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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과감한 ‘소통’의 장을 위하여
좀 더 과감한 ‘소통’의 장을 위하여
  • 박상주 기자
  • 승인 2008.03.31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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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 다시 서평을 말하다]

이번 특집기획은 ‘다시, 서평을 말하다’이다. 지난 <비평> 특집기획 ‘한국 서평의 현 주소’의 문제의식을 더 밀어보자는 주문이 많았다. 이번에는 △좋은 서평의 조건 △문학서평의 갈 길 △사회과학서평의 위상학 △과학서평의 위치와 갈 길 등으로 나눴다. 지난 특집기획이 일반적인 서평을 놓고 그 지나온 길을 짚었다면, 이번 특집기획은 분야별로 차이를 갈라 ‘그럼 어떻게 쓸 것이냐’를 제안한다.

-사진_아라리오 제공
서평의 세계는 순탄치 않다. 언어도 날 것에서부터 세련된 언어로 분칠해있기도 하고, 그지없는 비비꼬기로 가득차 있기도 한다. 문제는 다양성이 아니라, 생동감 있는 비평으로서의 서평이 썩 드물다는 것이다. 교수신문 <비평> 473호의 고민은 이 대목에서 다시 시작된다. ‘다시 서평을 말하다’라는 기획 하에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비평가에서부터 인문학, 사회과학, 과학 분야의 소·중진학자들의 세밀한 서평 방식을 모았다.
문학평론가 이명원 씨(지행네트워크)는 ‘좋은 서평의 조건’으로 먼저 독립적인 지식인 모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논쟁 자체를 혐오하는 한국 지식인 사회의 기묘한 아비투어가 지양돼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그는  교수신문 <비평>의 ‘실험’에 대해서는 일견 반겼지만 강단서평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는 유보적 판단을 내렸다.

역시 현장 비평을 병행하고 있는 유희석 전남대 교수(영문학)는 ‘문학서평의 갈 길’을 환기했다. 유 교수는 지난 교수신문 <비평>을 보면서, “분과학문별 결속주의와 비판을 꺼려하는 전통문화”를 좋은 서평을 막는 ‘특별한’ 문제로 지적했다. ‘문학 분야 비평에서 이 점이 특히 허약하다’는 것이다. 또 찬사 일변도의 ‘주례사 비평’과 흠잡기 일변도의 ‘죽비소리’, 적당히 찬사와 비판을 섞은 ‘절충 서평’ 모두를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김훈 역사소설을 둘러싼 문학, 역사학 전공 평자들의 갈리는 의견들과 그 비평의 난점을 구체적으로 소개한 유 교수는 전문독자집단이 존재해, 비평적 서평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상식과 통찰을 문화적으로 축적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유팔무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사회과학 서평의 위상학’을 논했다. 유팔무 교수는 사회과학분야 전형적인 서평 실례를 들어, 평자의 어조에 따라 사회과학 서평을 3가지로 분류했다. 유 교수는 좋은 서평을 ‘좋은 책, 나쁜 책을 공정하게 가려주는 것’이라 했다. 물론 공정함의 어려움도 토로했다. 사회과학분야의 경우 평자의 정치적 입장이 서평의 입장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가능한 ‘속셈’을 객관화하고 공정하게 소개하는 자세로 임하길 권했다.

최종덕 상지대 교수(과학철학)는 ‘과학서평의 위치와 갈 길’을 제안했다. 먼저 △출판사 보도자료의 조합 △평자-저자간 모호한 입장 생성 △오탈자, 용어 문제만 논한 서평 등 나쁜 서평을 지목했다. 기근에 가까운 과학서평자의 부족 원인을 최 교수는 일선연구자의 ‘인문학적 관심’부족에서 찾았다.

특히 최종덕 교수는 과학자의 서평이 자기 논문이 위치한 맥락을 묻는 메타과학의 성격이라고 했다. 또 과학자들이 교양과학서를 수준 낮게 보는 선입관을 비판, 일반인이 읽을 수 있는 교양과학서를 넓게 아우르는 안목-즉 인문학적 관심-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최 교수는 과학서평계에 “응답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서평을 통한 도킨슨의 발전을 소개했는데, 실은 응답 없는 서평 현상이 과학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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