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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녘, 시인은 사막을 어떻게 건너는가
황혼녘, 시인은 사막을 어떻게 건너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08.04.0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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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만나다_ 신경림의 『낙타』·『뿔』

낙  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물리적 나이 72살, 인생의 황혼기다. 황혼은 어떤 꽃보다도, 그 어떤 열매보다도 그 자체로 향기롭고 아름답다. 황혼을 닮은 한 시인을 만난다. 신경림이다. 그가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고 있다.
『낙타』(창비, 2008)는 신경림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이다. 언어로 열 번째의 집을 지었으니, 지상에 집도 적지 않게 지은 셈이다.
열 번째가 지니는 의미도 쉽게 간과할 수는 없지만, 숫자나 횟수가 그 무게를 제대로 지니지 못하면, 무엇하랴. 열 번째 시집이 지닐 수 있는 무게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에 대한 성숙도가 보여주는 사유의 깊이와 넓이가 아니겠는가. 그 사유의 깊이는 삶에 대한 반성으로, 넓이는 시야의 확대로 나타난다. 6년 전 『뿔』(창비, 2002)에서 보여준 그의 사유가 『낙타』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두 시집은 체제나 시적 관심에서 연속선상에 놓여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죽음의 인식과 반성적 사유
죽음은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가장 높고 두터운 장벽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죽음 앞에 절망하기도 하며, 인간 존재의 허무를 절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을 시인은 상상의 힘으로 추체험하며, 이 죽음의 장막을 걷어내는 모험을 감행한다. 삶을 성찰하는 매개는 많다. 그러나 죽음만큼 근원적인 것은 없다. 시인은 죽음을 추체험함으로써 삶을 새롭게 되돌아볼 뿐만 아니라, 현실 삶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이 든 시인들에게 있어, 이러한 시적 현상은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사실 죽음은 인간 모두가 한번씩은 맞서야 할 운명적인 벽이라서 시인만의 특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칠순의 나이에 접어든 시인에게 있어, 죽음에 대한 상상력은 특별한 데가 있다. 신경림 시인은 『뿔』에서 현실세계를 사막으로 명명하면서, 죽음을 이 사막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으로 인식한 바 있다.

죽어서나 빠져나갈 황량하고 삭막한 사막에 나를 가두었던 것이
눈에 익은 얼굴과 귀에 밴 말들이었던가
비로소 얻게 되는 이 자유와 해방감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또 다른 사막임을 내 왜 모르랴만

- 「사막」 중에서

고단한 현실 삶의 공간을 사막으로 형용하는 시인들의 세계인식은 별스러운 것이 아니다. 인생 삶의 과정이 사막을 걷는 것으로 항상 비유돼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막으로부터 벗어나는 죽음을 비로소 얻게 되는 자유와 해방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죽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차원의 인식이다. 일상적 삶에 묶여있어 깨닫지 못했던 본래적 자유를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죽음의 추체험은 진정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장을 연다. 그래서 존재 자체가 자유와 해방감으로 표현되는 또 다른 실존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죽음 이후 눈앞에 펼쳐지는 공간 역시 사막임을 노래함으로써 현실 삶의 공간과 다르지 않음을 내비친다. 이승과 저승의 공간적 경계가 무화되면서, 삶과 죽음을 분리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유는 소거된다.
그래서 삶과 죽음은 구분되지 않고 연속선상에 놓인다.
 
저승인들 무어 다르랴 아웅다웅 얽혀 살던
내 가족 내 이웃이 다 거기 가 살고 있는데

- 「강 저편」 중에서

저승과 이승의 거리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저승이 이승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이다. 사막에서 사막을 건너는 저승길의 이미지가 여기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강 이미지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죽음관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죽음관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죽음관 중의 하나는 죽음을 끝이 아니라 사후 세계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며, 죽음은 강을 건너는 통과제의로 관념화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타』에 오면, 시인은 『뿔』에서 인식했던 사막을 통해 저승길로 가고자 한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 「낙타」 중에서

여기에서 우리는 『낙타』에 나타나는 심화된 죽음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 즉 『뿔』에서 보여주는 「강 저편」에 나타난 죽음 의식은 막연하게 저승이 강 저편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강 저편에 있는 저승이 이승과 별 다르지 않음을 노래하고 있지만, 「낙타」에서는 낙타를 타고 저승길을 가리라고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시인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수동적인 선을 넘어서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자세는 「눈」에서는 더욱 확고한 의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눈」)
해방되고자 한다. 이러한 의지는 『뿔』에서 ‘비로소 얻게 되는 자유와 해방감’과는 다른 차원이다. 단순히 주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죽음을 통해 자유를 경험함으로써 실존의 도약을 감행하고 있다. 이승의 삶에 길들어짐은 평안과 안락을 제공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쩌면 영혼의 감옥과도 같다. 그러므로 길들어진 이승의 삶을 벗고 저승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 속에는 새로운 실존에 대한 끊임없는 지향의지가 잠재돼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에 갇혀있는 비본래적 인간이 죽음을 통해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고, 자기를 새롭게 함으로써 본래적 존재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탈주에의 욕망이기도 하다.

이렇게 죽음이 단순히 우리가 극복해야 할 부정적이고 공포스러운 대상이 아니라, 현실 삶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라는 인식은 아주 중요하다. 인간의 성숙을 판단할 항목들이 많지만,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수용하느냐가 하나의 판단기준으로 작용한다면, 이는 유의미한 항목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낙타』는 『뿔』이 보여준 죽음 인식에서 한 발 나아가 있음은 확실하다. 죽음을 통한 자기 완성, 혹은 자기 성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죽음을 동반한 삶의 자세라고 할만하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만큼 자신에게 성실한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죽음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시인이 내보이는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시인은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

내 발자국 끝나는 곳에서 나도 저처럼
둥실 떠올라
허공에 그림자로 찍힐 수 있을까

해맑기는커녕 검고 칙칙한 얼룩이 되어
누더기로 허공에 남을까
그것이 두렵지만

- 「허공」 중에서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 「고목을 보며」 중에서

삶이 끝난 자리에는 누구나 흔적을 남긴다. 그런데 시인은 칙칙한 얼룩이나 누더기의 이미지를 남기기보다는 맑고 해맑은 그림자를 남기고 싶다고 염원한다. 죽음에 대한 상념이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장면이다. 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적 사유의 결과이다. 얼룩과 누더기 그리고 흉하고 추한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희원은 죽음 앞에 서는 자들이 누구나 가지고 싶은 보편적 열망이다. 이런 보편적 열망은 순수에의 열망과도 맥을 같이 한다. 즉 현실적 삶의 욕망에 묶여있는 자신으로부터 놓여나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과 통한다. 이런 지향의식은 동심에 가까운 것이다. 신경림 시인이 『낙타』 시집 속에 「동시 칠수(童詩七首)」를 선보이고 있는 이유가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동시에 나타난 순수에의 지향을 사유의 깊어짐으로 보아야 할지, 사유의 단순함으로 보아야 할지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절대자에 대한 인식과 전지구적 사유
인간이 죽음을 생각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절대자를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삶에 있어, 나고 죽는 문제는 인간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절대자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뿔』에서 쉽게 만날 수 없던 절대자에 대한 인식을 『낙타』에서는 자주 만난다.

하지만 왜 하필 그들인가, 이 지구상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가장 순박하고 가장 욕심없이 사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을 골라 해일이 뒤덮거나 지진이 뒤흔들어 수십만 목숨을 빼앗고 병들이고 온 땅을 폐허로 만드는가?
저 높은 데서 그분은 항시 우리를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것, 그 말도 나는 믿는다. 한데 그분 너무 높이 계셔서 멀리 계셔서, 아래서 일어나는 일을 세세히 보고 계시지 못하는 건 아닐까?

- 「아, 막달라 마리아조차!」 중에서

그분은 저 높은 데서 다 보고 계실 거다, 또 알고 계실 거다. 채널을 돌리지 않고도, 신문을 뒤적이지 않고도.
그러나 무얼 하랴, 그분한테 세상을 바로 고칠 의지도 뜻도 없는 데야.

- 「그분은 저 높은 데서」 중에서

집을 잃고 이웃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 엎드려 오오 하느님 울부짖기만 할 뿐, 감히 질문하지 못하니,
무엇을 알고 무엇을 빨리 말하시지 않는다는 것인지, 하느님이
- 「하느님은 알지만 빨리 말하시지 않는다」 중에서

첫 번째 시편에서는 지구상에 나타난 재앙들이 왜 하필 가난하고 순박한 자들에게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절대자를 향해 불평 섞인 하소연을 하고 있다.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선악의
개념으로는 도저히 신이 허용할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상에 찾아오는 대재앙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매일 벌어지고 있는 신문과 TV에 비쳐든 일상의 모습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두 번째 시편에서 시인이 말하고 싶은 바이다. 신의 정의가 있다면, 어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라는 항변을 토하고 있다.
그분으로 지칭되는 절대자가 너무 멀리 계셔서, 혹은 세상을 고칠 의지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라고 목청을 돋우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편에서는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따지고 묻는 질문도 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철저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가능한 문제제기이다. 즉 시인의 신에 대한 시선이 인간화된 신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시인의 죽음관과 신관이 동일선상에서 만나고 있음을 본다. 이승과 저승을 연속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죽음관은 신을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도 신의 정의가 사라져버린 형국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선한 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신의 뜻을 인간이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으랴.
이렇게 시인이 수직적 시선으로 절대자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개인의 죽음을 넘어 인류의 종말을 예견하기도 한다. 시인의 시선이 수평으로 번져나면서 전지구로 시야가 확대되고 있다.

바닥을 모를 탐욕이, 천지에 두려움을 모르는 오만이, 이 세상에 오로지 나뿐이라는 무지가,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고, 코와 혀와 살갗을 무디게 만들어

마침내 우리는새와 짐승과 벌레도 다 느끼고 알아듣는 하늘의 노호와 땅의 울음과 바다의 몸부림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말았으니.

어찌 허망하지 않은가,
쥐라기 백악기의 공룡도 멸종 직전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며 “Cogito, ergo sum. Cogito, ergo sum”하고 기고만장했을 터이니.

- 「Cogito, ergo sum」 중에서

우리는 지금 거대한 공룡이다.
땅위의 것, 땅 속의 것, 하늘의 것, 바다의 것 가리지 않고 먹어치워서
몸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비대해졌지만.

언젠가 우리는 먹을 것을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는 날이 오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이웃을 먹고 친구를 먹고, 끝내는 가족까지 먹는.

- 「공룡, 호모사피엔스, 그리고…」 중에서

인간이 욕망의 노예가 돼 살아온 결과, 지금 우리는 거대한 공룡처럼 돼버렸다고 인류사적 입장에서 종말론적 예언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공룡도 자신들이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며 살았지만 멸종을 맞이한 것처럼 인간도 지금 이 상태가 계속되는 한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전망에는 인간이 자신들의 현실적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는 반생태학적 삶에 대한 비판이 배음으로 깔려 있기도 하다. 어떻든 이러한 인류사적 시야를 갖는다는 것은 그의 시선이 개인적인 삶의 문제에 고착돼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삶과의 관계성 속에서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이다. 시적 성숙이란 시인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사안에 대해 그 끈을 놓지 않고 부여잡고 있음에서 가능하다면, 신경림 시인의 경우 타자들에 대한 관심이 인류사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시가 보여주는 성숙의 한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시인의 이러한 시야의 확대는 그가 여행한 공간적 시야의 확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뿔』에서는 콜롬비아, 월남, 중국 등의 국외 공간에서 체험한 바를 9편 정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지만, 『낙타』에 오면, 터키, 네팔, 몽골, 북한,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에서 느낀 바를 22편이나 남겨, 그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시인은 이승과 저승을 낙타로 여행하듯 이들 공간 속으로 사유의 순례를 계속한다. 「이역(異域)」에서 그 중요한 한 대목을 읽어낼 수 있다.

저 굵은 주름투성이 늙은이는 필시 내 이웃이었을 게다.
눈에 웃음을 단 아낙은 내가 한번 안아본 여인인지도 모르고.
햇살 환한 골목은 한철 내가 정들어 살던 곳이 아니었을까
문앞 화분의 팬지도 벽 타고 올라간 나팔꽃도 낯설지 않아
.
- 「이역(異域)」 중에서
   

이역에서 만난 사람이나 삶의 공간, 그리고 대상들이 낯설지 않다고, 다르지 않다고 노래한다. 그렇다고 시인이 세계화를 환영하며,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는 나를 가난하게 만들고」 왜소하게 만들기에 이를 경계한다. 특히 자본을 통한 전지구적인 세계화에 대한 반감은 크다(「보르도에서 만난 부처님」). 그러므로 시인이 이국에서 낯설지 않은 것으로 공감하는 바는 인간에 대한 이해며, 그가 찾는 인간을 만남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저승길을 갈 때 그의 낙타에 태워갈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가엾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꽃보다 황혼보다 아름다운 장면의 연출이다. 그러나 그의 여행시가 보여주는 이야기시의 모습은 『낙타』 전반부에서 만날 수 있는 시적 긴장과 사유의 깊이를 끝까지 견지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을 떨칠 수가 없다. 사유의 공간적 확대가 사유의 깊이로 이어지는 여행시를 언제쯤 만날 수 있을까.


남송우 / 부경대·국문과

필자는 부산대에서 ‘1930년대 전환기 비평의 해석학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비평의 자리 만들기』, 『윤동주 시인의 시와 삶 엿보기』, 등이 있으며, 한국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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