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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위해 인간을 제물 삼을 수 있을까
인간 위해 인간을 제물 삼을 수 있을까
  • 장문석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현대사
  • 승인 2008.04.07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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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국가와 희생』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 이목 옮김 | 책과 함께 | 2008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 시대에 태어나 본의 아니게 전쟁터로 떠나야 했던, 전쟁터에서 목숨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숭고한 희생 위에 오늘의 일본이 존재한다.” 이 말에서 우리는 국가를 위해 개인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내던지는 ‘숭고한 희생’이야말로 오늘의 일본을 있게 한 민족 정신의 본질이라는, 이른바 ‘야스쿠니 논리’의 전형적인 사례를 본다.

국가만 이런 논리를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도 그런 논리를 공유한다. 가령 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피해자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도로서 피폭의 비극적인 체험을 글로 남긴 나가이 다카시는 원폭 투하가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왔다고 하면서 이렇게 썼다. “원자폭탄이 우라카미(나가사키의 가톨릭 신도 거주 지대)에 떨어진 것은 신의 커다란 섭리다. 신의 은혜다. 따라서 우라카미는 오히려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이 논리에 따르면, 원폭 투하로 희생된 우라카미의 가톨릭 신도 8천 명은 ‘숭고한 희생자들’인 것이다.

고이즈미의 말이나 나가이의 말이나 모두 위안을 준다. 이 말들은 남양 전선과 나가사키에서 허망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일본인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숭고한 희생’의 논리가 갖는 효과는 위안과 의미를 준다는 데 있다. 물론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산 자들에게 준다는 말이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으므로 죽음의 참상과 고통을 날 것 그대로 산 자들에게 전하지 못한다. 산 자들은 그들의 죽음을 신성시해 위안을 받고 의미를 찾은 뒤에 그 참상과 고통이 주는 불편함에서 벗어날 뿐이다. 그러고 나서 전쟁과 원폭 투하의 책임 소재를 따지는 일에 무관심해진다! 실제로 천황의 뒤늦은 종전 결단으로 애꿎은 나가사키 시민들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비판하는 우렁찬 천황 책임론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나가사키가 불타던 그때, 우연히 같은 시간에 내려진 천황의 신성한 종전 결단, 천황 성단론만이 반복해서 메아리칠 뿐이다. 이렇듯 죽은 자들에 대한 산 자들의 자의성과 안일함, 그리고 국민에 대한 국가의 기만성과 무책임이야말로 ‘숭고한 희생’의 논리가 갖는 진정한 효과이다.

물론, 희생의 논리는 전후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태곳적부터 있어왔다. 성경에도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던가. 비록 마지막 순간에 이삭 대신 숫양으로 교체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인신공양이든 아니든 피가 튀는 희생의 테마는 창세기 이래로 인류를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일찍이 르네 지라르는 동서고금에 두루 발견되는 희생 제의 뒤에는 공동체 내부의 분쟁을 없애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 민심을 하나로 묶고 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의도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야스쿠니 논리’ 뒤에는 명백히 일본의 ‘민족’ 공동체를 보호하고 유지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하겠다.

기실, ‘숭고한 희생’의 논리는 무엇보다 민족주의의 시대에 정점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각국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들을 기억하고 추념하기 위해 신성한 제단을 만들고 제의를 거행한다. 민족주의의 시대는 모름지기 ‘메모리얼의 시대’라 할 만하다. 다카하시가 『국가와 희생』에서 다룬 문제도 바로 일본 민족주의는 물론이거니와 민족주의 일반을 관철하는 ‘숭고한 희생’의 논리이다.

다카하시는 민족과 민족주의를 둘러싼 서로 다른 개념들(민족 개념에 대한 피히테의 객관적 정의와 르낭의 주관적 정의)과 이론들(민족주의에 대한 모세의 근대 기원론과 칸트로비츠의 중세 기원론)에도 불구하고 민족과 민족주의 자체에 ‘조국을 위한 죽음’이라는 희생의 논리가 오롯이 관철되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더구나 다카하시는 원폭을 은총으로 승화(둔갑)시킨 나가이의 말을 통해 희생의 논리가 단지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된 것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수용된 것이기도 함을 보여 준다. 이른바 ‘자발적 희생’이라는 말이다. 과연 근대의 민족주의적 희생의 논리가 갖는 특징은 이렇게 체질화되고 내면화된 희생의 감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옛날 신에게 바쳐진 희생양들이 자기 발로 제단 위에 올라갔던가. 적어도 오늘날에는 그렇다.

물론 이와 같은 ‘희생의 정치학’을 다카하시가 더 깊이 파고들어 각 개인이 희생의 정당성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이른바 주체화하는 근대 권력의 속성까지 해부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그가 민족주의적 논리를 넘어 개인의 희생 없는 사회가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그의 논의가 매우 근원적이라는 점을 말해 준다. 결국 그의 물음은 희생 없는 사회의 추구가 필경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을 제물로 바칠 수 없다는 도덕률에 기초해 있음을 재확인해준다.

아주 훌륭하고 공감이 가는 논변이되, 털끝만큼은 의문이 남는다. 다카하시도 인정하듯이, 희생 없는 사회는 바람직하지만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가 아닐까. 사실, 인간을 위해 인간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아니던가. 고대 그리스는 그런 비정한 생각이 통용된 공간으로 보인다. 트로이로 출정하기 전, 딸을 신에게 바친 아가멤논에 대해 딸의 어미인 클리템네스트라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희생의 정당성 사이에서 이렇게 절규한다. “모든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켰다면/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건 단지 음탕한 헬레네 때문이다.” 아가멤논의 문제는 인간을, 하물며 딸을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 그것도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을 위해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에 있다. 뒤집어 말하면, 인류를 위한 희생은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리라.

우리 시대의 민족주의도 과연 이와 같은 ‘희생의 경제학’ 위에 서 있다. 하나보다는 열, 열보다는 백, 백보다는 전체를 위한 희생이 더 값지다는 단순명쾌한 계산, 그리고 이 전체는 곧 민족이고, 또 민족이라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민족주의의 ‘숭고한 희생’이 바탕에 깔고 있는 확신이다. 그런데 왜 민족에서 셈이 멈춰버리는 것일까. 계속 셈하여 전체 인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을 말해야 일관되지 않을까. 요컨대 민족주의의 난점은 개인과 인류 사이에 존재하는 민족의 어중간함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너무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알맞은’ 어중간함, 그 최적의 크기가 민족이 갖는 남다른 힘을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장문석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현대사

필자는 서울대에서 ‘이탈리아의 대기업과 국가: 피아트의 경우 1918~1943’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민족주의 길들이기』 등의 저서와 『만들어진 전통』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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