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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진학자 16명이 광릉에 간 까닭…발딛은 삶터에서 자생학문 모색하자
중진학자 16명이 광릉에 간 까닭…발딛은 삶터에서 자생학문 모색하자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1.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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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2-13 11:10:08
신승환 가톨릭대 교수(철학):
한국에서의 학문하기의 문제-근대성과 학문

현재의 학문자리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세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순수학문과 응용·실용학문이란 구별. 학문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이 질문 자체가 반학문적인가. 이것은 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이란 구별에서 기인한다. 마치 순수예술과 민중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과 인간을 위한 예술이란 구별처럼 학문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둘째, 학문이란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성찰해낸 이론의 체계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삶의 자리를 성찰하지 못한 학문은 학문으로 자리할 수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학문이란 언제나 우리의 학문이다. 여기에 학문을 지나치게 국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으로 설정하는 것의 문제가 있다. 우리의 현실과 역사, 세계가 순수 우리의 것이란 말로 규정할 수 없듯, 그 안에서 성찰한 결과로 주어진 학문 역시 그러하다.

셋째, 오늘날 한국에서의 학문은 서양학문, 철학에서는 서양철학 내지 서양형이상학에 대한 강박증에서 기인하는 역기능을 지니고 있다.

한국사회와 삶, 사람과 역사는 학문의 원천이며 기반이고 학문이 출발하는 자리다. 동시에 이러한 것들은 또한 학문의 성찰에 따라 방향지워지고 의미가 부여된다. 따라서 삶과 앎, 학문과 현실, 사람과 지식, 경험과 성찰은 이중적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이중적 관계에 대한 성찰이 우리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우리 학문하기’의 학문 내적이며 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학문 내적인 문제는 지금 우리 학문 대부분이 ‘수입학’이라는 데 있다. 이러다보니 규범의 상실, 주변부의 비애를 톡톡히 겪어 왔다. 구한말 이래 서구의 강력함에 항복한 동아시아 지식과 학문체계, 그 규범의 상실이 빚은 문제는 심각하다. 또한 서구가 중심부인한, 주변부에서는 스스로 판단과 가치의 기준 내지 규준을 독자적으로 창출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중심부에 놓여 있다. 오류, 선악판단의 기준조차 수입해야 하는 주변부의 비애이기도 하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학문의 기본인 성찰함의 부족을 초래한다. 또 학문과 지식이 변화된 실재와 세계를 성찰하고 담아내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 대신 다른 이론에 안주하려는 지적 성찰과 고뇌의 부족이 궁극적으로 학문을 현실과 삶, 세계, 사람에게서 벗어나게 만든다. 지적 유희 내지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흐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자생학문이 창출되지 못하는 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먼저 학자들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다. 서구중심주의에 빠져 자기 것과 자기의 학문을 비하한다. 예를 들어 동료학자들의 자생적 이론이나 해석보다는 그가 참조로 한 외국의 이론을 인용한다. 이것은 의도적이기도 하고, 악의적이기도 하다. 그가 참조한 한국학자의 이론은 되도록 감추려 한다.

또한 학자들은 자주 연구주의와 매명주의, 대중추수주의에 빠져 학문의 엄격성을 왜곡시켜 왔다. 지식의 일천함, 학문 역사의 짧음이 검증된 이론에 안주하게 만들고 자생적 이론 창출의 노력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이것이 서구 이론을 추종케한다. 지적 정직함과 치열함의 부족도 문제다. 이는 글쓰기의 문제이며, 학자들이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신뢰의 결여를 의미한다. 깊이에 대한 불신, 정직함에 대한 불신이 궁극적으로 서구이론 내지 서구 학자에게 의지하게 만든다.

지식의 내용과 역할이 변화하고, 그에 따른 지식인의 역할과 의미가 변했으나 그것을 문제삼거나 성찰하지 못함으로 인해 지식인의 행태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것은 오랜 규범 상실에서 오는 허탈함에서 과거에 안주하려는 안일함과 상통한다.
한국사회의 문제도 한몫 한다. 학자들이 대중과 직접 소통할 기회가 없다. 따라서 언론이나 학문 외적인 요인들이 학문 내적인 이론의 형성과 담론, 토론과 논쟁을 결정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난다. 학자들 역시 한 사회의 조건에서 생겨나는 존재다. 따라서 분단규율이나 레드 콤플렉스, 자본과 私學, 신자유주의 논의 등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끝으로 근대성의 문제가 있다. 근대성에 대한 성찰은 우리 학문의 자리를 논하기 위해서 가장 요구되는 것이다. 근대의 수용과 변용, 근대의 극복이란 형태로 주어진다. 합리성과 이성의 원칙, 근대성의 반성이란 논의가 서구 추종의 포스트모던 논쟁으로 일면적으로 흘렀으며, 나아가 이러한 포스트모던 논의조차 몇 년 정도의 선정적 논의에 그침으로써 진지한 성찰과 반성, 또한 그로 인한 이론창출을 막았다.

예컨대 독일에서는 이제야 포스트모던에 따른 진지한 철학적 성찰을 전개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벌써 포스트모던 논의조차 낡고 진부한 논의로 치부하고 말았다. 탈식민주의 논의 역시 식민주의적 수입학의 차원에서 논의되다가 이제는 그에 대한 논의조차 사라졌다. 지금은? 언론은 새로운 논의의 가능성을 상업적 관심에 따라 찾고 있으며, 여기에 매명주의에 빠진 몇몇 지식인이 영합함으로써 학문의 논의조차 거듭 헛돌고 있다.

우리의 탈근대는 그러한 의미에서 여하한 형태로든 서구의 근대를 수용하고 변용시켰던 역사를 성찰하고 그로써 근대 극복의 새로운 이론의 틀을 형성하는 것으로 방향지워져야 한다. 서구와 근대를 동시에 극복한다는 이중의 탈주로 이해할 수 있다. 지체된 근대, 착종된 근대, 방향과 지향이 결여된 근대를 이중으로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성찰적 학문함이 근대성 극복에 담긴 함의이다. 결국 이것은 다원성과 보편성, 동일성과 차이를 아우르는 학문 운동이기도 하다.

정현기 연세대 교수(국문학):
우리말로 학문하기

나는 문학비평을 행하면서 학생들에게 문학의 길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강의실에서나 글쓰기를 행하는 데 있어서나 말의 기본은 언제나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왜 우리는 길을 떠났는가. 사람들이 떠난 인생의 이 길은 분명 각기 자아의 존재 의미를 찾는 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아가 존재의 길을 떠난 의미를 잘 모른다. 그래서 남들이 규정지어 놓은 것에 스스로를 대입하여 그것에 자기를 맞추려고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당신들 스스로가 확실하게 이거다 하고 의미를 만든 것 외의 것은 대체로 남의 시선에 뜨인 것에 불과하니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고 가르친다. 스스로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의 의미이다”라고 됐을 때 비로소 당신들은 떳떳하고 당당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에 닿는 것이라고. 이런 나의 삶의 길 읽기 태도가 이렇게 자발적으로 이 자리에 오게 된 이유이다. ‘내가 선택한 길의 의미’란 글쓰기나 학문하기의 가장 핵심이 되는 기초라고 나는 믿는다. 앞서 간 선인들 가운데 서양 사람들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 내용이나 생각이 지금 여기의 한국인들 자아에게 다 맞는다는 고착된 생각은 착각이기 쉽다. 특히 지식 제국주의 시대인 오늘날의 우리 학문은 자아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내용들로 정확하게 옮겨지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그런데 우리 학계, 정확히 말해서 내가 평생 읽고 생각해 온 현대 문학계는 끊임없이 외국이론을 끌어다가 한국문학을 재는 악습에 젖어 있다. 이 악습의 폐단은 1895년부터 국가적으로 외국유학을 부추기면서 뒷날 국내 대학은 여럿 만들었으나, 국내 대학에서 학문을 완결짓지 못한다는 일부 外樣學者들의 어리석은 고집과, 서양지식을 등에 진 그들의 지식권력 행사 때문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예를 들어보자. 문화는 물론 높낮이가 없는 절대치이며, 문학작품 또한 비교급일 수 없다. 이 관념이 서양문학 전수자들에 의해 여지없이, 뭉개졌거나 도외시돼 왔다. 그런 비평행위의 대가급들(?)인 백낙청을 비롯, 정명환, 김현 등으로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한국문학 지식사회에서 한국문학은 스스로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용인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다. 서양식 지식 바이러스로부터의 침식 영향은 오히려 서양 학자나 문인들로부터 벗어나기를 권고 받고 있는 실정이다.

최봉영 한국항공대 교수(한국학):
우리 학문이 헤쳐나가야 할 문제

각각의 언어는 나름대로 완결적 구조를 갖는다. 영어와 독어가 비록 강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영문법으로 독어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각의 문화 또한 나름대로 완결적 구조를 갖고 있다. 때문에 중국문화와 한국문화가 비록 강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중국문화로써 한국문화를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각각의 상이한 완결적 구조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이해, 비교하는 가운데 언어나 문화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서구 학자들이 원시부족들의 언어나 문화를 연구해 이론들을 구축해 나온 것이 그렇다. 우리가 특정한 언어나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차이를 곧 완결성의 결함으로 이해해, 그것을 치유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한다면 올바른 이해를 기대할 수 없다.
각각의 언어나 문화가 갖고 있는 완결적 구조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부합하는 이론들을 구축해야 한다. 한국어의 완결적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국어에 관한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른 언어들에서 개발된 이론들, 즉 일문법이나 영문법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한국어에 대입시켜 설명하려고 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한국어의 단편적 부분들만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그 완결성에 대한 이해는 영원히 불가능해진다.

개화기 이후 신문화가 전개되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와 이해는 그 완결성에 기초했다기보다는, 다른 문화에서 개발된 이론들에 한국문화를 대입시켜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 한국인은 서구의 근대적 학문체계를 송두리째 수입해 근대문화를 모범답안으로 추종하게 되자, 서구문화권에서 개발된 이론들에 한국문화를 꿰어 맞춰 설명하는 일이 성행하게 됐다. 이로써 남의 이론을 빌려 꿰어 맞추기 경쟁하는 풍토가 지배하게 됐다.

한국 학자들이 아직도 한국문화에 기초해 개념을 다듬고 이론을 구성하는 것에 관심이 적은 것은 한국문화의 완결적 구조에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조선시대 유교문화가 이룩한 완결적 구조에 관심을 갖는다면 손쉽게 다양한 이론들을 구성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일례로 우리가 조선시대 성리학적 유교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한다면, 가족과 문중을 단위로 하는 가족주의 종교이론을 구성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문으로 된 교과서를 공부하여 중국의 지식인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춰야 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토착문화와 중원문화에 대한 지식을 동시에 획득했다. 그들은 두 문화에 대한 체험에 기초해 정밀한 개념논쟁과 강력한 실천운동을 전개,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철저한 성리학적 유교국가를 형성했다. 그들은 문화적 완결성에 대한 자신감이 깊어짐에 따라 스스로 中華를 계승한 正統으로 자처했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유교문화는 지극히 정밀한 개념체계를 삶의 바탕에 깔게 됐다. 학자들에게 조선시대가 매력적인 것은 살기 좋았던 시대로서가 아니라, 삶의 바탕에 깔려 있는 정밀한 개념체계 때문이다.

개화기 이후 신학문에 종사하는 한국 학자들은 이 정밀한 개념체계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러한 개념체계를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방해물로 생각해 시급히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중심 개념조차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문화적 문맹 상태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그들은 문화적 문맹을 도리어 근대화의 지표로서 자랑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결과 삶의 바탕에 깔려 있는 개념들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입된 개념으로 삶을 어설프게 재단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즉 그들은 삶의 바탕에 깔려 있는 情-物情-事情-人情-同情-眞情-熱情-미운정-고운정, 장난-놀이-일-장난꾼-놀이꾼-일꾼, 본-보기-본보기-본을 보다-본을 보이다 등에서 볼 수 있는 개념의 전체적 맥락에 무지하게 됐다. 이로 인해 한국문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되자, 수입된 이론으로 한국문화를 설명하려는 유혹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한국 학자들은 나와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마땅히 다른 문화권에서 개발된 다양한 이론들을 공부해야 한다. 그것들이 나와 우리의 삶을 살찌우는 훌륭한 수단들로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각처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학자들이 쏟아내는 다양한 지식과 이론들은 학문과 문화의 발전을 뒷받침하는 필요한 귀중한 밑거름이다. 그러나 밖에서 들여온 지식과 이론들은 우리의 삶을 값지게 만드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만약 학자들이 수단에 목적을 꿰어 맞추는 일을 계속한다면, 그들은 수입된 이론을 자랑하기 위해 나와 우리의 삶을 훼손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한국문화의 완결성에 기초해 나와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을 다듬고 이론을 만들어 나갈 때, 다양한 문화들을 하나로 꿸 수 있는 더욱 확대된 보편의 무대로 나아갈 수 있고, 지금까지 우리가 빚지고 있는 이웃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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