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6:15 (금)
[짧은글 깊은생각] 성냄에 대하여
[짧은글 깊은생각] 성냄에 대하여
  • 교수신문
  • 승인 2000.12.0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0-12-04 14:18:16
최승범 전북대 명예교수/시인

최근에 읽은 유경환 시인의 수필 '고서점'은 적잖은 감명이었다. 다음 구절에서도 그랬다. '묘비보다도 저서에 인격을 남기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어서 다산 연암 최치원 이규보 등의 이름을 들고, 이들의 '숨결을 책으로 느낄 때 책을 가슴에 부둥켜안게 된다'고 했다.
그동안 실하지도 자랑할 것도 없는 나의 독서량으로도 '가슴에 부둥켜안을' 만큼의 느낌을 갖게 된 작품은 적지 않다. 그런 경우, 그 저자나 작자에도 호감을 갖게 된다. 잊었다가도 그 이름을 다시 만나게 되면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기쁘다.
바로 엊그제 일이다. 역사상의 사실 한 가지를 확인하고자 '선조실록'을 들춰보다 찾고자한 사실에 앞서 '유희춘'의 활자가 눈에 들었다. 호는 '미암'. 미암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역대시조선'(이병기 편주)에서였다. 다른 가집에서 볼 수 없는 시조 한 수 - '미나리 한 떨기를 캐어서 씻우이다/년대 아니야 우리님께 바치오이다/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십어 보소서' - 의 작자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저때 세 가지 점에서 큰 감동이었다. 첫째, 한자어가 쓰이지 않은 순연한 우리말의 시라는 것, 둘째, '미나리'가 바로 내 고장 전주에서 八味의 하나로 손꼽아온 먹을거리라는 것, 셋째, 미암이 전라감사 재임때에 전주에 있던 '진안루'의 누정에서 읊었다는 것. 그것도 서울에서 온 봉안사 박화숙과의 술자리에서였다. 미암은 정말 멋진, 풍류를 아는 시인 감사라는 생각이었다. 감격이었다.
'실록'에서 만난 미암은 經筵의 자리에 있었다. 선조임금께, '성'(怒 嗔  )에 대하여 여러 고전을 들어가면서 차분한 아뢴 것이다. 강홍경의 '衛生歌', 정명도의 '定性書', 허형의 '노기는 불꽃보다 심하다'는 시구 등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아뢴 바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성냄은 가장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養德 뿐 아니라 養生에 있어서도 가장 긴요한 일입니다'.
'실록'을 통한 이 짧은 만남에서도 미암의 박학과 임금에 대한 충심을 엿볼 수 있다. 이때 선조의 나이를 추산해 보니 23세의 방년이었다. 그리고 미암은 임금보다 39년이 위였다.
사실, 감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 흔히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의 칠정을 인지상정이라 했다. 성내지 않는 일이란 목석이 아니고야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급한 사람이 아니라도 때로는 적당히 성을 내는 일이 사람의 미덕이 될 수도 있다. '무골충'이라는 홀한 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철부지 아이들에겐 적당한 위엄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맹자'에 있는 말이던가. 문왕 무왕 같은 어진 임금이 '한번 노하면 천하의 백성을 편안케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성냄'을 놓고도 미암의 말에 호감이 간다. 속담이 일러온 '一怒一老' '一笑百廬忘'에 생각이 미쳐서가 아니다. 미암은 '양생' 뿐 아니라 '양덕'에도 가장 긴요한 일이 성내지 않음이라 했다. 이 말에 공감이 컸다. 저때의 임금은 至尊이었다. 그앞에서 '진노'와 '양덕'을 말한 미암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미암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읽은 시조 한 수, 일화 한 꼭지만으로도 미암을 잊을 수 없다. 범연히 생각할 수도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