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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로 얼룩진 학계
표절로 얼룩진 학계
  • 권희철 기자
  • 승인 2001.12.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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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이지 않는 양심의 도둑질…강박이 낳은 불감증

표절이 문제다. 표절은 때로 은밀하게, 암묵적으로 진행돼 시야에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표절이 만연해 있는 지식인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교수를 비롯한 지식인 집단의 도덕적 불감증을 문제 삼으며 자성을 촉구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여기서는 표절의 양상과 사례를 둘러봄은 물론 그 본질에 접근하려 한다.

“표절은 근절돼야 한다.” “지식인의 도덕성이 문제다.” 지난 11월 18일 백종욱 동서대 교수(인터넷공학부) 등 3명의 논문표절 사실이 언론에 공개된 이후로 쏟아지고 있는 한결 같은 목소리들이다. 묘한 것은 과거에도 간간이 표절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비슷한 지적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곤 했다는 점이다.

백 교수의 논문은 지난 2월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박종태 경북대 교수(전자전기공학부)와 홍원기 포항공대 교수(컴퓨터공학과)의 공동명의로 전기·전자학회지 ‘커뮤니케이션 매거진’에 발표했다가 표절로 밝혀졌다는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 결국 백 교수는 자진사퇴서를 냈고 나머지 교수들도 소속 대학의 징계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언론보도 이후로 사태는 확산돼 교수집단 전체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됐다.

이중 표절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공모까지

백 교수 표절사건은 과거의 전례와 유사하기도 하고 또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이에 표절이 발생해온 양상을 얼추 그려보면 이렇다. △타인의 논문이나 저서를 무단 전재하는 경우 △인용 없이 도용하는 경우 △구성이나 문제의식 등을 약간 손봐 둔갑시키는 경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출판의 경우에는 특히 번역이 문제가 되는데, 전체를 가져와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하거나 약간을 덧붙여 ‘편저’라 붙이는 것들이 그렇다. 송자 전 교육부장관의 ‘관리경제학’(박영사 刊) 표절이 여기에 해당한다.

근래 들어 새롭게 나타난 경향은 세 가지로, 하나는 이중 표절의 경우인데, 국내와 해외 두 곳 모두 표절 논문을 제출하거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중 삼중으로 게재하는 경우다. 이런 예가 급증하는 이유로 SCI 등 논문 편수를 늘려야 하는 현재의 평가시스템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교수사회의 논문표절은 대체로 업적평가제에 따른 것으로, 이에 해당하는 교수들은 논문 ‘수’에 집착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계약직 교수들이 늘어난 것도 이 문제를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 하나는 국내의 논문이나 저서를 자신의 것인 양 바꿔치는 경우인데, ‘나, 아바타 그리고 가상세계’(책세상 刊)의 저자 정기도 씨가 다른 국내연구자의 논문을 무단 도용한 것이 대표적 예일 것이다. 인터넷과 하이퍼텍스트의 발달과 맞물려 있을뿐더러 국내 박사과정 연구자들의 사회적 처우 문제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도 그 원인이 될 것이다. 또 ‘대학원중심대학’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양적 팽창에만 매몰되고 있는 대학들의 빗나간 개혁도 문제가 될 만하다.

그러나 경희대 정치학 박사과정에 있는 하승우 씨는 이렇게 말한다. “표절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 문제의식을 정리하고 선행연구를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선행연구 검토에만 치중하게 된다. 여기서 표절이 발생한다. 자기 문제의식보다 선행연구 검토의 형식을 강조하는 학계의 관행이 문제라고 본다.” 기존의 관행에 학문후속세대도 젖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 잣대로는 관행의 구조 경시하게 돼

마지막으로 한 개인이 아닌 일종의 커넥션으로 묶여표절을 하는 경우다. 백 교수의 경우는 이중 표절에 해당하면서 이 경우에도 포함된다. 한 사람의 표절 논문이 다시 세 사람의 표절 논문으로 학회지에 제출됐다는 점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언론에 보도된 표절사건 중 교수와 제자간의 표절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표절이 대학사회의 수직적 구조 아래 은밀하게 때로는 암묵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11월 21일 남명수 인하대 교수(경상학부)가 제자인 권성희 씨의 논문을 표절한 사실이 보도된 것이 가장 최근의 사례이다.

그런데 표절이 등장할 때마다 표절 여부가 명백히 가려지지 않고 늘 시비가 뒤따르게 된다. 문학이나 예술의 경우 이 문제는 보다 심각해진다. 정도는 덜 하지만 논문이나 출판물의 경우도 여기서 자유롭지는 못한데, 이른바 ‘공공 소유’(public domain)의 문제 때문이다. 무단 전제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개의 표절 시비가 이 문제와 관련돼 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표절일 수도, 표절이 아닐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범위를 아무리 확장시켜 본다고 하더라도,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등 제대로 인용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다양한 표절의 양상과 그 관행을 두고 가장 손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은 지식인의 양심, 도덕성 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런 시각은 표절의 문제를 몇 개의 특수한 사례로 치부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뿌리깊은 관행의 문제를 놓치기 쉽다. 최근 언론의 보도경향은 교수사회 흠집내기에 여념이 없는데, 이들은 모두 지식인사회의 구조적 병폐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즉 도덕성의 문제로 표절을 보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철학자 김용석은 “의도적인 표절은 도덕적인 문제임이 분명하지만 분량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국내 논문제출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 “교수평가제에 논문 편수 이외에 다른 조건들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 지적했다.

이처럼 기존의 관행이 표절의 조건을 만들어냈다면, 최근 대학가의 시장논리식 개혁은 이 문제의 골을 깊게 한다. 표절의 반복재생산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사실 표절이 사회적으로 불거지게 된 배경에는 저작권 문제가 있는데, 저작권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바로 이것이 표절을 도덕성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이다.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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