행태는 엄밀히 말해 “한국의 모든 정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본다. 이명박 정권의 “법과 질서를 잘 지키면 국민총생산이 1% 올라간다”는 주장도 아마 그러한 행태에 해당될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포퓰리즘에 대한 풍부한 논의와 비교적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훌륭한 미덕을 지니고 있으나 몇 가지 아쉬운 부분도 지적할 수 있겠다. 지면을 고려해 한 가지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자유주의자로서 저자는 포퓰리즘이 바로 자유주의의 쌍생아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자유주의는 자유시장경제로서 자본주의와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내거는 의회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저자는 포퓰리즘의 보다 근원적인 원인으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들었는데 이는 현재 매우 가시적인 형태로 현재화되고 있다. 1960년대 말까지 전후 황금기를 구가하던 서구 산업국가들은 분배구조의 개선을 통해 계급분열이라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민주주의의 ‘이상’ 사이의 괴리를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경제적 위기와 침체가 반복되면서, 특히 1990년대 이후 체제대립이 사라지면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점점 더 예리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사회적 불안과 불만은 고조되고 있다. 기존 정당 체계는 이러한 괴리를 호도하기에 급급하고 있으며 사회적 분열의 과정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포퓰리즘이 발호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임에도 이 책은 이러한 근본적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현재 퇴조세를 보이는 포퓰리즘 세력이 ‘반등’할 것 같지 않다고 바라보고 있으나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 설 경우 전망은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주정립 / 5·18기념재단·정치사상

필자는 독일 요한볼프강괴테대에서 ‘이데올로기와 비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열린 기획으로서의 민주주의』, 『지구화시대 맑스의 현재성』 등의 저서와, ‘포퓰리즘과 위기’, ‘포퓰리즘에 대한 이론적 검토’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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