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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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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신문
  • 승인 2008.03.3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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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비평]『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

이제는 제법 아득하게 느껴지는 대학 신입생 시절에, 한 여학생에게 선물로 건넸던 책이 다름 아닌 박완서였다. 그녀의 데뷔작인 『나목』이었는데, 그 책에도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이 그려져 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며칠 뒤에 그녀는 책을 다 읽었노라며 왜 그 책을 자신에게 선물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어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것도 게임이랄 수 있다면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패자였다.

내 기억 속의 1980년대는 그렇게 책읽기에서도 불과 칼의 시대였다. 책은 그냥 읽어도 되는 게 아니었다. 참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권력자들은 수많은 禁書들을 만들어냈고, 반대로 젊은이들은 焚書에의 욕망에 시달리면서 금서만을 골라 읽곤 했다. 당연히 소설가는 가장 무거운 의미에서 지식인이어야 했고 소설은 반역에의 꿈이면서 동시에 실천이어야 했다. 『나목』이 그 여학생을 감동시키지 않았을 리 없다. 우리가 박수근의 그림에 침착하듯이 소설 속의 참극과 그것을 전하는 젊은 여인의 당돌한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으리라. 하지만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해석’을 넘어선 ‘변혁’이었다. 당연히 고리키의 『어머니』가 우리를 눈멀게 했으나, 그 어머니의 눈부신 변화에는 여전히 헛것이 깃들여 있지 않았을까.

이제 세월이 흘러서, 박완서의 새로운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를 읽으면서 문득 궁금해진다. 이제는 중년에 접어들었을 그녀에게 다시 『나목』을 선물한다면, 그녀의 반응은 어떠할까. 이렇게 『친절한 복희씨』는 내게 긴 세월을 거슬러서 『나목』을 다시 읽게 만든다. 그것은 다르면서도 같고, 비슷하면서도 낯설다. 그리고 거미줄의 한복판에 거미가 있듯이, 이 소설들의 중심에는 작가 박완서가 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경험한 것만이 소설로 씌어질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박완서는 고집스럽게 그러한 글쓰기를 고수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을 쓰기 위해 일부러 ‘자기’를 변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집요하게 존재의 밑바닥에 드리운 그늘을 응시하고 따지고 파헤칠 뿐이다. 그 집요함이 박완서 소설의 핵심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2001년에서 2006년까지 씌어진 단편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9년만에 낸 소설집이니 모든 언어들에 세월의 무늬가 아로새겨졌음에 틀림없다. 첫 소설인 『그리움을 위하여』에서 마지막 소설인 『그래도 해피앤드』까지 발표 순서대로 그대로 묶은 것이어서 이 시간들이 작가에게 각인시켰을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해준다. 

주지하다시피 박완서는 불혹의 나이에 비로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소설이 『나목』이었고 1970년의 일이었다. 1981년도에 『엄마의 말뚝』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작가가 밝힌 『나의 문학적 자서전』을 보면 그러한 글쓰기를 추동한 원핵은 허구가 아니라 논픽션, 즉 ‘삶 자체’였다. 작가란 그가 없다면 영원히 침묵 속으로 사라질 것들의 증인이다.


가끔씩 나는 삶에 조급해하는 학생들에게 농담처럼 박완서를 말하곤 한다. 마흔의 나이에 시작된 그녀의 글쓰기가 얼마나 높은 책들의 탑을 쌓아올렸는지를. 내가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들 삶 속에서 너무 늦은 시작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게으르거나 나약한 인간들만이 늘 후회 속에서 자신의 모든 가능성을 탕진할 뿐이라는 것. 핀타로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영생을 꿈꾸지 말고 네 가능의 세계를 탕진하라”고.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니면 표현될 수 없을 그 무엇을 찾아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 것인가. 스무 해를 더 허비하고도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나의 농담은 그러므로 반쪽짜리 진실을 담고 있을 뿐이다. 삶은 시계로 잴 수 있는 게 결코 아닌 것이다.

박완서 소설의 이중성 -‘원 그것도 소설이라고 썼는지’
어쨌거나 뒤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박완서가 써낸 소설의 양은 놀랍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화자본능을 지니게 만들었던 그 무엇이 녹록치 않은 두께와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임을 반증한다. 이야기가 먼저 있었고 비로소 그걸 써내는 방식이 박완서의 소설이다. 끊임없이 써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탕진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작가에게 ‘그것’은 동어반복처럼 여겨지기 쉽고, 독자는 그 기미만 보여도 재빨리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완서의 글쓰기가 이처럼 긴 생명력을 지니고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생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이 상투성에 떨어지지 않고 이제껏 긴장감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리라. 이를 ‘능란한 묘사력’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서운 ‘집념’의 산물임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그 이중성으로 돌아가야만 하리라. 박완서 소설에서는 결코 어떤 거대한 모험도, 커다란 사건도 발견할 수 없다. 새로운 서사적 형식을 향한 별다른 노력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삶의 오래된 골목에서 발견하는 이야기의 옛집과도 같다. 당연히 그것들 대부분은 작가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며 일인칭 화자 ‘나’를 중심으로 펼쳐질 때 활력에 넘친다.

『친절한 복희씨』에서도 다르지 않다. 소설들 중에서 전적으로 상상력에 의지했거나, 별도의 자료조사들을 통해 재구축한 서사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시아버지의 팬티를 둘러싼 이런저런 ‘말’들의 풍경을 그린 『마흔아홉 살』이나 소설의 마지막에 나오는 때죽나무 밑의 성애묘사가 유머러스하면서도 건강한 『거저나 마찬가지』가 비교적 젊은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았고, 미국 이민 ‘앤’이 ‘후남이’가 되어 엄마의 방에 눕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후남아, 밥먹어라』와 ‘불빛을 확인할 수 있는 거리’에서 아들 내외와 살게 된 노부부의 쓸쓸한 소회를 ‘남편’의 시선으로 적은 『촛불 밝힌 식탁』이 이채롭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들도 예외없이 작가 박완서의 생활권 안에서 포착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달리, 자기 안과 바깥의 삶을 관찰하기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어떤 미화나 숨김이 없이 까발려진다. 예컨대 『그리움을 위하여』에서는 가난한 사촌동생에 대한 ‘나’의 시혜의식이 타자적인 시선 속에서 얼마나 이기적이고 심지어는 폭력적인가를 드러내 보여준다.

『친절한 복희씨』는 결코 줄거리로 요약될 수 없다. 일상 속에 숨어있는 꿈과 허위의식, 선과 악, 도시화에 따른 인간성의 파괴와 가족의 해체 따위들이 실타래처럼 뒤얽혀있는 것처럼, 소설들의 주제는 말들과 분리해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미세한 말들의 흐름이야말로 진정한 주제다. 내 능력으로는 작가가 『그 남자네 집』에서 어떻게 ‘그 남자네 집’에 피어있는 보리수를 통해 아련하면서도 절묘하게 자신을 추궁해가는지를 절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요컨대 우리는 그 소설들을 읽어야 하는 셈이고, 또 얼핏 소설들은 쉽고 만만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산문집 『호미』에 실려있는 작가 자신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흥미롭다. “엄마는 말년에 우리 집에 와서 지내신 적이 많았는데 엄마가 오실 때마다 나는 내 책을 엄마의 손이 못 닿도록 서가 맨 위 칸에 꽂아놓고도 안심이 안 돼 책 제목이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놓곤 했다. 엄마가 읽을까봐 겁이 났다. 내가 『휘청거리는 오후』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나서 기자가 엄마에게 인터뷰를 청한 적이 있다. 따님 소설을 읽은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엄마는 싸늘하게 원 그것도 소설이라고 썼는지, 라고 대답하셨다. 그 매몰찬 혹평은 나에게 오래도록 상처가 되었다. 나는 아마 생전 엄마를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박완서 소설에 대해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품게 되는 생각도 이렇지 않을까? “원 그것도 소설이라고.” 소설을 읽어가는 독자들은 당연히 소설가가 들려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에 대해 관음증에 가까운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통속하고 작고 나지막한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짐짓 박완서의 소설들을 무시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 낯익은 이야기들은 우리가 둔감하게 지나쳤던 것들을 무겁게 충격하는 것이다. 분명히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들인 듯한데, 그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노라면 우리는 어느새 삶의 비의에 이르러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대범한 밥상』을 읽어 보라. 이 소설에는 ‘남편이 먼저 저세상으로 간 지 삼년 만에’ 암으로 삼 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인물이 주인공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문제다. 그녀의 남편도 그랬다. ‘잘나가는 회계사’였던 남편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은 기간을 자신이 마련했던 땅을 ‘삼남매에게 공평하게 나누는 일로 꽉 채웠다.’ 그 장면은 이렇게 회상된다. “그이도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만일 여행이나 음악회 같은 걸 같이 가고 싶어 한다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 금쪽같은 시간에 그럴 새가 어디 있어?” 하지만 그의 예술과도 같은 재산분배술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은 그렇게 얻은 재산 때문에 서로 시기하고 분란에 휩싸이게 된다. “당연하지, 죽은 후엔 앞날이란 것이 있을 순 없으니까.” 이제 그 어려운 작업이 자기 몫으로 돌아온다. 이때 그녀는 자연스럽게 여고 동창 경실이를 떠올리게 된다.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딸내외를 잃고, 여섯 살, 세 살 어린 남매를 떠맡게 된 그녀의 행실에 대해, 거액의 보상금을 둘러싸고 추문이 쏟아졌던 것인데, 이제 나는 경실을 만나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묻고자 한다.

그렇게 찾아간 친구에게서 받는 것이 바로 ‘대범한 밥상’이다. 도시에서 병든 ‘나’에게 경실은 자연이 키워낸 것들로 상을 차려준다. 하지만 진정 ‘대범한 밥상’은 그녀의 해괴망측한 행실에 관한 깊은 속내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자연스런 말들의 ‘대범한 밥상’을 요약할 수 없다. 독자들 스스로 읽어야만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밥상이 아닐런지. 하지만 그 핵심은 “쥐락펴락이 아니라 들었다 놨다 하던 인간도 죽으면 이 세상의 있는 것 털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잖아. 그거 하나라도 확실하면 됐지 뭘 더 바라.”라는 전언 속에 담겨 있다고 믿는다.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삶에 눈을 뜨게 되는 것. 죽음이 삼라만상의 균형을 이루는 계기라는 것. 이러한 전언은 도대체 영생에 대한 허욕에 사로잡혀 삶을 기망하는 현대인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밥상일 것인가.

소설가의 몸
어쩌면 시인 황지우가 노래했듯이 몸 있을 때까지만 세상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본질적으로 몸을 망각하거나 철저히 지배하려는 문화라 할 수 있다. ‘무병장수’하려는 현대인의 꿈은 몸의 것이 아니라 몸을 숙주로 삼은 정신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까?  

이미 오래 전부터 박완서에게 몸은 소설이 ‘고름처럼’ 흘러나오는 장소였다. 그 어떠한 허울좋은 이념이나 사상도 몸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러한 몸은 시대라든가 이념들이 구체화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몸들이 쓰는 이야기들, 몸이 쏟아내는 말들이야말로 박완서 소설의 핵심이었다.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에는 자연스럽게 노화에 따른 세계감각의 변화들이 자리잡고 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의 여정은 결국 다시 몸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몸에 기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들 삶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집착들과 망상들에 의해 채워지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친절한 복희씨』에서 몸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대부분의 소설들에서 몸은 세월 속에서 늙고 병드는 것이며 그러다가 언젠가는 사라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들에서 ‘몸’이 소망하는 것은 ‘보행의 자유’다. 그러나 관절은 쉽게 망가지고 몸은 병든다. 『그 남자네 집』에서 이러한 노쇠현상은 ‘이름이나 숫자에 대한 현저한 기억력 감퇴’를 동반한다. 그러면서도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서 과거로 나아간다. 늙고, 병든 몸들은 옛집의 따뜻한 방에 돌아와 눕는다. 그 방은 모성의 공간을 연상케 한다. 늙어가면서 그녀는 오랜 타자로서 몸이 하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몸에 기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들 삶이 얼마나 헛되고 어리석은 집착들과 망상들에 의해 채워진 것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박완서 특유의 현실주의를 빚어낸다. 대부분의 소설은 삶의 한 에피소드를 그려낸 것이어서 표면적으로 늘 작고 하찮은 이야기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변죽을 울리면서 천천히 중심을 충격하는 것이다.

표제작이기도 한 『친절한 복희씨』에서 ‘나’는 “중풍에 걸려 오른쪽 반신이 흐느적대고, 제 입 안의 침도 잘 수습하지 못하는” 남편과 단둘이 살고 있다. 그는 “원래 기운이 넘치는 장대한 남자였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게 이상인 단순한 남자가 늙고 병들어 썩은 포대자루처럼 처져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측은하단 생각이 들기보다는 기괴한 환상에 시달린다.” ‘나’의 유일한 위안은 엄마가 시집올 때 친정에서 가져온 비상약, 즉 아편이다. “엄마가 부모님 목숨을 보전하러 훔쳐온 아편 덩어리”를 ‘나’는 집을 나와 살아야 했던 “도시가 무서워서” 재차 훔쳤던 것이다.

삶의 모든 힘겨움을 아편이 담긴 생철갑을 보면서 견뎌낸 주인공은 남편이 약국에서 비아그라를 찾았다는 말을 듣고는 강렬한 살의를 느낀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생철갑을 들고 한강으로 달려간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죽음의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내 검은 강을 향해 힘껏 던진다. 이 소설의 결론은 이렇다. “그 갑은 너무 작아서 허공에 어떤 선을 그었는지, 한강에 무슨 파문을 일으켰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죽고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엔 그만한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幻)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 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요컨대,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거기에 다만 幻이 잠시 빛나는 것임을 작가는 말해준다. 삶 속에서 영원하리라 여겼던 것들이 신기루처럼 가물거리는 곳에 삶은 낡은 추억들을 귓속말처럼 들려준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친절한 복희씨』는 도시의 삶에서 지치고 병든 탕아 앞에 바쳐진 초라하지만 대범한 밥상이다. 소설들은 ‘웰빙(Wellbeing)’으로부터 ‘웰다잉(Welldying)’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친절한 복희씨』에서 눈에 띄는 유의미한 변화는 긍정적인 삶에의 보다 적극적인 의지표명이라 할 수 있다. 관찰하기를 넘어서 대안을 보여주기로 나아가는 것.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궁극적인 깨달음에서 얻어진 일종의 달관 같은 것처럼 보인다. 앞서 인용한 대목에 그려진 ‘비상 버리기’가 그렇고, 『거저나 마찬가지』에서의 ‘아이낳기’가 그러하다. 또한 그것은 우리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선택한 주거공간인 아파트에 대한 탈출의지로 드러난다. 『친절한 복희씨』에서는 도시에서 자연으로, 아파트에서 땅집으로, 인간에서 사람으로, 주체에서 관계로의 이동들이 선명한 바가 있다. 그것은 현대에 대한 대안의 모색이며 “나만의 비밀스럽고 고유한 추억이 점점 안 중요해지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텅 빈 느낌”에 대한 저항이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이 제목은 정확히 에드워드 사이드의 유고집에서 가져온 것이다. 어쩌면 말년의 양식은 개개의 작가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우리가 속한 문명 자체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현대 문명은 분명히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청춘의 로맨스도, 모험할 미지의 땅도, 높은 정신적 척도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시대의 속도는 불행히도 인간에 속해있는 게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인간을 타자화하면서, 멀찌감치 인류를 폐기처분하려는 운동에 가깝다. 말년은 이러한 세계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운동에 대한 현상학적 탐색이 가능해지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말년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서 삶을 이해하려는 운동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완서는 우리 문학사에 드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거기에는 어떠한 쇠퇴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갑자기 밝은 빛으로 타오르는 마지막 불꽃을 바라보는 듯한 활력과 유쾌함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 소설사를 성숙하게 하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친절한 복희씨』는 우리 소설사에서 이제야 겨우 본격화되는 노년문학의 자리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늙음을 통해 이 세계에 발언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찍이 염상섭의 경우처럼 자신의 글쓰기 전체에 결구를 짓는 방식도 있겠고 최인훈처럼 거시적인 회고담에 이를 수도 있다. 노년의 시선으로 세상을 웅숭깊게 바라보는 최일남이나 이청준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 사회가 고령사회화함에 따라 얼마든지 긴 세월 동안 작가활동은 가능해질 터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문학은 말년의 위대한 작가의 출현을 목마르게 고대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급속하고 천박한 물질화, 정신적 자산 및 문화의 곤핍에 기인하는 바 크다. 최근 들어 이러한 현상은 소위 실용주의라는 미명하에 더욱 열악한 상태로 전락하는 감도 없지 않다. 노인들은 비효율적이거나 부가적인 관리의 대상이거나 심지어 폐기돼야 할 존재로 치부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원로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그 자체로 지극히 위험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 삶은 롤러코스터를 닮아 있다. 언제나 제 자리로 돌아오는 롤러코스터와는 달리, 여기에는 궤도이탈에 따른 파국의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점에서만 다르다.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는 이러한 사회 속에서 망각된 풍경과 목소리들을 다시 들려준다는 점에서 의미롭다.

첫 작품인 『나목』 옆에 『친절한 복희씨』를 놓고, 그 서사적 광경을 잠시 바라보아도 좋으리라. 우리는 두 소설 사이에 자리잡은 40년 가까운 세월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목』의 영혼은 영원한 청춘에 가깝다. 소설의 주인공은 현실 속에 안주하려는 모든 욕망을 비웃으며 영원한 가치를 추구한다. 그래서 『나목』은 연금술적인 작품이 된다. 소설 전반부에 자리잡았던 잿빛의 고목은 어느 순간에 황홀한 금빛과 연두빛의 설렘을 은밀히 간직한 나목으로 탈피한다. 거기서 『친절한 복희씨』에 이르는 길은 삶의 시련들이 반복되면서 못 박히고 고정되는 것으로서의 삶일 수밖에 없다. 한때 삶에의 간절한 희구가 죽음을 불러냈다면, 이제 죽음은 끝내 수긍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제나 이제나 삶은 한낱 광대짓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곧 사라져버릴 것들의 모습은 더 이상 조롱의 대상이 아니다. 『친절한 복희씨』의 내부에는 그런 존재들을 응시하는 희미한 웃음이 담겨있다. 작가는 마지막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그래도 해피엔드”라고.

비록 이 소설집이 말년에 다다른 노회한 시선을 통해 세상살이의 비의를 드러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아쉬운 감을 표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 속의 시선과 목소리가 장편소설이라는 형식 속에 담겼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장편이란 언제나 되묻고, 관련짓고, 깊이를 향해 나아가려는 몸짓인 탓이다.

 


손종업 / 선문대·국문학(문학평론가)

필자는 중앙대에서 ‘1950년대 한국 장편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됐다. 저서로 『극장과 숲: 한국 근대문학과 식민지 근대성』(월인, 2000), 『전후의 상징체계』(이회, 200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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