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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의 표절 시비
문학에서의 표절 시비
  • 홍기돈 객원기자
  • 승인 2001.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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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죄? 값싼 동정이 죽이는 창조성의 세계

대체, 오늘날, 문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문학은 무엇일 수 있는가. 90년대초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야기했던 표절논쟁이 가 닿았던 물음이다. 당시 패스티시나 상호텍스트성과 같은 개념을 동원해 표절을 정당화했던 이인화, 김욱동의 입장은 그만큼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성욱, 유중하, 도정일과 같은 평론가들의 적절한 비판이 있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새로운 사조의 유입과 더불어 벌어졌던 그 기이한 풍경 속에서 당시의 문학계가 당혹감을 드러냈음은 분명하다.

예컨대 1993년 절필을 선언하는 박범신의 내면에 그 당혹감은 이렇게 드리워져 있다. “문학판에선 바야흐로 정체불명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한창이었다. 그것들은 공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젊은 작가들 사이에 표절시비가 끝없이 벌어졌으며, 남의 글을 베껴 써내는 것을 새로운 기법이라고까지 말하는 정통에의 극단적 부정도 나타났다. (…) 허망한 허깨비짓이었다.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 무력증은 우리들의 운명이구나. 우리들 속에 나는 나보다 훨씬 젊은 작가들까지 포함시켰다. 허망한, 작은 위로를, 우리들이라고 말할 때 나는 느꼈다.”(‘그해 내린 눈 지금 어디에’)

흘낏 지나듯 최수철은 그 깊이 없는 표절의 세계에 대해 이렇게 한마디한다. “나는 일전에 난데없이 송일환이 일본의 한 젊은 작가의 작품에 관련되어 표절 시비에 말려들었던 일을 기억 속에서 떠올린다. 그 순간 내게는 갑자기 그의 얼굴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필리핀 음악인들의 검게 뭉개진 듯한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얼음의 도가니’) 싼값에 고용돼 일주일 내내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지금 옆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떠들고 있는 송일환은 누구인가 짐작할 만하다.

표절을 둘러싼 논쟁이 사납게 휩쓸고 지나가면서 동료 소설가들에 남기는 상처는 대충 이렇게 정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절을 둘러싼 논쟁은 도대체 끊길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혐의의 선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대표적인 작가가 신경숙이다. 그녀의 ‘딸기밭’에는 타인의 편지글이 그대로 실려 있다. 박철화는 ‘여성성의 글쓰기, 대화와 성숙으로’를 통해 ‘기차는 7시에 떠나네’에는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그림자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지적하는 한편, ‘작별인사’는 마루야마 겐지의 ‘물의 가족’의 표절이라고 지적한바 있다. 또한 정문순은 ‘통념의 내면화, 자기 위안의 글쓰기’에서 “95년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에 실린 단편 ‘전설’은 명백히 일본의 극우 작가 마시마 유키오의 ‘憂國’의 표절작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는 정도이다.

왜 표절은 계속 되는가. 아마도 검증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현은 ‘예술작품에 대한 표절판정의 논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실 표절판정은 원작과 표절작의 유사함을 지적하는 작업을 넘어 그러한 유사성을 결과한 어떤 행위에 표절의 의도가 있음을 밝힐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작가의 의도를 추정하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고 표절 문제에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표절의 의도란 속이려는 데 있고 그 의도가 표절시비 중에도 계속되기 때문이다.” 대체 누군가의 의도를, 그것도 속고 속이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데, 누가 정확히 읽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노골적인 베끼기의 층위’와 ‘문학적인 짜깁기’의 층위를 가르는 정영길의 기준은 다소 애매한 수준에 걸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상관성이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명백한 증좌가 없을 경우에는 표절로 단정짓지 않는 편이 패스티시의 자율성을 신장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현대소설의 해체현상에 대한 고찰’)

이러한 불분명한 기준으로 인해 표절의 경계는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저작권을 위협하는 복사기의 보급, 조금 더 나아가 통신수단의 발달까지도 영향을 끼치는 실정이다. “표절은 인종 차별주의와 성희롱과 더불어 얼마 남지 않은 죄악들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점차 퇴색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학의 죽음’(최인자 역, 문학동네 刊)을 한탄하는 앨빈 캘런의 목소리이다. 하기야 이러한 표절 문제도 근대의 산물, 더 정확히 모더니즘의 그림자에 깃들여 있으므로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학은 왜 필요한 것일까. 작가들은 왜 소설을 쓰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가 닿지 못한 표절 문제에 대해 앨빈 캘런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바로 이런 식의 값싼 감상 때문에 문학은 죽은 것이다.”

홍기돈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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