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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경계를 가른 思想의 표지석
시대의 경계를 가른 思想의 표지석
  • 김혜진 기자
  • 승인 2008.04.14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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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60주년 특집기획 _ 책으로 본 한국 사회사

특정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회적 주체들의 사유와 성찰은 사회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사유와 성찰, 사회상은 텍스트로서 책의 주름에 새겨지게 마련이다.


특히 올해는 정부수립 60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1948년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이 질문에 효과적으로 대답하는 방식은 책과 사회, 지성의
교감대를 찾아보는 일일 것이다. 교수신문은 이런 취지에서  ‘책으로 본 한국 사회사’라는 기획을 마련했다.
학회지와 계간지 편집위원들 103명이 선정위원으로 참여해 각기 10권까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한국사회에 영향을 끼쳐온  책을 골랐다.


교수신문은 이번 진단을 통해, 그리고 이 진단에 대한 후속 평가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길 찾기,
한국 지성사의 길 찾기가 봇물을 이루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그 여정에 참여하는 더 많은 책들이 쏟아져 목록들을 새롭게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학회지와 계간지 편집위원들이 한국 사회에 영향을 준 책을 꼽았다. 총 460종에 달하는 저작이다. 한권 한권 어느 하나 가벼운 무게들이 없다. 玉石을 열권으로 선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수많은 지성들이 학문적 발전을 위해, 현실의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이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함이 덜한 저작이 없다지만, 지금의 한국사회 모습, 그 기저의 인식망을 구성하는데 각각이 한 역할과 영향은 달랐으리라. 그 정수에 있는 책은 단연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꼽혔다. 103명 중 41명의 답이다. 70년대 중반부터 지식인들 사이에 은밀히 유통되기 시작해 1987년과 1989년 각각 강신준과 김수행의 번역본이 출간되면서 일반인들에게까지 퍼진 『자본론』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을 가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사회의 모순을 계급이라는 차원에서 읽어내도록 제기한 『자본론』은 동의여부를 떠나 당대 지식인들의 뇌리에 적지 않은 파고를 그렸다. 굳이 이분화해 말한다면 옹호론자에게는 변혁이론의 구축으로 반대론자들에게는 지배이론의 세련화로 가는 계기가 된 저작이다. 응답자 대부분은 “한국 지성계에 가장 깊고 광범위한 영향을 준 저작”이자 “한국의 민주화 세력을 형성시키는데 기여한 저작”으로 이 책을 주목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연장에서 변형과 극복을 시도하는 오늘날 포스트 담론들에서도 마르크스주의가 한국사회에 드리운 영향의 폭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반향은 『자본론』의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한국사회 특수한 상황의 반영이기도 했다. 권위주의 정권이 임의로 단절시킨 학문적 공백이 메워지면서 한국사회의 지적 기반을 재구성한 탓이다. 1921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일부인 ‘유물사관요령기’가 번역되는 등 이미 마르크스 이론들은 식민지 시기 일본으로부터 유입됐고, 꾸준히 흐름을 이어왔다. 국역본 출간으로 이론이 확산됐다기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수요에 의해 국역본이 나온 것이었다. 87년 민주화 항쟁과 맞물린 시기 『자본론』의 출간은 경제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의 학문적 흐름에서 누락된 페이지를 일시에 채웠다는 의미를 갖지만, 그 영향력은 이전부터 조금씩 누적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70~80년대 비판이론의 아우라


다음 순위로 거론된 『해방전후사의 인식』(31명)과 『전환시대의 논리』(28명)도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거스르고 비판이론과 사회운동의 물꼬를 틀었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사회를 이룬 핵심 저작으로 꼽혔다. 70~80년대 양심적 지식인들의 필독서라 할 만한 이 책들은 반공이데올로기로 채색된 한국현대사와 세계체제 인식에 균열을 내고 비판적 사회과학이 집단적으로 형성되는데 기여했다.


국내 저작인 이 책들은 지적 성과물인 동시에 저자들의 실천적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979년 첫 권이 출간된 이래 1989년까지 모두 6권으로 완간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송건호, 임종국, 임헌영, 백기완, 염무웅 등 당대 대표적 재야 지식인 59명이 ‘민족’을 키워드로 한국역사를 재구성하려는 시도였다. 『전환시대의 논리』 또한 현대사와 국제정치의 새로운 사상적 모색이자 당시 사회를 작동시키던 반공이데올로기를 거스르고자 했던 노력이었고, 이들의 모습은 당시에 실천적·저항적 지식인을 지식인의 전형으로 만들어냈다.


이처럼 최상위를 매긴 저작들은 모두 70~80년대를 풍미하며, 비판이론의 지적 풍토, 변혁운동의 사회적 풍토를 만든 장본인들이다. 동시에 회자되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서와 현대 역사서는 이밖에도 여러 권 목록에 올라 있다.
그람시의 『옥중수고』(7명),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4명),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3명),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3명)과 『일차원적 인간』(3명) 등 각각 그 결은 다르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적 흐름을 이어받은 저작들이 많이 꼽혔다. 이와 함께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저개발의 개발』(3명) 역시 장차 전개될 종속자본주의 문제를 환기하는 지적 충격으로 수용됐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함께 『한국전쟁의 기원』(11명), 『민족경제론』(8명), 『분단시대의 역사 인식』(6명) 등의 현대사 책들도 중요한 저작으로 목록에 올랐다. 당시에 치열하게 제기됐던 전통주의사관과 수정주의 사관 논쟁은 주지하다시피 현재진행형이다.
전술한 책들이 설명하려는 영역과 의도는 제각각이지만 70년대 중반~80년대에 나온 비판이론서들은 변혁이론의 사회적 흐름 속에서 그 가치를 발휘했다. 3명 이상이 추천한 72종의 책 중 무려 30종이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사이에 나온 책이라니 한국사회에서 그 시기적 중요성이 다시금 확인되는 대목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저작들


이번 조사에서는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과학혁명의 구조』(15명)와 『제3의 물결』(15명), 『역사란 무엇인가』(12명), 『꿈의 해석』(11명)도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모두 불모지를 개척하거나 지배적 시각을 뒤집는 관점을 제시해 고전의 반열에 이른 저작들이다. 응답자들은 이 책들이 학문적 시야를 획기적으로 확대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줬다.


쿤의 저작이 객관적 과학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과학지식의 구성성을 제기했다면, 토플러의 책은 미래라는 화두를 한국 사회에 심었다. 80년대 이전 시기 국내에 상륙한 이 책들은 한국사회의 격랑의 중심에서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 힘을 상실하지 않고 사회를 분석하는 유력한 관점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책들이 제시한 ‘패러다임의 전환’, ‘제3의 물결’, ‘과거는 현재와의 대화다’, ‘무의식의 발견’이라는 명제들은 현재의 젊은이들에게도 익숙하다.


문중양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가리켜 “객관적인 지식의 생산과 변화 과정에 대한 논리실증주의적인 사고를 바꿔놓은 책”이라고 평가하고, “70년대 이후 과학에 대한 인식, 사회과학 연구방법론 등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줬다”고 말한다. 임종진 경북대 교수(중국철학)와 김정현 원광대 교수(서양철학)는 “다양한 영역에서 현대문명의 새로운 흐름 및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미래라는 화두를 한국 사회에 강력하게 인식”시켰다는 것을 『제3의 물결』 선정이유로 들었다. 이관규 고려대 교수(국어학), 강학순 안양대 교수(해석학), 함한희 전북대 교수(문화인류학) 등은 『역사란 무엇인가』가 60년대 풍미한 배경을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과의 상호작용’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찾았다. 이도흠 한양대 교수(고전시가)는 “이제까지 비학문적으로 접근했던 무의식의 세계를 학문적으로 제기해, 인간를 대해 전혀 다르게 성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던 『꿈의 해석』을 강조했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관점을 제기한 이들 저작들은 수많은 가지를 치면서 한국 지성계의 확장을 가져왔다는 평가로 읽힌다.

한국 지성계의 버팀목, 대하 장편소설


연구자들은 한국사회를 형성한 저작으로 ‘소설’에도 적지 않은 점수를 매겼다. 이번 조사에서 꼽힌 국내저작 중 상당수가 소설이었다. 『토지』(13명)와 『태백산맥』(12명)이 10명 이상 추천한 작품이라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8명)과 『광장』(6명)도 적지 않은 수다.


이혜순 이화여대 명예교수(한시)는 “인간관계, 욕망, 애증을 통한 한국 근현대사를 조망”하고 있다고 박경리가 쓴 『토지』의 가치를 평했고,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는 박경리를 “톨스토이에 비견할 만한 한국의 대문호”로 명명하고, 이 소설이 “한국근대사의 소설적 형상화를 이룩했다”고 평가했다.


『전태일 평전』(7명)과 『백범일지』(6명)도 한국사회에 대한 관심을 미시적 차원에서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기념비적 저작으로 빠지지 않았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정부 수립 직전 해에 출간된 저작이지만, 민족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지사의 심혼이 담긴 저작으로 정신사를 지배했다”며 『백범일지』의 지성사적 중요성을 매겼다.

각개 분산하는 포스트의 흐름


집중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지만 상위와 중위 목록에서 눈에 띄는 것은 90년대부터 도래한 포스트주의 저작들이다. 소련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성을 요청했고, 이는 서양의 지적 흐름과 맞물려 ‘탈근대’를 화두로 끌어올렸지만, 그 이전까지의 저작들과 비교할 때 각 학문 분야에서 분산된 형태로 존재했다.


그 중 가장 많은 수에 의해 선정된 책은 탈식민주의 흐름을 주도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4명)이다. 서구의 야만성을 제시해서라기보다 우리 안에 내재된 서양우월의식을 각인시켜 준 데에 더욱 의미를 갖는 이 책은 탈식민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장을 만들었다. 처음 출판된 것이 1978년이고 한국에 번역된 것이 1991년이니, 이를 수용한 선두적 그룹에게는 때늦은 참조의 역할이었지만 학계에 광범위하게 퍼진 것은 90년대다. 앞서 1998년에 번역된 그의 『근대세계체제』(3명)는 근대를 새롭게 의심할 수 있는 지적 기반을 제공했다.


프랑스 탈구조주의 선두에 있던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10명이 꼽았다. 김현식 한양대 교수(역사이론)는 “근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며, “탁월한 미시권력의 해부학”이라고 이 책을 평가했다. 70년대 저술된 푸코의 저작들이 1990년(『성의 역사』, 3명)과 1996년(『감시와 처벌』)에 이르러 국역본으로 나오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수입학의 득세와 자립학의 노력들


앞서 살핀 흐름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지성사에 서구의 학문이 미친 영향은 지배적이었다. 70년대 후반~80년대에 저작들이 봇물을 이룬 것도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수입되지 못했던 저서들이 한꺼번에 출간된 탓이 적지 않다. 이번 조사에서도 3명 이상 지목한 저작 72종 중 국내서는 27종인 반면, 해외서가 45종에 달했다.


다양한 지적 성과들을 수용하는 것이야 지식인의 당연한 태도라 하겠지만, 문제시 되는 것은 “수입학이 득세해 자립학을 억누르고 창조학이 일어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일부만을 협소하게 받아 들였던 서구의 이론을 온전하고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들이 빈번한 것도 그간의 잘못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이번 조사 결과는 주체적으로 학문을 수립하려했던 한국 지성의 책들이 곳곳에 있어 돋보인다. 『한국사 신론』(9명)이나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5명), 『민족문학과 세계문학』(4명),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4명)는 한국의 학문을 주체적인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한 노작으로 일찍부터 평가돼온 저작들이다.


특히 『뜻으로 본 한국역사』(8명)가 갖는 의미는 조금 더 특별하다. 최근 들어 활발한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는 함석헌은 철학자로 평가된다. 철학은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일찍부터 주체와 공동체 문제에 천착한 함석헌을 한국의 지성으로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1937년 출간된 조가경의 『실존철학』도 한국의 사회사를 일군 핵심적 저작이다.
 

지적 담론의 場, 잡지


<사상계>(7명)와 <창작과비평>(6명)도 당당하게 중요한 지성사적 의미를 갖는 ‘책’으로 꼽혔다. 많은 수가 지목한 것은 아니지만 <씨알의소리>, <문학과지성>, <녹색평론>, <인물과전망>, <민주법학>도 목록에 올랐다.


이들 잡지가 주목된 주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여러 연구자들이 함께 소통하는 담론지였기 때문이다. 재야인사 장준하와 백낙준의 주도로 1953년 창간한 <사상계>는 비판적 지성들이 모여 지배이데올로기에 균열을 일으켰다. 1966년 시작한 <창작과비평>은 백낙청을 중심으로 방영웅, 황석영, 이문구 등의 작가적 지성들을 발굴했다. 최대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된 강만길, 리영희, 박현채도 창비에서 지적 풍토를 넓혔다. 단독 저작이 자칫 텍스트에 함몰되기 쉽다면 공개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들 작업은 사회에 대한 끈을 놓지 않으면서 지적 진지를 확장시켜왔다.


김혜진 기자 khj@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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