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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자화상
그림자의 자화상
  • 교수신문
  • 승인 2008.04.1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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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 : 우리시대 교수,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은 두 눈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존재로서 끝없는 경험을 통해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지식은 스스로 얻어지고 생성되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판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은 수많은 언어의 획득을 위해 인생의 항해를 시도하지만 삶의 궁극에 도달하면 부질없는 허무만이 인생의 덧없음을 안겨줄지 모른다. 이러한 허무함은 시간의 刹那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사람만이 그 내면의 진실을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우주의 영원 속에서 인생의 짧은 시간을 삶의 의미 속으로 내던지려 한다. 수많은 모순과 투쟁 속에서 삶의 의미가 새롭게 싹트는 현대사회에, 홀로선 ‘교수’라는 그림자의 자화상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세상 속으로 드러낸다.

언어들에 갇힌 그림자의 흔들림


세상에는 수많은 직업들이 존재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존재성을 드러내며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우리사회의 지식층으로 자리 잡은 ‘교수’들은 ‘그림자의 자화상’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뒤돌아보아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같다. 수많은 언어가 세상의 중심에 자리 잡은 오늘의 현실에서, 자신의 주위에 걸터앉은 그림자의 모습은 온통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교수로서의 ‘나’라는 자아는 스스로의 학문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외로운 존재일수도 있다. 그것은 학문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음 속에서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학문이 ‘언어의 그림자’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기가 시작되고 수업을 준비 하다보면 새롭게 다가오는 수많은 새로운 언어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언어 속에서 참다운 지식을 찾으려는 끝없는 싸움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언어 속에 담겨진 기표에서 단순의미의 해석을 시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지식의 굴레에 둘러싸인 우리의 자아는 언어에 머물러 있을 뿐 진정한 의미의 해석을 유도 하지 못한다. 쟈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이러한 언어의 불확정적 의미성에 대해 판단의 유보를 제시한다.


우리는 교수 각자의 판단이 학생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학생은 교수에 의지하고 교수는 수많은 경험들과 자신의 지적 학문에 의지해 수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을 나타내는 수많은 언어의 그림자 속에 숨겨져 있는 오류를 발견하는 것은 강의를 준비하다보면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교육을 한다는 것은 언어 속에 잠재되어있는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는 봄의 꽃향기를 피워내기 위해 한 계절을 준비한 꽃망울들의 내밀한 숨죽임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그 가지 끝마다 쑥쑥, 밀고 올라오는 무한한 봄의 에너지를 느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속에서 세상을 향해 따뜻한 향기를 품어내는 봄꽃처럼, 교수라는 아폴론적 그림자를 걷어내고 세상을 향해 과감하게 뛰쳐나와야 한다. 봄꽃들이 스스로의 향기로 나비와 벌들을 날아들게 하듯, 새로운 학문을 통해 그들이 미래를 전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진리가 떠난 지식을 가르치는 그림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혜를 깨우칠 수 있도록 그들의 잠든 영혼을 깨워 주어야 한다. 시내를 맑은 물이 깨우고, 새봄을 병아리와 먼 산의 장끼가 깨우듯.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참교육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입으로만 종알대는 소피스트들의 가위눌림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림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산파의 역할로 되돌아가는 것이 우리 시대 교수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르치려는 것보다는 서로 더불어 배우며 진리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 시대 ‘교수’들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믿는 것과 믿으려는 것들에 대한 오해


인간을 중심으로 변해가는 수많은 언어들은 지식의 굴레를 확장하며 또 따른 믿음을 던져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가 부여하는 의미에 집착해, 또 다른 의미를 캐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학문을 하는 것의 궁극은 지식을 통해 진정한 지혜를 깨우치는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수많은 노력들이 근원을 잃어버린 덧없음의 학문이라면, 이러한 학문은 인생의 무게를 억누르는 또 하나의 암벽이 될 뿐이다. 인쇄기술의 발달로 하루에도 수백 권씩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들을 보면서 기쁨의 환희보다는 답답해져 옴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수라는 직업은 자신의 전문성을 통해 후학을 길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문성이란 어떠한 것에 대해 남과 다른 안목으로 탐구하고 연구하는 사람일 것이다. 동시에 탐구와 연구는 학문의 기본이며, 교수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외면할 수 없는 신성한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수’라는 직업을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고민과 갈등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자연인인 동시에 문화를 향유해야만 하는 자아는 우리의 주체를 드러낼 수 있는 스스로의 몸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아를 믿음으로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것은 존재에 대해 불완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많은 연구와 경험을 통해, 혹은 많은 책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믿으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는 그림자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해온다. 그러므로 결국 인식에 대한 믿음과 믿으려는 것들의 차이는 밝음과 어둠의 차이보다도 더 커다란 간극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이러한 믿음이 유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우리가 믿었던 어제의 진실이 오늘이 되면 새롭게 재해석되어지는 것을 보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믿음에 대한 의혹이 생기는 것은 그래서 더 당연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믿으려는 것의 유사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불확정적 인식의 틀을 깨어내고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을 통해 교육의 방향을 다시 재설정해야 한다. 그토록이나 믿어왔던 수많은 오류들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자신을 만족시켜주었던 그런 우상들에서 밝음으로 뛰어나와야 한다.


믿은 것과 믿으려는 것들의 거리는 아름다움과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의 오해와 동일하다. 아름다움이란 어떠한 조건과 상태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에 취해서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믿으려 하는 것은 또 하나의 愚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추구하는 지식 또한 이와 같은 그림자의 혼동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검증되지 않는 수많은 언어들을 통해 스스로의 지식을 배가시키며, 그 속에서 교육의 의미를 찾으려고나 하고 있지 않는지 철저하게 검증해보아야 한다. 불완전한 우리의 인식을 통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우리의 자만감이 스스로를 관념의 동굴 속에 가두고 있지 않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흘리는 한 방울의 땀은 우리의 고민을 자연의 이름으로 되돌려주는 바람과 같다. 그 바람은 만물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변화를 가져다준다. 나비가 날고 새들이 노래하는 것도, 사실은 바람이 불어주는 사랑의 입김이 세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수’라는 이름의 굴레에 걸터앉은 나그네이기에 앞서, 스스로 초록으로 드러나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자연이기를 희망한다. 그 희망은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곁에 늘 존재해 있기를 갈망한다.

빛에 드러난 디오니소스


빛은 어둠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자연이다. 태초의 흑암은 빛을 통해 세상의 드러남을 보여주고 밝음은 어둠의 자식이기를 거부하는 오이디푸스의 기억을 재현하려 한다. 교수라는 이성은 세상에 드러난 빛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밝히려 한다.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고, 모든 것의 모범이어야 한다는 중압감은 교수라는 우리의 자아를 빛의 세계에만 머물게 만들어 버렸다. 빛이 있기 이전의 흑암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것이었다. 흑암이 있기에 밝음이 있었고, 밝음은 흑암을 통해 더욱 밝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의 이성은 흑암에서 태어난 밝음을 통해 더 이상의 어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끝없이 추구되는 이성의 빛은 밝음을 통해 어둠을 생산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어둠은 모든 것을 담아내는 흑암 속에 머물기 때문에 그림자를 생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을 이끌고 있는 밝음은 자신의 드러냄을 통해 스스로 생성해내는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 흑암은 언제나 존재했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영원성을 담고 있다. 흑암은 아폴론적 이성에 대해 디오니소스적 삶의 안식을 노래하려 한다. 사회적 책임에 억눌리는 아폴론적 삶은 디오니소스의 안식을 통해 빛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다.


교수라는 직업이 가져다주는 삶의 무게는 연속되는 빛의 밝음 속에서 눈이 멀어버린 장님과 같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으로 채워진 삶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자연인으로 되돌아 갈 필요가 있다. 인간이길 거부하며, 인간이길 바라는 천개의 고원처럼 우리의 숨겨진 이성은 자연의 본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직업의 무게가 삶의 무게일 수 없는 것처럼, 교수라는 직업에 우리의 삶을 맞추어가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의 의미를 망각하는 방관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업과 삶을 명확히 구분하고 살아가야 한다. 직업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며, 직업에 대한 의무는 사회인으로서의 책임이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은 직업의 한계를 벗어나 인간이기를 바라는 또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기에 삶은 태어남과 동시에 되돌아가기를 약속하는 자연과의 약속이다. 자신의 삶을 사회의 직업 속에 묻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실 속에서 지식인을 대변하는 교수들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들의 삶이 언어와 책들의 무희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림자의 흔들림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회인으로서 책임과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이중의 갈림길 속에서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그림자의 창살을 부수고 나오려는 욕망의 몸부림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우리의 의식은 이드(id)와 에고(ego)의 끝없는 갈등 속에 감금돼버린 광인들의 슬픔이 될 수도 있다. 푸코의 말처럼 우리는 불완전한 이성을 통해 우리들의 자아를 피노키오의 이성으로 조각하려하고 있는지 철저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일상인으로 바라본 광인들의 모습을 이성의 사회를 벗어난 미치광이로 취급해버리는 것이 사회의 인식이며 일상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친 것과 미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빛과 어둠처럼 분명한 차이의 인식을 통해 가능할 것인가. 하지만 사회의 불완전한 인식 속에서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선명제가 제시되지 않고는 타인에 대한 판단은 유보되어야한다.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의 주관성에 기대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는 경향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주관성은 우리의 이성을 하나의 관념으로 剝製해버리려는 사회적 이성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교수라는 직업의 관념에서 삶의 모든 것을 찾으려는 어리석음보다는, 자연과 하나 됨을 인식하는 우주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나가야 한다. 빛의 밝음에 의해 생겨난 어둠의 그림자를 스스로 세상 속에 드러내놓으면서 이성에 의해 억눌렸던 스스로의 감성을 디오니소스의 춤을 통해 깨어나게 해야 한다. 교수의 삶은 더 이상 책속에 갇혀있는 이성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이기를 갈망하는 스스로의 자연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수’라는 직업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수라는 직업과 나라는 자아는 전혀 다른 속성을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직업이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직장에 종사하는 것의 異名이다. 그리고 나라는 자아는 교수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하나의 자연인이 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교수가 아닌 인간되기


그러나 사회의 복잡한 구조 속에 살다보면 나라는 자아는 세상의 그림자에 묻혀버리고 교수라는 직업에 의해 나의 존재가 인식되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수라는 사회적 이성에서 나라는 한 인간이 되기까지 수많은 시간들은 나와 교수되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들의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 벌거벗은 원숭이로 태어나서 한 인간이 되기까지, 인간은 수많은 역사를 반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자연을 벗삼아 뛰어놀던 원숭이가 나무에서 내려와 들판을 걷기 시작한 이후부터 우리는 수많은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 이름붙이기를 반복해 왔다는 것이다. 하나의 이름이 자신을 대변하는 것처럼 우리는 ‘교수’라는 이름표를 달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삶은 교수가 돼버린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삶은 직업에 의해 한정 지워지는 구속물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성장하는 생성의 자아인 것이다. 사회의 통념과 일상 속에서 스스로의 굴레를 닫아버린 시장 속의 인간되길 거부하며, 삶의 주인으로서 진정한 사회인으로 성숙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삶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빛이라 할 수 있다. 빛은 그림자를 걷어내고 걷기를 요구하며, 그림자는 걷는 것을 멈추고 쉬기를 요구한다. 빛과 그림자의 반복적 삶 속에서 교수가 아닌 인간되기는 직업에 갇혀있는 우리의 자아를 세상 속으로 드러내 놓을 것이다. 자연인으로서,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순수한 자아로서 “바람이 나무를 대하고, 나무가 바람을 대하듯” 우리 ‘교수’의 삶 또한 한 인간이길 기대해 본다.


윤재은 / 국민대·실내디자인과
필자는 홍익대에서 ‘공간철학’ 연구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인, 화가, 공간철학자와 건축가로 니체, 괴테, 헤세 등의 철학과 문학에서 영감을 얻어 삶의 의미를 탐구했다. 물, 돌, 나무 등의 자연적 요소에 많은 사유의 시간을 보냈다. 2006년 <마루>에 ‘자연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연재, 2006년 『건축은 나무다』 공간시집을 출간, 2007년 U.C.버클리 건축대학 뉴미디어센터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비트의 안개나라』라는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2008년에 『Archiroad』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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